설교 모음
11/11/2018 | 열매 맺는 계절 5
수고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You Will Eat The Fruit Of Your Labor.
시편 128:1-4
오늘로 열매 시리즈 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열매는 식물들이 철을 따라 일년에 한 번씩 맺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수액(水液, sap)을 빨아 올리고, 양분을 공급받고, 햇볕을 받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비유적으로 보면, 사람도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물이 풍부한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시냇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은 우리의 삶에 영양분을 공급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햇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받아야 할 햇볕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양분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마치 식물들이 제 철이 되면 열매를 맺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Yet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전도서 3:11)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때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때를 우리는 준비하면서,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아간다.” 그런데, 사람들의 물레방아는 빨리 돌아갑니다. 조급합니다. 참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부지런히 수액을 빨아 올리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열매에 대한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6-11에 있는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진 것과 같이, 이제 여러분에게 전해졌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서 참되게 깨달은 그날로부터, 여러분 가운데서와 같이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와 함께 종이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골로새 (Colosse)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직접 골로새에 가지 않고 에바브라 (Epaphras)라는 자기의 동역자를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니까 그 결과가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결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기도했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이것이 바울의 기도 내용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복음이 자라서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6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same Good News that came to you is going out all over the world. It is bearing fruit everywhere by changing lives, just as it changed your lives from the day you first heard and understood the truth about God's wonderful grace.” 복음이 전파된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는 말씀은 수사학적인 표현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 복음이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8편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예배 드리러 가면서 불렀던 노래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면 고된 마음과 몸을 달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까지 예배를 드리러 갔던 유대인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일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과, 예배 드리러 가던 유대인들이 노래를 불렀던 마음이 같진 않겠지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그것도 맨 몸이 아니라 제물로 드릴 양을 데리고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길을 가다 보면 예배 드리러 가는 사람들을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같이 시편 128편을 불렀을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예배 드리러 가는 마음들을 서로 공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먼 길을 지루하지 않게 갔을 것입니다.
그 때 불렀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How joyful are those who fear the Lord - all who follow his ways)!” (1절) 성경에 ‘fear’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가장 유명한 말씀이 잠언 1: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다.” 또 9:10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명철의 시작이다.” 영어의 ‘fear’라는 말이 우리 말 성경에 ‘경외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fear’라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무서워하다’입니다. 하지만, ‘fear’라는 말에는 ‘무서워하다’라는 뜻 외에 ‘to have reverential awe of (~에 대한 존경하는 두려움을 갖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fear’에는 단순히 ‘무섭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 드리러 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이렇게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8: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How joyful are those who fear the Lord - all who follow his ways”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동일한 사람들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다.” 맞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는 일은 지속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는 일은 오랫동안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재미가 있으니까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일이 좋아서 스스로 합니다. 지난 주에도 시편 1편 말씀에서 그런 말씀을 읽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They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어떤 신사가 길을 가다가 아이를 등에 업고 가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가 아이를 업었으니까 뒤뚱뒤뚱하는 것이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신사가 그 아이에게 그랬습니다. “얘, 힘들겠다. 그만 내려 놓지 그러니?” 그랬더니 이 아이가 그 신사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힘들지 않아요! 이 애는 내 동생이예요!” 이 신사는 그 때 어떤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등에 업으면 힘들지 않는 것처럼, 기뻐서 하는 일, 즐거움으로 하는 일도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입니다. 비록 그 길이 멀고 힘들지만,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기쁨으로 그 길을 갑니다.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씀대로 사는 일이 힘들지 않습니다.
