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2018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On The Road to Emmaus

누가복음 24:13-27

두 사람이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11km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지 성경 어디를 읽어 보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글로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꽤 이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로바’의 아내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도망 가고, 제자 ‘요한’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고, 용감한 몇 명의 여자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모든 일들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요한복음 19:25).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누구라고 하면 알 정도로 꽤 이름이 있었던 ‘글로바’가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면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매우 침통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같은 방향으로 가던 한 낯선 사람이 두 사람에게 얘기를 겁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이 낯선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보면 “But God kept them from recognizing him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 보지 못하도록 하셨다., 누가복음 24:16)”이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 같은데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글쎄요. 무슨 일입니까?” 두 사람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모두들 그 분이 메시아라고 기대 했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오늘로 삼 일째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던 여자들이 하는 말이 무덤이 비어 있었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그 분의 제자들 중에 몇 사람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대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참 답답하네요. 두 분은 왜 예언자들이 쓴 글을 믿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간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모세가 쓴 글에서부터 예언자들이 쓴 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묵으시지요.” 이렇게 해서 그 날 저녁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묵게 되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열려 이 분이 예수님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는가?” (32절) 두 사람은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 열 한 제자들과 그 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제자들에게 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오늘의 이 말씀을 화폭에 담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으로 이 말씀에서 느낀 감동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카라바조 (Caravaggio)가 그린 ‘Supper at Emmaus (1602-1603)가 유명하고, 네델란드의 마티아스 스톰 (Matthias Stom)이 그린 ‘Supper at Emmaus with Candlelighted (1633-1639)’도 유명합니다. 또 빛의 화가 렘브란트 (Rembrandt)가 그린 ‘A Supper at Emmaus (1648)’도 많이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들은 모두 두 제자가 식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했던 그 순간을 포착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엠마오로 가는 예수님과 두 제자를 그린 로버트 준트 (Robert Zund)의 ‘The Road to Emmaus (1877)’입니다. 준트는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 늦은 오후 길을 예수님과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을 같이 걷고 있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저는 두 가지,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제 2차 대전 말기에, 중국 오지의 시골 길을 의심에 잠긴 한 사진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 주님! 주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여 주신다면 저는 믿겠습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에 들려 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런데, 그곳은 눈이 녹으면서 질퍽질퍽한 들판 길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에 따라 말에서 내려 그 질퍽질퍽한 들판 길을 장면을 찍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해 보았더니, 뜻밖에도 온유와 사랑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 사진이 한참 유행했습니다.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리빙 룸에 걸어 놓은 집들이 많았습니다. 그 액자에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God is the head of this house, the unseen guest at every meal and the silent listener at every conversation).”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가지고 끼어드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이 끊어지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쉽게 만나게 됩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왜 쉽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까?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Lord, You told me when I decided to follow You, You would walk and talk with me all the way. But I'm aware that during the most troublesome times of my life there is only one set of footprints. I just don't understand why, when I need You most, You leave me." He whispered, "My precious child, I love you and will never leave you, never, ever, during your trials and testings. When you saw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en that I carried you."- In The Story of The Footprint on The Sand (‘모래 위의 발자국’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Athens)에서 설교했을 때, 제일 먼저 꺼냈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He is not far from any one of us.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사도행전 17:27-28)” 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교리적으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어제 새벽 기도에서 요한일서 5장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심으로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We know that God's children do not make a practice of sinning, for God's Son holds them securely, and the evil one cannot touch them).” (요한일서 5: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요한복음 14:18)”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둘째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회심 (conversion)’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았는가?” (누가복음 24:32) 바로 이 마음이 뜨거웠던 그 시간이 이 두 사람에게 ‘회심’이 일어났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전에서 ‘회심 (conversion)’에 대한 정의를 찾아 봤더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태도와 감정과 관점(觀點)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회심’에 대한 정의를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에게서 배운 말씀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모두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때 그들이 품었던 열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들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들의 식은 가슴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길에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가슴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는 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런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히 냉소적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 측에서 보면 워낙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한동안 사울을 인정하지 않고 경계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회심’은 사람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요즘에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놓고, 뉴스에 ‘CVID’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Complete (완전한), Verifiable (검증할 수 있는), Irreversible (되돌릴 수 없는) Dismantlement (해체)’라는 뜻입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말이 ‘Irreversible’이란 말이지요. 한자로,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고 합니다. ‘회심’이란 그런 것입니다. ‘불가역적’입니다. 한번 ‘회심’이 일어났으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회심’을 했다고 하면서 예전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회심’이 온전한 ‘회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북한에게 ‘CVID’를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북한의 ‘회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회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한번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드렸으면 ‘불가역적’이 되어야 합니다. 한번 내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기로 결심했으면, 이것은 내 인생에 ‘불가역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그랬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만일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6)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갈라디아서 2:2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나는 내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7-8) 그의 ‘회심’은 일시적인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Complete (완전한), Verifiable (검증할 수 있는), Irreversible (되돌릴 수 없는) Dismantlement (해체)’였습니다. 우리에게 ‘회심’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은 지금의 우리의 삶에 대한 이런 ‘해체’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주변에서 '회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회심'한 사람들은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회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존 웨슬리 (John Wesley)의 회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우리는 생의 의미와 생의 가치를 상실한 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태국에서 ‘목청(木淸)’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목청’은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나무는 높이가 30-40m 정도 되는 나무도 있고, 무려 50m나 되는 높은 나무도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것입니다. 태국 현지인 한 사람이 50m나 되는 높은 나무에서 꿀을 따고 내려 오면서 너무 높아 무서워서 밑을 내려 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청’을 채취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피디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청’은 위험한 일이어서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위험한 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지금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우리 가슴에 열정을 불어 넣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살 동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회심’함으로써 의미 있고, 가치 있고, 가슴 떨리도록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메시지입니까? 정말 여러분이 지금까지 결정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삶에 ‘회심’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태국에서 ‘목청(木淸)’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목청’은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나무는 높이가 30-40m 정도 되는 나무도 있고, 무려 50m나 되는 높은 나무도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것입니다. 태국 현지인 한 사람이 50m나 되는 높은 나무에서 꿀을 따고 내려 오면서 너무 높아 무서워서 밑을 내려 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청’을 채취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피디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청’은 위험한 일이어서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위험한 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지금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우리 가슴에 열정을 불어 넣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살 동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회심’함으로써 의미 있고, 가치 있고, 가슴 떨리도록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메시지입니까? 정말 여러분이 지금까지 결정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회심’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5/6/2018 | 어버이주일/졸업예배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라! You Are The Light And The Salt of The World!

