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2018 | 사순절 30

부활의 능력 Power of The Resurrection

이사야 53:1-5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고,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 주변 사람 누구도 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 사람들은 그의 불행을 보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저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사람이 그런 아픔을 겪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앓았어야 할 질병을 대신 앓아 준 것이었고, 그가 상처를 입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그렇게 짓밟힌 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아픔을 겪고, 상처를 입고, 짓밟힌 덕분에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성서 신학자들은 편의상 이 사람을 ‘고난 받는 종 (the suffering servant)’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은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고난 받는 사람이 자기 민족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고난을 받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고난 받은 자기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고난 받은 것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는다는 이 말씀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크리스천들은 이 ‘고난 받은 종’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정확하게 오버랩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신 (for)’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가 그런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그가 대신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죄→심판→죽음’의 공식이 깨졌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공식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롭다함을 얻음→영원한 생명을 얻음’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공식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이 묻혀 있는 묘지에 가 보면 비석에 많이 새겨져 있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 누구의 묘’ 이런 비석들이 제일 많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 (디모데후서 4:7) 이런 말씀들도 많습니다. 가끔 이런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는 비석도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이 말씀 다음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전서 15:56-57)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우리가 따르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는 공식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저께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제자들의 ‘stubborn unbelief (고집 센 불신)’을 꾸짖기 위해서 였다고 말씀을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 속에서도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있었던 ‘stubborn unbelief’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stubborn unbelief’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버리지 않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특히 부활에 대한 우리 속에 있는 ‘stubborn unbelief’를 내려 놓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보면 부활의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청년들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 지금 부터라도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 우리 인생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게 하셨고, 삶의 미션을 가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부를 해도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나를 위해 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벌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example을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삶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에 걸린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걸어보지 못한 친구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으로 받아들인 네 친구는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느 집 안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되자, 이 네 친구는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들 것에 달아 내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예수님은 너희의 믿음이 친구를 구원했다고 하시면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의 중요성을 부각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에는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 인도한 빌립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 나다나엘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서 “친구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오겠어?” 이렇게 말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빌립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친구야, 일단 나와 같이 그 분에게 가 보자!” 하면서 결국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친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요한은 이 이야기를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의 복음서 1장에 이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3/19/2018 | 사순절 29

부활의 기적 The Miracle of The Resurrection

마가복음 16:1-20

오늘 말씀은 상당히 긴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장 전부를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 몇 절만 읽지 않고 전체 말씀을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보세요. 1-8절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 나셨다는 말씀입니다. 9-11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이고요. 12-13절은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이고, 14-18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입니다. 19-20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장 전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혹은 몇 사람이, 혹은 그룹으로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거나, 질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몇 명의 여자들이 주일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 갔던 이유는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발라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유대식 무덤은 동굴에 시신을 안장 하고 입구를 큰 돌을 굴려 막는 형식이었습니다. 당연히 여자들은 큰 돌을 굴려 낼 일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했더니,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간 여자들은 거기서 천사를 만났습니다. 천사는 놀라지 말라고, 너희들이 찾는 예수는 부활했다고, 그래서 여기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가서 그대로 전하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너무 놀라서 무덤을 도망쳐 나왔고, 너무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주려고 제자들에게 달려 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8) 제가 보기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 있게 들립니다. 그 엄청난 현장을 목격하고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여자들이 다리가 후들거릴 텐데, 아무 말도 못했다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 있게 들립니다.

이 이야기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데로 빼돌리고 나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11-15에 이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는데, 엉뚱한 무덤을 잘못 찾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현장부터 무덤에 묻히는 장면까지 모두 목격했기 때문에 (마가복음 15:40-41), 무덤을 잘못 찾아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8절하고 9절의 연결 부분이 뭔가 좀 어색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짧은 엔딩 (short ending of Mark)’과 ‘긴 엔딩 (Longer Ending of Mark)’라는 학설을 내 놓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본은 마가복음이 8절에서 끝나고, 어떤 사본은 20절에서 끝이 납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런 학자들의 이야기는 그냥 참고로만 하면서,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신 적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8:2).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의심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 의심은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서 다른 곳에 숨겨 놓았는데, 그 죽은 예수님이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제자들을 찾아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했을 때 제자들은 슬퍼 울고 있었고 (10절),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고 하잖아요 (11절)?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골로 내려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24장에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로 나와 있습니다. 이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엠마오 (Emmaus)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곳입니다. 이 두 제자가 가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했는데, 오늘 말씀 보면 그 때도 제자들은 두 사람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제자의 이야기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실성을 더해 줍니다.