2절 말씀을 볼까요? “그는 수고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복과 번영이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You will enjoy the fruit of your labor. How joyful and prosperous you will be).” 이 말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수고의 열매를 먹는다’는 말씀입니다. 애써서 하는 일에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는데, 그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순탄하게 학위를 마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렵게 학위를 받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연구과정으로 들어가서도 어떤 사람들은 순탄하게 그 과정을 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구에 성과가 있어서 무슨 저널에 논문이 실렸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의 열매’를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힘들게 연구 과정을 밟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4개월을 죽자고 했던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절망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의 열매’를 먹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 횡재는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하면, 이것처럼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You will enjoy (eat) the fruit of your labor!” 이런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복과 번영이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How joyful and prosperous you will be)!”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나 기쁘고 복된 사람이 될런지요!”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에 나와 믿음을 기르고 있는 청년들이 수고의 열매를 먹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의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담임 목사로서 저절로 그런 기도가 입에서 나오고, 여러분들의 얼굴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생 시절을 여기서 보내고, 대학원, 박사 후 과정을 여기서 보내면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공부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젊음도, 여러분의 열정도, 힘도, 여러분의 꿈과 희망도 전부 여기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고의 열매’를 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문제는 어떻게 하면 ‘수고의 열매’룰 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가지 ‘수고의 열매’를 먹을 수있는 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수고의 열매’를 먹을 수 없습니다. ‘수고의 열매’를 먹는 것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127편 역시 유대인들이 예배 드리러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됩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경비병들의 보초가 헛됩니다. 먹고 살고자 애쓰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리에 눕는 일이 무슨 소용 있을까요?” (1-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t is vain for you to rise up early, to retire late, to eat the bread of painful labors.” (NASB) 개역성경에는 ‘to eat the bread of painful labors’를 ‘수고의 떡을 먹는다’라고 멋지게 번역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리 고생하고, 하루 종일 일해도 결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수고한 모든 일에 열매를 보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처럼 복 있는 사람입니다 (That is the Lord’s blessing for those who fear him).” (4절)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고의 열매’를 먹습니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우리가 애쓴 만큼 ‘수고의 열매’를 먹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요한복음 15: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대로, 열매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열매 없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수고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열매 시리즈 설교를 마치면서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이 말을 가시적(可視的, visible)인 실적이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열매 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반드시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열매’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받는 고난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열매’를 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열매’는 없어도 하나님과 여전히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의인들이 핍박을 받는 현실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하박국 (Habakkuk)이 불렀던 노래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 내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해 주셔서 가파른 산 위에서도 다닐 수 있게 하십니다.” (하박국 3:17-19)
11/4/2018 | 열매 맺는 계절 4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Like Trees Planted By Streams Of Water
시편 1편
요즘엔 사방 어디를 보든지 가을이 완연합니다. 나뭇잎들이 예쁘게 물들었습니다. 하도 색깔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 제 facebook에 올렸더니,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목사님 가을을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꿈과 같은 사진들입니다.” 우리는 사방 어디를 보나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있는데, 캘리포니아만 해도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날이 좋으면 MIT 다리에서 다운타운 쪽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좀 찍어야 하겠습니다. 학생들은 날마다 책 읽어야 하고, 과제를 해야 하고, 시험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아름다운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번은 아침 일찍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몹시 시장하셨습니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열매를 하나 딱 먹으려고 가 봤더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다시는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할 것이다!” (마가복음 11:14) 그러자 즉시 이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작다면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고,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무화과나무 사건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너희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같은 말씀에 이런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겠다.” (요한복음 2:19)
별 것 아닌 것 같은 무화과나무 사건이 성전 구실을 못하는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되어 엄청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나무나, 성전이나, 사람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사느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인생을 사느냐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편 1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다윗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성서학자들은 이 시편 1편을 다윗이 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서 그렇게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1편을 누가 썼는지 모르니까 그냥 저자를 ‘psalmist (사미스트)’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1편의 사미스트는 두가지 길을 시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들이 가는 길 (the path of the wicked, 1, 2절)’이고, 다른 하나는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 (the path of the godly, 6절)’입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생명과 복, 죽음과 멸망의 길을 내 놓았습니다. 부디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살고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따르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섬기면,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은 망할 것입니다.” (신명기 30:15-20) 참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일을 모두 목격(目擊)했습니다. 그 모세가 마지막 고별 인사를 하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백성들 앞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과 복의 길을 외면하고 죽음과 멸망의 길을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태복음 7:13-14)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문은 큰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거절하고,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을 선택합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시편 1편을 쓴 사미스트도 우리 앞에 두 길을 보여줍니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 결정하라고 합니다. “생명과 복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멸망의 길을 갈 것이냐?” “좁은 문으로 들어 갈 것이냐?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냐?” “경건한 사람들이 걷는 길을 걸을 것이냐? 죄인들이 걷는 길을 걸을 것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미스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꼬임을 따르고 (following the advice of the wicked, 1절)’ ‘죄인들이 다니는 길에 서 있고 (standing around with sinners, 1절)’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는 (joining in with mockers, 1절)’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은 진짜 같습니다. 그들의 말은 진짜처럼 위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늘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사자성어입니다. 참된 것은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것은 빛이 납니다. 화려합니다. 그 화려한 빛에 모두 속아 넘어갑니다. 죄인들은 밝은 곳으로 다니지 않고 어둠 속으로 다닙니다. 죄인들이 다니는 길에 서 있다는 말은 죄인들이 하는 일에 관계하고 끼어든다는 말입니다. ‘빈정댄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험담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죄성(罪性, sinful nature)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멸망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죄인의 길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사미스트는 죄인의 길을 걷는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They are like worthless chaff, scattered by the wind).” ‘chaff’는 곡식의 껍질을 말합니다. 우리 말로 ‘겨’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키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곡식을 키 (winnow) 넣고 키질을 하면 무거운 곡식은 남고 가벼운 겨는 날아갑니다.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죄인의 길을 따르는 결과는 허무합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겨처럼 다 날아가 버립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계속 읽어 보십시오. 이제 사미스트는 경건한 사람들이 걷는 길을 따라 사는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사미스트는 이런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대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But they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meditating on it day and nigh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설교자인 제 눈에는 ‘delight’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 장로교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교파를 많이 따졌었는데, 요즘 청년들은 교파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참 잘된 일 같습니다. 장로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교리를 문답식으로 만들어 놓은 책입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질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입니다.