마태복음 5:13-16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 졸업하는 교우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두 번째는 부모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보스턴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타주에서 왔거나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입니다. 여러분들을 타 주에, 혹은 외국에 보내 놓고 부모님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맘 고생 많으셨겠습니까? 또 여러분들이 건강하게 학업을 마치도록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겠습니까?

‘어머님의 은혜’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 가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감리교 목사님들 입니다. 윤춘병 목사님 (1918-2010)은 교회 역사학자로 존경 받는 목사님 이고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박재훈 목사님 (1922-현재)은 캐나다에 계시는 목사님 인데,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작곡 활동을 하시고 계시고요. 동요 작곡자로 많이 알려진 목사님 입니다.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이렇게 시작되는 ‘구슬비”, “송이 송이 눈꽃 송이 하얀 꽃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꽃송이” 이렇게 시작되는 ‘눈꽃송이’, 이런 동요를 지으신 목사님 입니다. ‘어머님 은혜’는 이런 가사로 시작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키우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1절)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2절)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큰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 드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3절)”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도 넓습니다. 저도 어머님 살아 계실 때는 저를 위해서 어머님께서 늘 기도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고마운 줄 몰랐습니다. 엄마니까, 엄마는 당연히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까 새삼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뭔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한 시간이나 넘게 하셨다고 합니다. 비록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씀이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님의 소망은 한가지입니다. 고생 안 하고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모님들의 소망을 더 거룩한 소망으로 승화 시켜야 합니다. 올바른 인생의 목적을 설정하고, 나만 잘 되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미리 우리의 삶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근대 철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년-1626년)은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거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조형미가 있고, 균형미가 있는 거미줄을 치는지 참 신기합니다. 거미줄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날아가던 새나 곤충들이 날아가다가 거미줄에 걸립니다. 그러면 거미는 숨어 있다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새나 곤충을 꼼짝 못하게 거미줄로 옭아매서 잡아 먹습니다. 거미와 같은 사람이란, 거미처럼 비상한 지능과 재주가 있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남을 유인하고, 음모를 꾸미고, 해치고, 빼앗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함을 상징하는 곤충입니다. 성경에도 "게으른 사람은 개미가 하는 것을 잘 보고 지혜를 얻어라. 개미는 지도자도, 장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에는 먹이를 준비하고, 추수 때에는 그 음식을 모은다 (잠언 6:6-8)"는 말씀이 있습니다. 개미가 열심히 일하여 양식을 모읍니다. 마찬가지로, 개미와 같은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여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만 다른 사람의 필요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이컨은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일하여 꿀을 모아서 자기만 먹고 살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게 꿀을 줍니다.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에게도 유익을 줘서 열매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인간에게도 꿀을 선물합니다. 꿀벌과 같은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자기만 복되게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거미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미 같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도 잘 되고, 모든 사람이 잘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6절) New Living Translation 영어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착한 행동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비춰서 볼 수 있도록 하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크리스천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good deeds (착한 행동)’를 다른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도,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사는 목적도 따지고 보면 ‘good deeds’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good deeds’라는 것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타고 난 인간성이 변화되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먼저 변화되기 위해서요. 그래서 우리가 ‘good deeds’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요.

바로 이 점이 우리 기독교가 ‘인본주의 (humanism)’와 다른 점입니다. ‘humanism’은 인간의 능력과인간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상 체계를 말합니다. 자연히 ‘인본주의’는 인간의 가능성에 큰 가치를 부여 하게 되고, 인간의 자율성과 자아 실현, 자유 의지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성이 악한 인간은 본성이 변화 되기 전에는 ‘good deeds’를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신본주의 (theocentricism)’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인간의 본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 되지 않으면 ‘good deeds’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이 변화 되어야 비로소 ‘good deeds’를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good deeds’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good deeds’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세상에 들어가서 행해야 하는 ‘good deeds’는 마치 소금과 같은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13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의 역할은 음식을 신선하게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입니다. 식품을 소금에 절여 두면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닷물의 염도가 몇 %인지 아십니까? 평균 3.5%인데,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생리 식염수 (Saline solution)의 염도는 몇 %인지 아십니까? 0.9%입니다. 사람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 염도에 맞춘 것입니다. 이 정도의 염도만 유지되면 실온에 둬도 썩지 않습니다.

또한,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적당한 소금이 들어간 음식은 맛이 있습니다. 음식은 간을 잘 맞춰야 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음식은 싱거우면 맛이 없습니다. 물론 음식이 짜면 먹기도 어렵고,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6년 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 진귀한 사진이 실렸는데요. 아마존 정글에서 나비 (Dryas iulia butterflies)가 거북이 눈에 앉아 있는 사진입니다. 처음엔 그냥 이 사진이 신기하게만 보였는데, 알고 봤더니, 나비가 거북이 눈에 앉아서 거북이 눈물을 빨아 먹는 것입니다. 나비들이 꽃에서는 소금을 섭취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북이 눈물에 들어 있는 소금기를 빨아 먹는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지혜입니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신선하게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생의 의미와 기쁨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소금의 질 (quality)을 잘 유지해야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quality’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크리스천의 ‘quality’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소금이 되어 버립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4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때문인지 모르지만, 선조(先祖)들은 교회를 지을 때 언덕 위에다 지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어디서든지 잘 볼 수 있도록 그런 자리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5절) 됫박 안에 등불을 넣어 두면 주변을 밝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등불도 조만간 꺼지고 맙니다. 그러나, 등불을 등잔 위에 올려 놓으면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바다에 방향을 잡아 주는 등대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이 환하면 등불을 밝혀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올해는 어느 학교에 누가 와서 졸업식 연설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년 전에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현재)가 하버드에 와서 졸업식 연설을 했습니다. 꽤 긴 연설이었는데요.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 간의 증오, 계급 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가 있지요. 이것들은 여러분들이 무찔러야 할 악당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악당들이 많다고요. 그래서 이 시대는 그들을 무찌를 영웅들의 출현을 기다린다고요. 그의 연설 속에 위트가 있고, 번쩍이는 시대에 대한 통찰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졸업생 여러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세상에 꼭 필요한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되십시오. 어디를 가든지,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십시오. 하지만, ‘거미’같은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개미’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꿀벌’같은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자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한가지 소원입니다.