넷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마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가 빠졌기 때문에 열 한 제자라고 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과 마음이 굳은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He rebuked them for their stubborn unbelief because they refused to believe those who had seen him after he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stubborn unbelief (고집 센 불신)’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 옵니다. 열 한 자에게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의 고집 센 불신을 꾸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벌써 여러 번, 여러 채널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전해졌는데도, 제자들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고집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because they refused to believe those who had seen him after he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이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거절함으로써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불신했고, 성경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였을 때 나타나셨는데, 그 때 도마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위해서 다시 나타나서 손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7) 그 때 도마가 확인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도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개별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심으로 그의 배신을 다시 믿음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17)”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외에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고 (요한복음 20:17), 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해변에서 식사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1:9-13).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씀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몸은 죽었고, 영만 부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1:1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생활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모든 말씀 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의심을 풀어 주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발하신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조그만 의심이라도 친히 보여 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책망도 하시면서 모두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에 대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일서 1:1-2)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모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 말씀 하시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저와 한 절 씩 교대로 읽겠습니다. “27 성전 경비대에 속한 사람들이 사도들을 데려와 공의회 앞에 세우자, 대제사장이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대들은 예루살렘을 온통 그대들의 가르침으로 채워 놓았소. 그리고 예수를 죽인 책임을 우리에게 넘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0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31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높이 올리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지도자와 구세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에게 주신 성령 역시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5:27-32)


3/18/2018 | 사순절 새벽기도 6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Ask, Seek, Knock.

마태복음 7:7-11

그동안 여러 번에 걸쳐 기도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기도 시리즈 마지막 설교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이니까 부활 신앙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기도에 대한 책들도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기독교는 기도에 대한 오랜 전통과 역사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전에 살았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기도를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을 읽어 보면, 그 당시의 제사장은 엘리 (Eli)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웠습니다. 엘리에게 어린 남자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키워 달라고 맡긴 아이였습니다. 그 부모가 나이가 많도록 아이가 없었는데, 그 어머니 한나가 “만일 저에게 아이들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고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낳은 아이가 사무엘입니다. 남편과 의논한 한나는 서원 했던 대로 겨우 젖을 뗀 어린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런데 엘리는 ‘아니, 난 너를 부르지 않았다. 가서 자거라” 하면서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 때서야 엘리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아, 다시 너를 부르는 소리가 나면 ‘여호와여, 말씀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여라.”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Samuel did not yet know the LORD because he had never had a message from the LORD before).” (사무엘상 3:7)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엘리 제사장이 죽고, 사무엘의 시대가 열립니다. 사무엘이 백성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만약 내가 기도를 멈춘다면, 그것은 여호와께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이 좋고 옳은 것인가를 가르치겠습니다 (As for me, I will certainly not sin against the LORD by ending my prayers for you. And I will continue to teach you what is good and right).” (사무엘상 12:23)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많은 영감 (inspiration)을 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꾸준히 소통하는 사람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꾸준하게 자신의 삶 속에서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됩니다. 간혹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이비 기도꾼들입니다. 제대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운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운 사람 역시 잘못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말씀이 디모데후서 3:16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기도를 열심히, 포기하지 말고 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씀 속에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씀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난 이제 잠자러 가요!” “God is great, God is good!” 이렇게 기도합니다. 비록 이런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어릴 때부터 기도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라는 컨셉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기도를 계속할 수가 없잖아요? 어른이 되면 당연히 기도하는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엇을 구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무엇을 찾으라고 하셨을까요?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11절) 하나님께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주신하고 하신 ‘좋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if you sinful people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직역하면, “너희 죄인들도 어떻게 하면 너희 자녀들에게 ‘good gifts’를 줄까 하고 생각하는데,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더욱 구하는 사람들에게 ‘good gifts’를 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누가복음 11:13에 보면 거기에 오늘 말씀과 똑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good gifts’라는 말 대신 ‘the Holy Spirit (성령)’이라는 나옵니다.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생각할 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르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I want to know Christ and experience the mighty power that raised him from the dead. I want to suffer with him, sharing in his death).” (빌립보서 3:10) 그리스도를 알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 싶고,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열망이 없는 사람들은 이 열망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 물어 봅니다. “요즘에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 보면 “에,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대답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싶은 실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구하라 (Ask)”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소풍 가면 ‘보물찾기’를 합니다. 선생님들이 보물을 숨깁니다. 그런데, 너무 깊이 숨겨 놓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다니면서 “돌멩이 밑을 잘 봐라!”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라!” 학생들이 너무 엉뚱한 곳을 뒤지고 다니면 “야, 그런데는 없어!” 하면서 힌트를 줍니다. 하나님은 너무 깊이 숨어 계시기 때문에 찾을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읽어 보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발견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정말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오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이 주를 찾아 헤매입니다.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1-2절) ‘pants’라는 말은 명사형으로 쓰면 ‘팬츠 (빤쓰)’라는 뜻으로 사용 되지만, 동사형으로 쓰면 ‘(목이 마르거나 숨이 가빠서) 헐떡인다’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목이 마른 사슴이 물을 먹지 못해 헐떡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애타고 절박한 마음으로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애써 찾는 사람들에게 발견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은 너희에게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예레미야 29:11-14) “Then 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 to me, and I will listen to you.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ek me with all your heart. I will be found by you." 하나님은 ‘with all your heart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to be found’ 발견되시는 하나님입니다.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방황을 합니까? 그 마음 속에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emptiness)’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여자는 왜 아무도 물을 뜨러 오지 않는 12시에 왔을까요?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왜 그 사마리아 여자는 그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했을까요(요한복음 4:15)?” 그 마음 속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emptiness (공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사마리아 여자이 마음 속에 있었던 ‘공허함’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공허함’의 정체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a thirst for God)’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맥스 루카도 (Max Lucado)가 예수님의 ‘주기도문’에 대하여 쓴 책 제목이 ‘A Thirst for God’입니다. 이 목마름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까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속 깊은 곳에 이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마름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목마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 (St. Augustine, 354-430)이 그의 ‘고백록 (Confession)’에서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Thou hast made us for thy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thee (오 주님,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 마음엔 안식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구하라”라는 말씀이 우리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혹은 요청한다,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뜻이 있고, “찾는다”는 말 속에 마음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setting되어 있다는 의미가 있다면,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우리가 보여야 하는 행동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결국은 행동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은 더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입으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입으로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이 그 사람의 삶에서 행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진리와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사순절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 드리면서, 사순절은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는 40일 간의 특별한 기간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세 가지 일을 해 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세 가지는, ‘기도 (Prayer)’와 ‘금식 (Fasting)’과 ‘자선 (Almsgiving)’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도도 알겠고, 금식도 알겠는데, 자선은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이 남을 돕고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에 해야 하는 일 가운데 ‘자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자선’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일종의 ‘메타포 (metaphore)’입니다. 문을 두드려야 문을 열어 주는 것처럼, 구하고 찾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문이 열린다는 희망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잠긴 문이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젊은 사자도 힘이 없고 배가 고플 때가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갖가지 좋은 것들을 모두 얻게 됩니다.” (시편 34:10)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8)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끝으로,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기도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는다고 해도 그 지식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 시키는 ‘life changing knowledge (삶을 변화 시키는 지식)’이 되려면, 실제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지식이 모두 죽은 지식이 됩니다. 히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44:15)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3/17/2018 | 사순절 28