시편 1편에서 사미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미스트는 “Those who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meditating on it day and night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깊이 묵상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우니까 밤낮으로 묵상을 해도 싫지 않습니다. 지겹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라는 말씀을 본 적이 있습니까? 구약 느헤미야 8:10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을 해도 즐거운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은 인생의 행복을 어떤 환경이나 물질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행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 뜻을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목적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다시 경건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3절) “They are like trees planted by streams of water, bearing fruit each season. Their leaves never wither, and they prosper in all they do.”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니, 이 나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마셔도 마셔도 물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냥 ‘water’라고 하지 않고 ‘streams of water’라고 했잖아요? 우리 말로 번역하면 ‘물줄기’입니다. 그냥 물 옆에 심긴 것이 아니라 물줄기가 흐르는 마르지 않는 강 옆에 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물이 부족합니다. 강이라고 해야 요단강 하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마르지 않는 강가에 심긴 것입니다. 강가에 심긴 나무가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지금 사미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이 ‘강가에 심긴 나무’에 대한 말씀같이 보이지만, 정말 사미스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강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죄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사람들이 바로 강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37-38 말씀입니다. “축제가 절정에 달한 명절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Whoever believes in me, as the Scripture has said, stream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him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장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성전 뜰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28). 성전 뜰에서 초막절을 지키려고 온 사람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데도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내버려 두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성전은 유대교의 심장부입니다. 그 심장부에서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 성전은 전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수명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교의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참 성경 말씀이 오묘하지 않습니까? 사미스트가 말하고자 했던 ‘물가에 심긴 나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They prosper in all they do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하는 일들이 잘 될 것입니다).” (3절) “For the LORD watches over the path of the godly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의 길을 지켜 주십니다).” (6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미스트는 ‘의인들만 들어가는 모임 (the assembly of the righteous, 5절, NIV)’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모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죄인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 모임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개역개정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Sinners will have no place among the godly).” 이 말씀을 읽다가 안타까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의인들이 모이는 곳에 와서 어디 앉을 자리가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이 사람이 앉을 자리는 없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작은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차이가 별로 심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형통한 인생을 살게 되고, 의인들의 회중에 들어가게 되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결국은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10/28/2018 | 열매 맺는 계절 3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Fruit!