스필버그의 연설처럼,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행운아들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든지, 세상은 거짓, 위선, 불법, 이기주의, 차별의식 등으로 오염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하면, 이 세상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힘든 시대에 태어났다고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할 일 많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목적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소금 같은 사람으로 살고, 빛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유지해야 하고, 빛은 계속해서 주변을 밝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크리스천의 정체성 (identity)을 유지해야 합니다. 소금이 ‘quality’를 유지하고 짠 맛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금이 녹아야 합니다. 녹아서 자신이 없어져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자신이 녹아 없어지지 않으면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자신이 타서 없어지지 않으면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제발 어렵게 학위를 받았으니, 이 학위가 나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발판이 되리라는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이 소금으로, 빛으로 섬겨야 할 자리를 찾아 낮은 곳으로 내려 가십시오. 마음 속에 성공에 대한 유혹이 들어 올 때는 주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이 교회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이곳 케임브리지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학창 시절을 보냈던 이 교회, 여기서 믿음의 친구들을 만났고, 여기서 여러분의 꿈과 장래의 희망을 가지고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누었던 여러분의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성경을 펴 놓고, 간사님들과 팀원들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었던 이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갔던 아름다운 예배와 찬양이 있는 이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이 교회는 늘 그 때마다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4/29/20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하나님의 개입하심 God’s Intervention

사도행전 12:1-12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 (마태복음 28:20)”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사도행전 12장 본문 말씀은 특이한 말씀입니다. ‘특이하다’고 말씀 드리는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觀點, point of view)을 조금만 바꾸면 이 말씀은 ‘특이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마태복음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마태복음 16:23)!”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은 모든 일을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일이란 모든 일을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5:15-16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도 과거에는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판단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 뒤에 나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This means that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이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의 삶은 지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A New Person (새로운 사람)’이란 다른 것 아닙니다. 관점이 바뀐 사람입니다. 관점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 (paradigm)’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중요하게 보였던 것이 이제는 시시하게 보입니다. 과거에 시시하게 보였던 것이 이제는 소중하게 보입니다. 과거에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이제는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관점의 변화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나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을 알았던 것들이 이제는 ‘배설물 (garbage or dung)’처럼 보입니다.” (빌립보서 3:8)

‘관점’은 그것을 쓰고 세상을 보는 안경과 같습니다. 검은색 선글래스를 쓰면 세상이 어둡게 보입니다. 파란색 선그래스를 쓰면 세상이 파랗게 보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갈 때 작은 카메라를 하나 샀습니다. 그 전에 북한에 갔을 때는 정말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인데, 안내인이 찍으면 안 된다는 사진들을 몰래 많이 찍었습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나오는데 세관에서 카메라에 무슨 사진이 들어 있는지 일일이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마음이 조렸는지 모릅니다. 예상치 않았던 일이어서 당장에 무슨 방법이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사진을 모두 지워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사진이 아까워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울까 말까 지울까 말까 하다가 어느 새 제 순서가 되었습니다. 세관원이 사진기 내놓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진기를 주니까 한참 이리 저리 만져 보더니 이거 어떻게 보는 것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보는 것이라고 한 장을 보여줬더니, 몇 장이나 찍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이 사진 한 장 밖에 없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카메라를 돌려 주더라고요.

