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7/22/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3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X To Believe God’s Care For His Children
베드로전서 5:7-11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로서 베드로전서 강해 설교를 마칩니다. 저 자신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고난의 삶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모습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에게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대하고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만, 제가 기대했던 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걱정과 근심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걱정과 근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에게도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어떤 사람은 자녀들의 문제로, 어떤 사람들은 부부 간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로, 어떤 사람은 생의 의욕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서, 어떤 사람은 학업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직장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하고 있는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아서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는 걱정이고 근심인데, 성경은 걱정과 근심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마태복음 6:30) 예수님은 염려와 근심이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들에 핀 들꽃이나 들풀들, 하늘에 날아 다니는 새들은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눈에 하찮아 보이는 존재들이지만,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들보다 훨씬 더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얼마나 동의하시나요?
다시,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웬만한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염려가 없겠습니까? 이 사람들에게 근심이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언제 붙잡혀 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6절)”라고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돌보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불안해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우리는 베드로가 그 편지 속에서 말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 동일한 믿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으니까 그 때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성경 속에 나오는 하나님과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똑같으십니다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 히브리서 13:8).”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가 믿었던 하나님은 삶의 매순간마다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순히 방향만 알려 주는 오늘날의 내비게이션과 달랐습니다. 낮에 나타났던 구름기둥은 광야의 뜨거운 태양빛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보호했고, 밤에 나타났던 불기둥은 자기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나요?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과 같이 너는 로마에서도 나를 나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23:11)”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 때까지 바울을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루터가 믿었던 하나님은 루터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맡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루터는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밤에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있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이 자랄 때까지는 부모가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감동적인 구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감동적인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편 33: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has chosen as His own inheritance., NKJV).” 다윗이 쓴 시편 144:15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아예 하나님을 자기의 소유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았으면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없습니다.
토마스 브룩스 (Thomas Brooks, 1608-1680)라는 청교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시편 33:12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소망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참된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참된 행복의 기증자이시고, 모든 참된 행복의 지지자이시며, 그것의 중심이 되신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소유한 사람, 그리고 그분을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말씀은 곧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으니까 문제이지, 이 믿음만 가지고 산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에 기므라 간조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웅장한 폭포를 보면서 감격하여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어느 미국인이 깔보는 태도로 “당신 나라에도 이런 폭포가 있소?” 하고 으스대면서 물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그러면 당신은 이 폭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그야 절반은 캐나다 것이고, 절반은 미국 것이 아니겠소?”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당신 틀렸소. 이 폭포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이 폭포 주인의 아들이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당신 크리스천이오?” 하고 묻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은 자기는 목사라고 하면서 신분을 밝혔습니다. 이 미국인은 자기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이 미국인이 숙소의 전화 번화를 가지고 갔는데, 저녁에 그 미국인이 나가는 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냐?” 고 묻더니, 이번 주일에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요청하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주일날 그 교회를 찾아가는데, 길거리에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 와서 설교를 합니다!” 이런 포스터들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날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예배당을 꽉 채웠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방식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고 근심할 때 똑 같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 중에도 염려와 근심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 우리는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으면 누가 그의 자녀들을 돌보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마태복음 6:32)”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7-9)
재미있는 것은 배고픈 마귀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마귀가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되겠습니까? 마귀의 ‘스킴 (scheme)’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염려와 근심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염려와 근심으로 꽉 찬 사람들은 마귀가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관계만 분명하게 확인한다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사정을 아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라 (9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tand firm against him, and be strong in your faith (그를 대항하여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게 되십시오).” 도대체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33)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열심히 구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걱정거리가 들어옵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고난을 이해하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든 고난은 잠시 동안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10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he will restore, support, and strengthen you, and he will place you on a firm foundation.” 우리가 ‘잠깐 동안”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금방 회복시켜 주시고, 후원해 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굳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a little while’이란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달이 될 수도 있고, 3년이 될 수도 있고, 5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주실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그 시간은 ‘잠깐’에 지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지만, 우리는 고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의 고난에 힘들어 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고 있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이 고난이 언제나 끝이 날까?” 하면서 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들이 두루마리를 읽는 그 시간에 베드로가 쓴 위로의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들렸을 것입니다. 연약한 마음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희망을 다시 찾았을 것입니다.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염려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심령들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7/15/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2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VIII Three Characteristics of Christian Leadership