십자가의 메시지 The Message of The Cross

마가복음 15:35-39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로마서 5:2에서 바울이 선언한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이전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로마서 3:23). 십자가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잘 읽어 보세요.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아무 한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는 ‘undeserved privilege (감당할 수 없는 특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단지 십자가의 메시지를 듣고 받아 들인 것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종교나 사상은 없습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 (ran-som)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위대한 것은 그 대가를 하나님께서 친히 지불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Yahweh-Yireh, 창세기 22:14)’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2:14).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For God bought you with a high price. So you must honor God with your body)." (고린도전서 6:20)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몸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3) 예전에 살았던 성 프랜시스 (St. Francis, 1181-1226, 이탈리아)는 ‘평화의 기도 (Prayer of Peace)’로 유명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이 기도로 유명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뛰고, 우리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나도 나의 삶을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드리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삶을 도구로 드린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나를 위한 이기적인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림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리고, 탐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살았다 감으로 조금도 인류의 삶을 진전 시키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종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히말라야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느 루트로 정상에 올랐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비유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극수수의 사람이 정상에 올라가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로 아래도 내려가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정상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정상으로 올라가는 종교로 본 것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느 길로 올라가든 정상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다 같다는 주장을 합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어느 수준에 오른 등산가라면 남이 아직 오르지 못한 험난한 루트를 개발하고, 그 루트로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남이 오르지 못한 루트를 통해 정상을 정복하고 쾌감을 느낍니다. 정상에 오는 루트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 주신 루트는 나만 알고 나만 오를 수 있는 험난한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쉽고 편한 루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우리의 ‘몸 값 (ransom)’으로 내 주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이렇게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진리의 전부입니다. 누구나 이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요즘은 물건을 살 때 우편 주문을 많이 합니다. 우편 주문을 할 때 값이 싸다고 덜컥 주문 했다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그냥 15불 이라고 해서 싼 줄 알고 주문 했는데, 몇 가지 물어 보는 것들이 있길래 yes라고 한 두 번 눌렀는데, 마지막 결재할 때 금액은 26불입니다. 이것을 hidden cost라고 하잖아요? 우편 주문을 할 때는 hidden cost가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에는 hidden cost가 없습니다. 쉬운 줄 알고 발을 들여놨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렇게 구원의 길이 어렵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 들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잖아요? 깨어진 관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회복된 관계에는 사람에게 평안 (peace)을 줍니다.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눈에 올바른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로마서 5:1-2)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말씀인가요? 이 말씀에서 복음의 영광의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얼굴이 상상이 됩니다. 그의 얼굴은 복음의 영광의 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 이유가 오늘 읽은 37-38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때, 성전에 있던 휘장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이렇게 선언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좍!"하고 찢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에, 그 지성소 안을 비추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밖으로 새어 나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앞에 구원의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 바로 밑에서 형을 집행하던 장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역사적인 장면의 participant, 아니 목격자가 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exclaimed, ‘This man truly was the Son of God!’” (39절) 감정에 북받친 백부장의 입에서 이 소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구원의 새 길을 즐겁게 걸어가야 합니다.