성지 순례 갔을 때는 예전 것보다 작은 카메라를 샀던 것 같습니다. 가기 전에 누구에게 들었거든요. 성지순례 가면 실내나 동굴에서 찍을 것들이 많은데, 대부분 사진을 못 찍게 하니까 몰래 찍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플래쉬가 터지지 않도록 해 놓고, 몰래 찍으려고 카메라 viewfinder를 봤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아, 카메라가 고장 났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성지 순례에서 카메라가 고장 나면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카메라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니라 제가 동굴 안에서 까만 선글래스를 끼고 있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점’은 그 사람이 쓰고 있는 안경과 같습니다.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 사람 (A New Person)’은 자기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관점을 바꾼 사람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때는 헤롯 아그립바 왕이 유대 왕으로 통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극심했던 때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헤롯 대왕의 손자 (a grandson of Herod the Great) 뻘 되는 사람인데, 이미 요한의 동생 야고보를 잡아 칼로 죽였습니다. 이제 베드로까지 잡아서 감옥에 넣고, 군인 네 명씩 네 패에게 맡아 삼엄하게 지키게 했습니다. 곧 유월절이 지나면 베드로를 끌어 내어 사람들 앞에서 재판할 작정이었습니다.

베드로까지 감옥에 잡아 넣은 이 사람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12 제자 중 대표격인 사람 아닙니까? 크리스천들 사이에 베드로의 영향력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피해서 지중해 연안 도시들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가 든든하게 서 있었던 것인 베드로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워낙 크리스천들 사이에 베드로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베드로를 잘못 처리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베드로까지 체포해서 감옥에 감금한 것입니다. 이제 유월절 명절이 지나고 예루살렘에 순례객들이 돌아가면 베드로를 재판에 넘길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보나마나 뻔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대로 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 밖에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워낙 삼엄하게 감옥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마가의 다락방인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 그들이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도들이 잡혀가 매를 맞고 협박을 받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그 기도가 나와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인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빌려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화를 내며, 어찌하여 백성이 헛된 계획을 세우는가?세상의 왕들이 일어나며 통치자들이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를 대항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주님, 이제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굽어 살피소서. 또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주님의 손을 펼쳐 병을 낫게 해 주시며,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적을 행하소서.” (사도행전 4:24-30) 제자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 속에 개입해 들어오신다는 성경적인 표현방식입니다.

베드로가 잡혀 갔을 때도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이와 같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석방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런 박해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지금 박해자들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를 감옥에 잡아 넣었습니다. 곧 재판에 넘겨 사형을 시키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자기들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승리에 도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 개입 하시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해 들어 오시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상황 속에 개입해 들어 오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크리스천은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이 절박한 상황 속에 개입해 들어 오시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의 관점을 ‘human point of view’에서 ‘God’s point of view’로 바꾸고 오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그 때는 베드로를 감옥에서 끌어 내려고 하던 전 날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인들 사이에 사슬에 묶인 채 잠들어 있었고, 감옥 밖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고, 환한 빛이 감옥을 비추었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우며 “어서 일어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손목에 매여 있던 사슬이 풀렸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허리끈을 매고, 신을 신어라’라고 말하여, 베드로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천사는 다시,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를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도 천사가 하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사와 베드로가 첫 번째 경비병과 두 번째 경비병을 지나 성으로 통하는 철문에 이르자, 철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그들이 문을 나와 거리를 한 구역 걸을 때에, 갑자기 천사는 베드로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2:7-10)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 베드로가 혼자 중얼거립니다. “이제야 나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인 것을 알겠다.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에서, 그리고 유대인들의 모든 계략에서 구하셨다.” (11절)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으로 갔더니, 그 시각에 교회는 깨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이상한가요?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면, 이보다 더한 일도 일어납니다.

요 며칠 사이에 우리의 조국 한반도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한국에서는 ‘김정은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로 난리도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과 똑 같습니다. 생방송을 보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미사일을 발사해서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 했고, 내심 미국도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자기들을 향해서 미사일을 겨누고 있는데, 한 발이라도 미국 본토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핵미사일이 떨어진다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지만, 그런 사적인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기적 같은 현실을 눈으로 보면서 이것들이 모두 우리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진실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정말 눈으로 보고 있는 일들이 사실이었으면, 더 이상 다른 기만술이 없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기만술이었다면, 지금쯤 북한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겠지요? 모든 것이 자기들의 계획대로 되었다고요.

