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018 | 사순절 18

우리의 궁극적인 확신 Our Ultimate Assurance

요한복음 20:19-29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이 부활했음을 보여 증명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결국 일주일 뒤에 다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느냐 하면, 19절에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Sunday evening the disciples were meeting behind locked door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ish leaders”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다 같이 모여 유대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일요일 저녁’이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주일 저녁 (that Sunday evening)’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근거 없은 루머였는지를 확인하려고 피나는 확인 작업을 했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 저자들의 부활에 대한 진지한 확인 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성 (the historicity of Jesus’ resurrection)’이 확인된 것입니다. 루머를 진실로 믿고 그 위에 우리 믿음을 세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또 확인되지 않은 몇 몇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그 위에 우리 믿음을 세울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은 진실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역사성’은 반드시 증명 되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베드로는 직접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사건 현장에 아무 증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매의 눈을 가진 형사입니다. 그 형사가 다시 한번 현장을 찾아 갑니다. 뭐라도 단서가 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현장을 살펴 봅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머리 핀 하나를 발견합니다. 결국 그것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그런 이야기 많잖아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아간 베드로는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발견했을까요? 예.발견했습니다. 요한복음 20:6-7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개역개정) 개역성경에는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이렇게 번역되었던 구절입니다. NASB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beheld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and the face-cloth, which had been on Hi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rolled-up’이라는 말은 ‘rolled and folded in the shape of a tube (튜브 모양으로 둥글게 말아 개켜져 있음)’ ‘Objects have been folded or wrapped into a cylindrical shape (그 물건이 원통형 모양으로 둥글게 감겨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중요한 말씀인지 아십니까? 여자들의 말을 듣고 빈 무덤을 찾아간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무덤에 먼저 도착한 요한은 몸을 굽혀 고운 베가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지만,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고운 베가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천은 고운 베와 겹쳐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동그랗게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모양 그대로 놓여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몸만 빠져 나가고, 머리를 감쌌던 천은 동그란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요한에게 “여기 좀 와서 보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 때서야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와 이 광경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 때 베드로와 자신이 함께 목격했던 광경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반대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몸은 그대로 있고, 영만 부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 안에서 목격했던 그 광경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몸은 무덤 안에 있어야 했으니까요.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고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한다는 이야기들이 돌고 있었습니다. 마태가 이 소문의 진상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 28:11-15).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과연 머리를 쌌던 천이 그렇게 동그랗게 둥근 모양을 유지한 채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도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해변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같이 식사를 했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1:12) 같이 식사를 했던 제자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분은 예수님이 분명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영지주의자들 (Gnostics)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지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이 아니라 실제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 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고,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부활의 역사성’을 생생하게 그들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들의 결과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반드시 가야만 하며, 거기서 장로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고난을 받아 결국엔 죽임을 당하지만 삼 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태복음 16:21) “인자가 많은 고통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고, 삼 일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8:31) 그런데, ‘부활의 역사성’을 찾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말씀들이 사실로 판명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역사성’을 확인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가진 분’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할 때 예수님은 ‘성경대로 (according to the Scriptures, 고린도전서 15:3-4)’ 부활하셨다고 설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Scriptures는 지금의 구약성경을 말합니다만, 예수님께서 평소에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에 대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는 교제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1-4)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다. (우리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2절)

(2)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2절).

(3)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3절).

여러분, 우리는 지금 초대교회 사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있습니다. 그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 시켰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매우 중요한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사도들이 확인한 ‘부활의 역사성’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이 증명됨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신뢰성이 생겼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몇 몇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믿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은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데?”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들이 오늘 우리가 그 위에 서서 살아가야 할 확실하고 견고한 base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약속들이 진실하고, 그 약속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사도들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치열하다’는 말을 쓰는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지우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영적인 부활로 축소 시킴으로써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려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믿음을 계승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보세요. 사도신경에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고백이 나오잖아요? “나는 전능하시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며......” 이 고백을 하기까지 사도들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도들의 믿음을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


3/5/2018 | 사순절17

부활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God's Plan For The Resurrection

고린도전서 15:12-23

오늘 말씀 제목은 ‘부활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사실을 믿지만, 넌 크리스천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겠지요?