3/16/2018 | 사순절 27

나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 God’s Amazing Plan For Me

시편 139:1-13

“예수님에게 생의 목적이 있으셨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생의 목적이 있으셨겠지요. 생각해 보면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의 목적’은 그 사람의 삶의 이유와 삶의 의미, 그 사람의 사명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삶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 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말도 되고, 사명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삶의 목적이었을까?” 하는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력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나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Christian’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를 찾아 봤더니, 이런 정의가 있더라고요.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알렉산더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투에 나아가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행위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도망병을 잡으면 공개적으로 처형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도망치다 붙잡혀 알렉산더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보니 파란 눈의 앳된 소년이었는데, 너무 불쌍해 보여 죽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알렉산더가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라고?” 소년 병사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과 똑같았던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화가 나서 세 번째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 놀란 병사가 “알렉산더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자 알렉산더가 달려가서 그 병사의 멱살을 휘어잡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가 알렉산더라고? 네 이름을 바꾸던지, 네 삶의 태도를 바꿔라!”하고 호령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용기 없는 소년이 자기와 똑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정말 크리스천답게 살지 않으려면, 그냥 이름만 가지고 있을 생각히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생각이면, 크리스천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마가복음 10:45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even’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 윗절에서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대속물’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속물(代贖物)’이라고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대신 드리는 속죄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ansom’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몸값’ ‘보석금’이라는 뜻입니다. ‘보석금’이라고 할 때 ‘bail’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을 ‘ransom’으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그대신 우리는 풀려나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죄의 노예로부터 풀려나 자유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for many)’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어떤 사람들을 상대하셨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 가시는 곳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도 예수님은 서슴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땅은 유대인들에게는 들어가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도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이틀르 머물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40). 예수님은 지중해 연안 시돈과 두로 지방에도 가셨습니다. 이 지방 역시 유대인들은 들어가기를 꺼리는 이방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딸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한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기 위해 왔는데, 그 중에 시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아무 차별 없이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지혜의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이 그저 아무 뜻 없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예수님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주님 (the Lord)’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ransom for many’라는 말씀 속에 이렇게 인종을 초월해서, 국경을 초월해서, 사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말씀 속에 여러분과 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지만, 그 중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은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ransom’의 의미를 자신의 삶 속에 잘 적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결국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서 말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고백을 듣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고 난 후에 이런 고백을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습니까? 아쉽지만 그 때는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나의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언제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정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빌립보서 4:7)’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대한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9편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께서 지금까지 나를 살피셨으니 주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이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 (1-6절)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 내가 언제 잠자리에 들어가는 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If I go down to the grave①, you are there.” (8절) / ①Hebrew to Sheol 내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실망에 빠지고,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추적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단 한순간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 엄청난 지식에 완전히 압도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Such knowledge is too wonderful for me, too great for me to understand.” (6절)

또 계속 말씀을 읽어 보시지요. “주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을 지으셨으며,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You made all the delicate, inner parts of my body and knit me together in my mother’s womb).” (13절) 하나님은 나를 속속들이 모두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속품까지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속품을 조립해서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5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I knew you before I formed you in your mother’s womb. Before you were born I set you apart and appointed you as my prophet to the nations (내가 모태에서 너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나는 너를 알았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너를 구별해 세계 만민을 위한 예언자로 선정해 놓았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 전부터 (뱃속에 내가 생긴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은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시나요? 이 사실을 믿고 안 믿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 삶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예레미야 29:11)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선한만큼 나의 삶은 선한 결말을 가져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 속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나를 위해 ‘ramsom (대속물)’로 주신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나를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9)”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삶이 아무 의미 없이 길거리에 나뒹구는 삶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고, 그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습니다. 주저 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삶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