제발 그런 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이 한반도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 하나님께 개입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엄청난 민족의 운명을 몇 사람들의 정치인들의 손에 맡겨 놓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혹시라도 어떤 숨은 계략이 있다면, 우리는 속아 넘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나쁜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풀려난 베드로가 혼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에서, 그리고 유대인들의 모든 계략에서 구하셨구나!” (11절) 또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나라들이 남몰래 나쁜 일을 꾸미며, 민족들이 왜 그토록 헛된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시편 2:1) 하늘에 계신 분이 이 모든 인간들의 계략을 아시고, 모든 계략들을 헛된 일로 만들어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최소한 미국과 북한의 회담이 이루어질 때까지 만이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미국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자기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 한 민족을 이용하고 도탄에 빠지게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계략을 무효로 만드시도록 기도합시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라는 오명을 씻어 버리고, 이제는 당당하게 남과 북이 함께 세계 무대에서 주역을 담당하도록 위해서 기도합시다. 우리 민족은 세계사에 진 빚이 있습니다. 이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사에 개입하셔서 이 빚을 갚고 세계사에 공헌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도록 위해서 기도합시다.


4/22/2018 | 부활절 넷째 주일

평안의 인사 Greetings of Peace

요한복음 20:19-23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Fourth Sunday of Easter’입니다. 지금도 부활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누신 인사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심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며칠 전 새벽기도에서 읽은 말씀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에게 평안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글씨로 내가 친히 보내는 편지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18)

제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만, 터키 성지 순례를 갔다가 거기서 거대한 ‘카타콤 (Catacomb)’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원래 ‘카타콤’은 ‘cata (가운데)’라는 말과 ‘tumbas (무덤들)’이라는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공동묘지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 박해를 피해 피난 가 있던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공동묘지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터키에 ‘데린구유 (Derinkuyu)’라는 세계 최대의 ‘카타콤’이 있습니다. 지하 55m, 모두 8층으로 되어 있고요. 마구간, 포도주 만드는 틀, 식당, 교실이 있고, 무기고와 묘지도 있습니다. 관광객에게 공개 되는 것은 전체 규모의 10% 정도라고 합니다. 3층과 4층에 교회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격려차 방문했던 베드로가 서서 설교를 했을 지 모릅니다.” ‘데린구유’ 카타콤이 1세기에 만들어졌다면 가능한 얘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대로 300년 경에 로마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베드로가 방문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1세기에 베드로가 ‘데린구유’에 피신해 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방문했다면,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편지를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고향을 떠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전서 1:1-2) 베드로가 이렇게 인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May God give you more and more grace and peace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화를 넘치게 주시기를 빕니다).” 조국을 떠나서,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모를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평화’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말씀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10:5-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하여라. 만일 평화의 사람이 있으면, 네 평화가 그에게 머무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 말씀을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또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라는 영향력 있는 개신교 신학자가 있습니다. 틸리히는 인간에게 세 가지의 불안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 (the anxiety of death)이고, .둘째는, 공허함과 의미를 상실하는 데서 오는 불안 (the anxiety of meaninglessness)이고, 셋째는 정죄함에서 오는 불안 (the anxiety of condemnation)이라고 했습니다.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불안 (basic and universal anxiety)이라고 했습니다. 의미를 상실한 데서 오는 불안은 좀 어려운 말입니다만, 이 불안은 ‘non-being (비존재)’로부터 오는 위협 (threat)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실존론적인 불안 (existential anxiety)’이라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죄함에서 오는 불안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음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틸리히는 이 세 가지 불안 가운데, 우리가 가장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불안은 의미를 상실함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Tillich의 말을 들어 보면 누구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저녁 7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 옵니다. 씻고 식사하고 나면 9시가 넘습니다. 그러면, 또 자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야 합니다. 왜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일을 해야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우리에게 아무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부모를 떠나고 집을 떠나서 이곳 보스턴까지 와서 맘 고생하면서 공부합니까? 