며칠 전에 재미 있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인도의 간디가 기독교에 대해서 자기 견해를 밝힌 편지가 발견이 되었는데, 그 편지가 5만 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간디가 1926년에 미국에 사는 밀턴 뉴베리 프란츠 (Milton Newberry Frantz)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인데, 프란츠라는 사람이 먼저 간디에게 자신이 쓴 책을 읽어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이번에 경매에 나온 편지는 간디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라고 합니다. 간디는 이 편지를 타자기로 쳐서 마지막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전한 교리를 따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보이지 않는 (신의) 실체의 최고 현현(顯現)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겠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말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예수가 인류의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 통합은 공통된 교리를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교리를 서로 존중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I have not been able to move beyond the belief that Jesus was one of the great teachers of mankind. Religious unity is to be had not by a mechanical subscription to a common creed but by all re-specting the creed of each)."

글쎄요. 간디라고 하면 워낙 인류 역사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니까 함부로 평가하기를 조심스럽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들이기 어렵다는 그의 견해를 읽으면서, 보통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간디가 한 때 기독교에 대하여 상당히 관심이 었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크리스천이 되지 못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주변의 크리스천들의 삶을 보면서 실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전도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선교하는 시대는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 크리스천 각자 각자가 충실한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전도방식입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장으로 유명합니다. 부활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설교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서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설교를 마친 다음 사람들의 반응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내용에 관해 나중에 더 듣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but others said, ‘We want to hear more about this later’).” (사도행전 17:32) ‘contempt’라는 말이 경멸, 멸시라는 뜻이 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들어 보겠다는 말도 사실은 별 큰 관심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부활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말이 안 된다는 말은 우리 상식 이나, 지식,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4에 쓴 내용도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으로 말한다면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사람들 중에 살아 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되었습니다 (The Good News is about his Son. In his earthly life he was born into King David's family line, and he was shown to be the Son of God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is Jesus Christ our Lord).”

예수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 믿지 않으려고 했겠습니까? 누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최초로 전했던 여자들의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하지만 그 이야기가 제자들에게는 넌센스같이 들렸기 때문에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fact였습니다. 부활이 fact였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큰 크레딧을 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마다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just as the Scriptures said)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

둘째로, 제가 보기에 이것이 가장 큰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삶을 변화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는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설교를 했는데, 설교의 중심 메시지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바울 같은 사람은 완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전에 바울은 유대교의 독실한 신자였잖아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교 신자로서 바울은 성공이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특권을 다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요.

그리고, 한가지 더 부활의 증거를 댄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만 부활하신 에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에게 나타나시고, 그후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그후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6) 즉 예수님의 부활은 몇 몇 사람들의 주관적인 경험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오늘 말씀 20-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 온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핵심 적인 것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첫 열 매’라는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영 어로는 ‘firstfruits’라고 합니다. 좀 이상하지요? 항상 복수 형태로 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맨 처음 익은 (열린) 열매를 ‘firstfruits’라고 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모든 ‘처 음 것들’는 귀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자식도 장자는 맨 처음 난 것이니까 하나님께 드립니다. 곡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씀이 저에게는 하나도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런 말씀에서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나의 삶에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인간의 본분 (本分)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 예수님 이전에 아무도 부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첫 열매’는 귀한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받으셨습니다. 자 그런데, 22-23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서 ‘부활의 열매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저와 여러분을 ‘부활의 열매’로 삼으시려고,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신 것입니다.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받으시고, 그 뒤를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부활의 열매들’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 보십시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 께서 맨 앞에 서 계십니다.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두어 드리신 ‘부활의 열매들’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 저와 여러분도 서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시고, 저와 여러분을 '부활의 열매들'로 거두 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활에 대한 계획 속에 오늘 우리가 들어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저와 여러분을 ‘부활의 열매’로 삼으시려고,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신 것입니다.