베드로전서 5:1-6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중에 ‘크리스천의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When the ten other disciples heard what James and John had asked, they were indignant.” (마태복음 20:24) ‘indignant’라는 단어는 누구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 쓰는 말입니다. 지금 다같이 고생하는데 어떻게 자기 두 아들만 잘 봐 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 시험 봤을 때 생각이 납니다. 그 때는 정말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입학 시험을 치렀는데, 발표가 나기까지 약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그 때는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습니다. 어느 수험생도 다 그렇지만, 그때 저도 발표가 날 때까지 말 한번 크게 못하고 집에서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날마다 머리 속으로 내가 몇 개나 틀렸나 계산을 해 봅니다. 그 때 제 계산으로는 4개 틀린 것으로 나왔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4개가 아니라 6개가 틀린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못합니다. 드디어 발표날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라디오 방송으로 합격자 수험 번호를 방송했습니다. 학교 정문에는 크게 합격자 명단을 써 붙였고요. 발표 시간이 다가오면서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 때 “내가 이러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학교에 가 봐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어머니가 나섭니다. 학교로 가신 어머니는 같은 수험생 어머니들 사이에서 정보를 수집합니다. “야, 이번에 8개 틀린 아이들까지 합격한다니까 걱정하지 마라. 엄마가 꼭 합격해 가지고 갈께.”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합격자 발표보다도 어머니의 전화가 먼저 왔습니다. 추운 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오직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합격자 발표 현장에 가 있습니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머니에게 추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대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을 머리에 인 채 호미 쥐고 온 종일 밭을 매도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고된 일 끝에 찬 밥 한덩이로 부뚜막에 걸터앉아 끼니를 때워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꽁꽁 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그래서 동상이 가실 날이 없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난 괜찮다 배부르다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 더운 밥 맛난 찬 그렇게 자식들 다 먹이고 숭늉으로 허기를 달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가 추위에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고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게 닳아 문드러져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가 허구한 날 주정을 하고 철부지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외할머니 사진을 손에 들고 소리 죽여 우는 엄마를 보고도 아! 그 눈물의 의미를 이 속없는 딸은 몰랐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낡은 액자 속 사진으로만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머니는 이보다 더한 비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2-45)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 다른 사람들 위에 있으려고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것을 명예욕, 혹은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속적인 리더십과 크리스천 리더십이 어떻게 다른 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섬김’이라는 단어가 제일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든지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그렇게 섬기면 섬김을 받는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리더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읽어 보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나오지 않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27 말씀입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쁨으로 돌보며, 기쁨으로 섬기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2절) 이 말씀은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의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서 장로라는 말은 공동체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이 세속사회에서의 리더십과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크리스천 리더십의 핵심이 ‘섬김’이라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사회의 리더십에는 ‘섬김 (service)’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아까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세속사회의 리더십은 ‘통치자’ ‘권력’ ‘지배’ 이런 개념들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지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자기가 상대방보다 지위가 높은 것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마구 대하고, 욕질을 하고,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사회가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어엿한 기업의 오너들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자기가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은인 (Benefactors)’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25).
지금 한국에서는 두 항공사의 오너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항공사는 어느 기업보다도 ‘service’를 강조하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 이미지와는 달리 오너들의 말도 안 되는 횡포가 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두 기업이 사회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반 사회에서도 리더십의 개념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리더십이 권위를 이용해서 명령과 복종을 강요했다면, 지금은 그런 리더십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나온 리더십 개념이 ‘서번트 리더십 (Servant Leadership)’입니다. ‘서번트 리더십’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서번트 리더십’이 과거의 권위적인 리더십보다 훨씬 더 구성원들 간에 소통이 잘되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고, 공동체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의 또 다른 특징은 리더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번트 리더십’이 무엇인지 몸소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고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신 가장 유명한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별 특별한 감정 없이 이 말씀을 읽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시대의 문화와 관습을 완전히 뛰어 넘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은 종이 주인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관습을 깨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요한복음 13:14-17)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십시오.” (3절) 크리스천 리더십은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하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라고 힘으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공동체 안에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Don't lord it over the people assigned to your care, but lead them by your own good example.” (NLT)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만 하시지 않고 몸소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요한복음 13:34-35) “Love each other. Just as I have loved you, you should love each other.” (NLT)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공동체 리더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모범을 보이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베드로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을 것입니다. “맞아,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good example’을 보여주셨지! 난 평생 그 일들을 잊을 수가 없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He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그는 제자들에게 그의 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새벽 기도에서 읽고 있는 마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나병 환자(a man with leprosy)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해져라!’” (마가복음 1:40-41)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 밀어 그를 만지신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범을 옆에서 모두 지켜본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모범을 보면서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에게서는 행동은 따르지 않고 말로만 하시는 그런 리더십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말씀과 행동이 일치되었습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일치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are for the flock that God has entrusted to you. Watch over it willingly, not grudgingly - not for what you will get out of it, but because you are eager to serve God.”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떼를 돌보십시오, 그들을 기쁨으로 돌보십시오. 마지 못해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으로 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무슨 리더십을 가지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회사에서,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위치에서 크리스천 리더십을 발휘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힘을 행사하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섬겨 보십시오. 참 이상합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 사람이 더 높아집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리더십을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서 겸손하게 섬기십시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6절)”라고 했습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D.L. 무디 (1837-1899)가 쓰던 성경 책에 이상한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간혹 말씀 옆에 'T'자가 써 있기도 하고 'p'자가 써 있기도 한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것은'tested'와 'proved의 약자였습니다. 무디는 자기의 경험 속에서 그 말씀대로 실천해 본 말씀 옆에 'T'자를 써 놓았고, 그 결과 "진실하다! 맞다!"라고 인정된 말씀 옆에 'P'자를 써 놓았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성경 책에도 오늘 말씀 옆에 'T'자가 써져야 하고, 'P'자가 써져야 합니다. 정말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지, 여러분의 삶을 실천해 보고,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일반 사회에서도 ‘섬김의 리더십’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응당 예수님의 리더십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기쁨으로 (willingly)’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십시오. ‘억지로 마지 못해서, 내키 않는 마음으로 (grudgingly)’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나 인정받습니다. 어디서나 칭찬받습니다.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지?” 이런 사탄의 음성이 들릴 때는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으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겨 나가십시오.