나중에 학위를 받아서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대답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Tillich의 말은 이렇게 의미를 상실함에서 오는 공허함과 불안이 제일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서워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먼저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렇게 평화를 빌어 주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깐 보류해 두고, 요한복음 14:27에 있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am leaving you with a gift- 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peace of mind and heart’입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 평화,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mind’는 우리의 ‘머리 (head)’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intellect)과 판단을 총괄하는 곳이 ‘mind’ ‘head’입니다. ‘heart’는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heart는 우리의 감정과 느낌, intelligence (지성)를 총괄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지, mind와 heart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모든 과정 속에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평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말로 ‘평화’ ‘평강’ 혹은 ‘평안’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샬롬 (Shalom)’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가 봤더니,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헤어질 때도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스쳐 지나가면서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샬롬’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사해 봤더니, complete¬ness, wholeness, health, peace, welfare, safety, soundness, tranquility, prosperity, perfectness, fullness, rest, harmony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좋은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지금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정상 회담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상회담의 의제(議題) 속에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때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공격하지 않고, 도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북한과 정상회담이 잘 되어서 ‘평화협정’을 맺는다고 해도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어서 어선을 나포하거나, 무장 공비를 보내서 주요 시설을 파괴하거나 하면 그 ‘평화협정’은 한낱 종이조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temporary 평화입니다. permanent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평화’는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I am leaving you with a gift”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 (the peace I give)’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My peace I give you”라고 했습니다. 여기 ‘peace’라고 번역된 말들은 모두 히브리어 ‘shalom’을 번역한 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샬롬’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서를 읽어 보세요.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샬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 위기 상황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다 다급한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어떤 때에도 예수님은 ‘샬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샬롬’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요한복음 16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33절)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주는 ‘평화’는 우리 마음에 생기는 근심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샬롬’을 받은 사람은 근심을 이기고, 두려움을 넉넉하게 이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샬롬’으로 고난을 이기고, 환난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이 주시는 ‘샬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세 개의 성경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골로새서 3:1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로 여러분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And let the peace that comes from Christ rule in your hearts. For as members of one body you are called to live in peace. And always be thankful).”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평화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평화롭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소유함으로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평화가 네 속에 흘러 들어오도록, 그렇게 해서 그 평화가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말미암아 불안해 하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함께 부름을 받은 지체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또 ‘평안의 끈 (the bond of peace)’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 4:3). 교회의 지체들은 모두 서로 ‘평안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빌립보서 4:6-7에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저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될 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음으로 잃어버리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채우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은혜를 놓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은 빌립보서 4:9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Keep putting into practice all you learned and received from me-everything you heard from me and saw me doing. Then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대로, 깨달은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이 말씀대로 실천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말은 내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 보십시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불안의 시대 (the age of anxiety)’라고 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1918-1990)이 1949년에 작곡한 Symphony No. 2 제목이 ‘The Age of Anxiety’입니다. Bernstein이 보스턴 북쪽에 있는 Lawrence에서 태어났더라고요. 보스턴에서 화장품 가게를 하던 부모가 여름에 로렌스로 휴가를 갔다가 갑자기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가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음악 강연자,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번스타인은 오랫동안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그것들을 이기게 하는 ‘평화’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평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평화’의 메신저들이 될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십시오. “이 집에,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4/15/2018 | 부활절 셋째 주일