마태복음 7:15-20
영어에 ‘Sunday Christian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고, ‘churchgoer (교회 다니는 사람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요한 웨슬리는 ‘반쪽 크리스천 (Half Christian)’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선교학에서는 ‘Nominal Christian (명목상의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사람이 참된 크리스천인지 그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참된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참된 목사인지, 거짓 목사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말만 들어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천사처럼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다들 그 사람이 천사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굶주린 늑대가 들어 있습니다. 전에 늑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늑대처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짐승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잡아 먹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소도 잡아 먹고, 양도 잡아 먹고, 닭도 잡아 먹고, 닥치는 대로 잡아 먹습니다. 마을에 늑대가 나타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긴장합니다. 늑대는 혼자 행동하지 않고 꼭 3-4마리, 혹은 5-6마리가 같이 행동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영리한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 속에 늑대가 들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처럼 겉모습을 위장하기 때문에 도무지 양인지, 늑대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를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fruit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1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fruit (열매)’라는 말은 그 사람의 ‘행동’ 혹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만일 그 사람이 가시나무라면 반드시 가시나무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엉겅퀴나무라면 엉겅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지, 그 나무가 어떻게 무화과 열매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고, 나쁜 나무는 반드시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이나,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좋은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7:37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사람들은 정말로 놀라워하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모두 훌륭하다’라고 말했습니다.” “They were completely amazed and said again and again,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어떻게 보면 평범한 말씀같이 들리기 때문에 그냥 읽고 지나갈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에게는 흠도 없고, 티도 없고, 죄가 없으신 어린양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니까 그가 맺는 열매도 모두 훌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맺으신 열매는 단 하나도 나쁜 열매가 없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좋은 나무였던 것입니다. 이 평범한 말이 오늘 우리들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동안 좋은 나무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속속 나쁜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양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 속에 탐욕스러운 늑대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뉴스나 신문 지상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좋은 나무가 되는데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을 먼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은 집의 기초 (foundation)를 닦는 일과 같습니다. 귀찮고, 뻔한 일처럼 보이고, 시간이 걸리고,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여도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견고하게 잘 닦아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집을 짓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꼭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좋은 나무가 되는 길을 그렇게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세요.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2)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좋은 나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 말씀에서도 ‘영생을 얻는 일’을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고린도후서 5:15-17)
저는 바울서신에 나오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천재입니다.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어려운 신학적인 개념을 쉬운 일상의 용어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십시오. “He died for everyone so that those who receive his new life will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Instead, they will live for Christ, who died and was raised for them.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This means that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He died for everyone so that they will live for Christ.” 이 말씀을 생각하다 보니 언젠가 한번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Uchimura Kanzō, 1861-1930) 목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우찌무라 간조가 1884년 23살의 나이에 매사추세츠 서쪽에 있는 앰허스트 대학 (Amherst College)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뜻을 세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지금 우리 세대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인생을 드리겠다고 뜻을 세우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느냐 하는 것입이다. 왜 지금은 우리 중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 뜻을 품고, 이를 실천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후, 새롭게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들 중 상당 수가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함석헌, 김교신 등 걸출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에게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수사적인 표현 (rhetoric expression)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알기 전에 자기 자신만 알던 사람의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새로운 창조 (New Creation)’ 혹은 ‘새로운 사람 (New Person)”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알던 사람의 관점(觀點)이 ‘a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 혹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로 가치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나무’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좋은 나무’를 만드는 일, ‘좋은 나무’를 만드는 사역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은 공부를 많이 하거나, 교양을 많이 쌓아서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는 겉모습은 양인데, 속에는 늑대가 들어 있는 크리스천들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스코트랜드의 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에 장로들이 목사님께 드릴 얘기가 있다고 해서 같이 모였습니다. 장로 대표가 하는 말이 우리 장로들은 목사님에게 사임을 권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연세가 많고 또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사임을 권하는 이유였습니다. 장로들은 자기들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데이터를 제시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목사님이 하신 일은 한 명에게 세례를 주신 일 밖에 없는데, 그 한 명도 어린 소년이라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돌아 간 후에 풀이 죽은 목사님은 교회 뜰을 이리저리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가 “목사님!” 하면서 목사님의 팔꿈치를 툭 쳤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바로 그 목사님이 세례를 준 로버트라는 아이였습니다. “로버트야, 목사님이 뭘 도와줄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앞으로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가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 참 훌륭한 생각을 했구나. 목사님이 로버트를 위해서 기도하마!”
세월이 흘러 이 로버트라는 아이는 자기의 소원대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연 로버트 모팻 (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 선교사)입니다. 유명한 데이빗 리빙스톤 (David Livingston, 1813-1873)의 장인입니다. 데이빗 리빙스톤은 장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목사님이 하신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해 동안 한 일이 겨우 어린아이 한명에게 세례 준 일이 전부였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 하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고, 크리스천이 되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체가 이 아이에게 복음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서 좋은 나무가 되도록 하는 일, 이 일이 바로 우리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All church leaders must be prepared for a good tree making ministry (모든 교회 리더들은 좋은 나무를 만드는 사역을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장로님들도, 권사님들도, 집사님들도, 가족장들도, 간사들도, 목사도, 전도사도 이 일을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번 창립 4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교회 사진첩을 만들었습니다. 사진으로 지난 역사들을 정리하면서 2018년 사진들은 따로 섹션을 분리해서 실었습니다. 사진첩을 보고 있으면 지나간 과거가 한 눈에 보입니다. 이제 5년 후, 10년 후에는 우리교회의 어떤 사진들이 실릴지 궁금합니다.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사진들, 찬양하는 사진들, 식사하는 사진들도 좋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진은 따로 있습니다. 좋은 나무를 만드는 사역에 동원된 사람들의 사진입니다.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이 이 사진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the lives of those who follow it①." / ①Or But wisdom is justified by all her children).” (누가복음 7:35)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틀렸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교회는 좋은 나무 만드는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계속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가을은 열매 맺는 계절입니다. 여름철에 푸르렀던 잎들이 아름다운 단풍잎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계절에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매년 이 때가 되면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가을이어서 감상적인 (sentimental)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그것이 우리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우리가 언제까지 신앙의 기초를 닦는 일을 할 것입니까? 이제는 좀 성숙한 단계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5:12)?”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우리에게 신앙의 기초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쉽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심각하지 다루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배우지 않고 대충 지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배웠다면, 우리는 이미 좋은 나무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 있지 않거든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초로 돌아가서 복음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답답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복음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나무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10/21/2018 | 열매 맺는 계절 2
내 안에 거하라! Abide in Me!