 


3/4/2018 | 사순절 새벽기도 4

이것들을 구하라! Ask For These!

시편 5:1-12

지금은 ‘사순절 (Lent)’ 기간입니다. 지난 수 십년 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사순절 새벽기도’를 드려 왔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때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우리는 새벽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은혜롭게 잘 보내면 보낼수록 부활절을 맞는 기쁨이 배(倍)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예수님과 닮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 다윗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통해 내 뜻을 이룰 것이다 (사도행전 13:22)”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무엘상 13:14에 “The LORD has sought out a man after his own heart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셨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신 그 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그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고 다윗을 마음에 들어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다윗은 하나님과 소통을 잘 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기도가 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셋을 다 잘했습니다. 그 증거는 다윗이 수많은 시편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가 쓴 시편은 시이면서 동시에 기도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5편이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지휘자를 따라 플루트에 맞춰 부른 노래’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수금 (하프) 연주의 달인(達人)이었습니다. 얼마나 연주를 잘 했으면 그의 수금 연주를 듣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던 사울의 마음이 진정되었겠습니까? ‘music therapy (음악치료)’라는 말이 생긴 지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이미 다윗 시대에 ‘음악치료’의 개념이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가 기원전 1,000년이면 우리나라의 고조선 때입니다. 그 때 이미 ‘음악 치료’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평생이 쓴 시편 중 성경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73편입니다.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시편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수금 연주의 달인인 다윗은 자기가 쓴 시를 가지고 수금을 연주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 시를 가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시편 5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 했던 아침 기도입니다. 시에 아침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뒤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썼을 때, 그의 주변에 적들이 많았습니다 (8, 9절). 그 적들 앞에서 다윗은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도와 달라고 외치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 드립니다. 여호와여, 아침마다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니, 매일 아침 나의 소원들을 주께 아뢰고, 주님의 응답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2-3절)

여러분, 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이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자기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의심하는 사람을 ‘두 마음을 품는 사람 (a double-minded pers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야고보서 1:6-8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자는 바다 물결같이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 하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는 두 마음을 품어 자기가 하는 일에 방향을 못 잡고 헤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는 한 가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 중에 오늘 말씀과 비슷한 시편이 시편 34편입니다. 다윗이 적들에게 쫓기고 쫓기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다윗은,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블레셋 군 진영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숨어 지냅니다. 그러다가 그만 정체가 탄로납니다. 시편 34편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어느 날, 그동안 숨어 지내던 다윗의 정체가 탄로 나 다윗은 블레셋 왕에게 끌려갑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유명한 다윗입니다. 우리 진영에 숨어 들어 온 것을 알고 끌고 왔습니다. 우리 군대를 정탐하러 온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정말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 갑자기 그 앞에서 침을 흘리고 발작을 하면서 미친 사람 흉내를 냅니다. 블레셋 왕이 그 모습을 보고 “이런 미친 놈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이다. 당장 내쫓아라!” 그래서 다윗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다윗은 그 때 그 순간을 시로 남겼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찾아 도움을 청했더니 내게 대답하시고, 내가 두려워하던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은 빛이 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불쌍한 사람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시편 34:4-6) 하나님은 그의 생명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블레셋 왕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서 다윗을 살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그런 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 드립니다. 여호와여, 아침마다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니, 매일 아침 나의 소원들을 주께 아뢰고, 주님의 응답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시편 5:2-3절) 여러분, 다윗의 이 기도를 들으면서 또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왕 (my King)’이라고 불렀다면, 자기는 왕의 통치를 받고, 왕의 명령을 듣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이것들을 위해 기도하라!” 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정말 ‘겨자씨만한 지식 (Knowledge of God as small as a mustard seed)’도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42:5 말씀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d only heard about you before, but now I have seen you with my own eyes.” 전에는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를 귀로 들은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눈으로 보고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expansion) 되었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고난을 당한 욥은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고,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는 아프고 힘들었지만 이것이 약이 되어서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전보다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욥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고난을 통하여 확장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struggle하는 중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한 차원 높은 지식으로 upgrade 되었습니다. 지금 힘들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sturuggle하세요. 하나님과 씨름하세요. 여러분이 겪는 고난과 역경, 고통과 아픔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에게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둘째로,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임재 속에 들어가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강하게 세워지는 비결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주님의 집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엎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내 주위에 적들이 많습니다. 주의 의로운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의 길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7-8절) “Because of your unfailing love, I can enter your house; I will worship at your Temple with deepest awe. Lead me in the right path, O LORD, or my enemies will conquer me. Make your way plain for me to follow.” (New Living Translation)