요한복음 10:10 John 10:10

요한복음 10:7-15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Third Sunday of Easter’입니다. 보통은 교회력에서 이런 경우 ‘of’대신에 ‘after’를 씁니다. 그런데, 부활절만큼은 ‘after’를 쓰지 않고 ‘of’를 씁니다. ‘of’라는 전치사가 ‘~에 속해 있다’ 혹은 ‘연관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 하잖아요? 지금은 부활절 지난 후 세 번째 맞는 주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부활절에 속해 있고, 부활절과 연관되어 있는 주일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한번의 행사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력을 표시하는 방법에서도 부활절의 의미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교회력을 만드신 분들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풍성한 생명 (the abundant life)’에 대한 말씀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만,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이 주어진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1, 15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없을 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0절) 나는 정말 세상 사람들이 왜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고 말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쯤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 말을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자기 생활에 만족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불만족스럽지만 “사는 게 다 이렇지”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는 ‘충만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 (thirst)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대화(對話)의 주제가 바로 ‘충만한 생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우물이 될 것이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자가 뭐라고 응답합니까? “선생님, 저에게 그런 물을 주셔서 제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을 뿐더러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4:15) 이렇게 대답하잖아요? 이 여자의 내면에 ‘충만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목마름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있고,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풍성한 생명’이란 어떤 생명을 말할까요?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NIV) 우리 말 성경의 ‘풍성한’이란 말이 ‘to the full’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I have come (so) that they may have it to the full’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생명을 충분히, 충만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라는 뜻입니다. ‘충만한 (to the full or abundant)’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페리숀 (περισσών)’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exceedingly, very highly, beyond measure, more, superfluous’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넘쳐서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넘치는 생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즘 새벽기도에서 골로새서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지난 목요일 새벽에 골로새서 2:9-10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 (deity)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느니라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and you have been given fullness in Christ, who is the head over every power and authority).” 전에 골로새서를 많이 읽었지만, 그 날 아침에 이 말씀이 전혀 새로운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있다는 말씀은 알았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주어진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 즉 ‘하나님의 신성 (deity)’이 하나도 빠짐 없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The fullness of God)’ 속에 ‘풍성한 생명’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생활 속에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귀하게 여기세요. 기분나는 대로, 감정에 따라 치우치는 믿음생활 하지 마세요. 진실한 마음으로 믿음생활 하세요. 우리의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금이나 은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산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주일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귀하여 여기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풍성한 생명’은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힘쓰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감춰진 ‘풍성한 생명’을 발견합니다.