요한복음 15:1-8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어,
열매들이 온전히 무르익게 하시고
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 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럴 것이며,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도 예수님과 그렇게 친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요한복음 15:14) 예수님과 우리가 진한 fellowship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해야 합니다. 아주 쉬운 말씀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쉬운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QT나 말씀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과 fellowship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10/14/2018 | 창립 40주년 기념예배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 A Church Confessing Jesus As Lord
마태복음 16:13-20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이 찬송을 부르면서 저의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우리교회 40년의 역사 중에 32년을 제가 섬겼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그동안 저와 함께 교회를 섬겼던 분들이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밖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2).” “다른 것은 하나도 보시지 않고, 오직 믿음 하나만 보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지금 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 말고 다른 것들을 보셨더라면 (나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어서) 도저히 이 자리에 설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 바울의 고백이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의 고백입니다.
저는 1986년에 이 교회에 교육목사로 부임해서, 1988년에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보스턴 신학교 박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그 때 하나님은 저에게 담임 목사직을 수락하도록 urge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때 교회 형편을 모르시는 분들은 “아니,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부르는데 주저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교회는 결코 좋은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하나님께서 저를 urge하시는 것을 느끼고 담임 목사 직을 수락했습니다.
제가 담임 목사로 취임하는 날, (거창한 취임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 그냥 담임 목사가 되어 첫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 때 제 설교 제목은 ‘산 위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5:14-16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제가 이런 설교를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 1971년이었습니다. 그 때 기독교서회라는 곳에서 출판한 ‘현대신서’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1970년에 ‘현대신서 22 번’이 나왔는데, 책 제목이 ‘산 위의 마을’이었습니다. 오토 브루더 (Otto Bruder)라는 사람이 독일어 로 쓴 책인데, 누가 번역을 한 덕분에 한국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한 젊은 목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그 때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 밑에 있었습니다. 독일 교회들은 할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비밀 경찰들에게 끌려 가는 때였습니다. 그 때, 한 젊은 목사가 부임해 온 것입니다. 교인들은 모두 그 젊은 목사를 주목했습니다. 과연 그가 예배 시간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고 젊은 목사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반 년이 지나도 이 젊은 목사는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할 뿐, 그의 입에서 교인들이 기대했던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변화가 있었다면 이 젊은 목사가 주 중에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열심히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공부 시간에 별다른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한 주 한 주 지나가던 어느 주일 아침, 예배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시간에, 검은 색 지프차가 교회에 들어왔고, 비밀경찰들이 다짜고짜로 젊은 목사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던 때에, 그 마을 입구에서 구두 수선 가게 (Shoe Repair Shop)을 운영하고 사람이 비밀경찰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어쩌려고?” 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동네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새 목사님 이 부임하면서 이 사람이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우리 목사님을 데려갈 수 없다”고 비밀 경찰 앞을 막아 선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그 책의 하이라이트 장면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교회를 담임한다면 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목사로 있었으니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유학 와서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복음이 사람을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30년 전에 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그 때 이후 저는 이 믿음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는 이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켰습니까? 복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했습니까?” 제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지난 30년을 설교했지만,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악한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대로 교회가 변화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이 믿음을 가지고 설교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교회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전체 주님의 교회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많은 과제가 쌓여 있습니다. 인구는 감소하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있고,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과거에 수 백 년에 걸쳐 일어날 변화들이 하루 아침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지금의 속도로 발전한다면, 멀지 않아 인간관계에 큰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위기, 목회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기가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교회의 미래를 놓고 기도할 때마다 주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은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교회는 더욱 복음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 발짝만 삐끗하면 5년 후, 10년 후, 우리 교회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창립 40 주년이라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의 때에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한번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의 결심을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젊음도, 나의 열정도,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나로하여금 교회에 대한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을 회피하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