와! 굉장한 말씀입니다. 사방에 적들이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그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들어갔다는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자기 앞에 하나님의 성전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 때 그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주어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unfailing love (끊임 없는 사랑)’를 고백합니다. ‘In Touch Ministries’로 유명한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His peace and presence are required if we are to live victoriously, regardless of circumstances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관계 없이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평안과 임재하심이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강해지는 방법은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손에 쥔 사람,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강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이 강하게 되는 길은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3)”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in Him who strengthens me)’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강한 사람이 되는 비결은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임재하심 속에 서는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강한 사람이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하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도 평범한 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것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를 잊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잖아요? “고침을 받은 사람은 모두 열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7)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감사 드렸습니다. 열 명 중에 한 사람이면 감사를 아는 사람이 10%는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00명 중에 한 사람이나 될까요? 그만큼 감사를 모르는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누구나 즐겁게 해 주소서. 언제까지나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해 주소서. 주님, 그들을 지켜 보호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11절) 여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즐거워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까?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해 주신 일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각해 보면, 온통 모두가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벽을 깨뜨리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일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갈 때마다 이 감사의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경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00:4)”라고 했습니다. 감사야 말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리고 감사야 말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는 만큼 우리의 기도 또한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숙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임재 속에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강하게 세워지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 감사로 드리는 찬양, 감사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십니다.


3/3/2018 | 사순절 16

성숙의 과정 The Refining Process

마태복음 26:40-46

어저께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히브리서 4:1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cannot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One who has been tempted in all things as [we are, yet] with-out sin.).”

이 말씀에 나오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sympathy (동정심)’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와 똑 같은 몸을 입으시고 3년 동안 세상에 사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피곤함을 아십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새벽 기도에 나왔다가도 깊은 잠이 듭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셨는지, 예수님을 혼자 남겨 놓고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즘엔 청년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걱정, 진로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걱정에 ‘sympathy’ 가지고 계십니다. 혼자 걱정 하지 마세요. 혼자 모든 걱정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세요. 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이 찬송가 좋아하시지요? 곡조도 좋지만, 가사가 참 대단해요. 1절에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모두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절 가사입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완벽한 가사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sympathy’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쓴 잔’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느냐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 ‘쓴 잔’이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잖아요? 왜 다른 방법을 물으셨을까요? 하나님과 단절되고 버림 받는 것이 무섭고 싫어서 그랬습니다. 예수님처럼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해 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잖아요? 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희생 없이, 십자가 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짆아요? 비록 예수님의 겟세마에 동산의 기도와 그 깊이는 다를지 모르지만, 피하고 싶은 마음만은 똑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시간, 예수님은 매우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가 보여 주는 것은 비록 몸과 마음은 피곤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아주 견고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 잘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마가복음 14:36)’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마가만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바 (Abba)’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그 말 속에 아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이 들어 있습니다. 아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도는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가할 때는 기도하지만 바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건강할 때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피곤하고 힘들고 아플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실패한 사람들이, 뭔가 큰 일이 나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을 때, 자기 계획대로 잘 나갈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평소에 많이 해서 저축해 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사시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이상한 궤변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기도는 저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급할 때 기도하지 않고 은행에서 돈 찾아 쓰듯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몸 컨디션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다 기분이 다운 될 때나, 기도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얻는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반드시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과 희생이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오듯이 그렇게 오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굉장한 아픔을 주고, 걱정과 근심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과 고뇌를 제자들에게 모두 털어 놓았습니다.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가복음 14:34)