둘째로,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발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은 삶의 의미와 삶의 목적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늘 피곤하고, 지쳐 있는 이유는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의 목사님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입니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식사도 하고, 소식도 주고 받으면서 교제를 합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목회의 고달픔을 호소하셨습니다. 주일이 다가 오면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그리고, 멀리서 교회 건물이 보이면 가슴이 내려 앉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서 자기도 동감(同感)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이 다가 오면 저도 가슴이 뜁니다. 교회 건물이 멀리서 보이면 저도 가슴이 뜁니다. 그러나, 제가 가슴이 뛰는 이유는 가슴이 내려 앉기 때문이 아니라, 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하는 것이 좋고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는 이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다가 오면 저의 가슴이 뜁니다. 저에게는 목회(牧會)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저에게는 목회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을 때 우리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풍성한 생명’은 분명히 삶의 의미와 그리고 삶의 이유, 삶의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고, 행복한 일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7-8)” 이렇게 자기의 삶을 고백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지치지 않고,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의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의 삶의 의미가 있었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문제는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목적을 발견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 일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와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숨겨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단순히 “so that we may have life” 라고 말하지 않고, “so that we may have life to the full”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를 살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풍성한 삶’의 비결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비밀을 발견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셋째로, ‘풍성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a relationship with God)’ 속에서 발견됩니다. ‘풍성한 생명’은 물질적인 넉넉함이나 조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끔 성경에 ‘동행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표현으로 하면 ‘to walk with God’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에 대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이런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풍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누가복음 12:15) 주님의 말씀입니다. “Life is not measured by how much you own.” 이 말씀 끝에 들려 오는 울림이 있습니다. “but life is measured by a relationship with God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 볼까요?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나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 성경에 참 놀라운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이 말씀도 대단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런 선언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물질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든지, 넉넉하든지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자유함을 선포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이 선언과 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좌우하는 것도 경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을 좌우하는 것도 경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이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좀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북한의 김정은이 국제 무대로 나오기를 희망하는 이유도 결국 경제적인 논리에 굴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북한이 그렇게 핵무기를 소유하려고 했던 것도 결국은 국제 무대로 나오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경제적인 문제도 극복하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풍성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잖아요? ‘풍성한 생명’은 죽지 못해서 살아 있는 피곤하고 지친 생명이 아니라, ‘life to the full’이라고요. 삶의 목적이 주어지고, 삶의 의미와 이유가 분명한 삶이라고요. ‘풍성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모든 문제를 이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이깁니다. 어떤 삶의 고난도 이깁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7-9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 (the gate for the sheep)’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과 양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밖으로 인도한다. 목자가 자기 양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후, 양들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의 뒤를 따른다.” (3-4절)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두가지 채널 외에 다른 채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지나고, 주난 주간 지나고, 부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풍성한 생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요한복음 10:10) 그래서 오늘 설교 말씀 제목이 ‘요한복음 10:10’입니다. 사방에서 불어 오는 싱그러운 봄바람과 이 바람을 맞고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생명들이 살아나듯이,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가 분명한 삶을 찾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모든 관계는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더 성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이 이 봄철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