하지만,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 모든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로마서 5: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우리는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압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이 과정이 무슨 과정이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숙한 자녀로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보세요. ‘Suffering (고난)→ Perseverance (인내) → Character (인격) → Hope (희망)’ 여기 ‘희망’은 ‘Final Salvation (마지막 구원)’에 대한 희망입니다.

‘Suffering’이 없이는 이 과정이 시작이 되지 않습니다. ‘Suffering’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고난’은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이는 인내도 없고, 인내가 없이는 인격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고난’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의 삶 속에 찾아 오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3/2/2018 | 사순절 15

겟세마네의 교훈 Lessons in Gethsemane

고린도후서 5:1-9

예루살렘을 여행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 보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이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입니다. 올리브산 자체가 절대 높은 산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720m 정도이고, 올리브산은 이보다 조금 높은 해발 820m 정도입니다.

올리브산에는 말 그대로 올리브 나무가 많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아주 단단하고 강인한 나무입니다. 올리브 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열매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고, 열매를 짜서 나오는 기름은 건강에 좋은 최고 품질의 기름입니다. 그리고, 나무는 아주 단단해서 목공이나 조각품을 만듭니다. 올리브 나무는 똑 바로 자라지 않고 줄기가 뒤틀리면서 자랍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어느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올리브 나무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나무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겟세마네 동산 어딘가에 은밀한 예수님의 기도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늘 그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큰 올리브 나무 근처 어디였는지 모르지요. 제자들은 그 장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그 저녁에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될 수만 있다면 이 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고 (He wen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다 (누가복음 22:39)”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과 조금 떨어져 혼자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북돋워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날 밤이었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예수님의 괴로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He was in such agony of spirit.”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는 매우 근심하며 괴로워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4:33-34)’”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그토록 괴로워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 힘들어 하셨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괴로워하셨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것 (to be separated from God)"이었습니다. 죽음을 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있던 시간은 이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날 수로는 삼 일이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속에 있었던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도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 논리로 무장된 사람들이나,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예수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힘들고 아파하셨던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 때가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속으로 들어 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감당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구원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상하지 않았던 문제가 생기고,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이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도 고난은 예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의 뜻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아픔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당장에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지금 손 놓고 계시는 것 아니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위해서 가장 완벽한 계획을 수행하고 계셔. 나는 지금 그 과정 속에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와 십자가를 지시는 모든 과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힘들어 하시더니, 급기야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pro-ject는 착착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for we live by believing and not by seeing).”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간략하게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울 같은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사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사도로 살아서 받은 눈에 보이는 보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 말씀이 “우리가 거하는 땅에 있는 천막집이 무너진다”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천막집이니까 제대로 된 집이 아닙니다. 그것마저 무너집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면 사도의 삶이 그렇게 초라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천막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삶도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놀라운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나님은 그의 신실한 종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집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이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and as a guarantee he has given us his Holy Spirit).” (5절) 예,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보증 (guarantee)’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공식 (formula)과 같은 것입니다. 공식은 답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식을 모르거나, 잘못된 공식을 사용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올바른 공식에 올바로 대입하면 정답이 나옵니다. ‘겟세마네 동산→ 순종→ 하나님의 뜻의 성취’ 이 공식에 대입을 하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 고난과 시련을 대입하고, 다시 거기에 순종을 대입하시면 ‘띵똥땡’ 하고 정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은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을 이깁니다. 예수님도 그런 믿음으로 사셨고, 사도 바울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