7/8/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1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VII To Suffer For Being A Christian
베드로전서 4:12-19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es it mean to be a Christian)?”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한스 큉 (Hans Küng, 1928-)이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On Being a Christian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습니다. 1966년에 이 책이 나왔습니다. 7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입니다. 우리 말로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이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한스 큉은 이 책에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사랑과 의(righteousness)’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인간’이란 죄와 이기심과 교만과 자기 의에 빠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 있는 인간을 말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이 있어야 비로서 문제 의식을 가진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 의식 없이 믿음생활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익한 크리스천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소금과 빛과 같은 크리스천들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묻는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Christian’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11:26입니다. “사울을 찾은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이 일 년 동안 머물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가르쳤던 내용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내용을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가르쳤더니, 안디옥 시민들이 이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Christian’이라는 말은 ‘Christ’에 ‘-ian’이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ian’이라는 말은 ‘누구를 따르는 사람들’ ‘제자’ ‘followers (추종자들)’를 말합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들을 ‘보스토니언 (Boston + ian)’이라고 합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들’ ‘보스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일 년을 안디옥에 머물면서 열심히 잘 가르쳤더니,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로구나!” 하면서 ‘Christian’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냄새가 났고, 예수님의 향기가 났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나간다고 하면서 교회 밖에서는 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한스 큉에 말한 것처럼, 사랑과 의(義, righteousness)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야, 저 사람들 비록 자기 조국에 살 수 없어서 이곳에 피난 와서 살고 있지만, 굉장한 사람들이구나! 본받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주변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을 이렇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메시지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14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16절)’ 이런 말씀들이 모두 ‘for being a Christian’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별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 빠지지 않고 나가고, 기회가 주어질 때 봉사 좀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베드로는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조국을 떠나 타민족, 다 문화권에 들어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두 통의 편지입니다. 그 때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핍박뿐만 아니라, 로마로부터 받는 핍박이 거세지고 있는 때였습니다. 서기 64년 7월 13일에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누명을 크리스천들에게 씌운 로마는 크리스천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런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지금 베드로는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말들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13절)’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받는다 (14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는다 (16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 받는 사람들 (19절)’ 이런 말들이 등장합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핍박이 오거나 박해가 오면 겁먹고, 불안해 숨고, 내가 왜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특별한 무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생 시절에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의 신학에 매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때가 그랬습니다. 독재 정권 속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빼앗기고 모두가 힘들어 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 본회퍼의 신학은 저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본회퍼는 히틀러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가 끝내 감옥에서 죽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1945년 8월 15일에 끝이 났습니다. 본회퍼는 전쟁이 끝나기 4개월 전에 순교합니다. 본회퍼가 그렇게 죽었지만 그의 신학과 사상은 지금도 제 머리와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그 때 본회퍼는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다른 사형수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갔는데, 본회퍼는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 때 그가 남긴 말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his is the end. For me the beginning of life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순교자적인, 영웅적인 면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옥중서신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내가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가친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약한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색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좋은 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 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떨며 참지 못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고,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 나는 누구인가?”
본회퍼가 그렇듯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도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에 하루 하루 지쳐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과연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파트너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13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쓴 때로부터 약 2,00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가 발전했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살던 때가 원시 시대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무슨 시대라고 해야 할까요? 과학은 지난 2,000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똑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위에서 본회퍼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o be a Christian does not mean to be religious in a particular way, to make something of oneself (a sinner, a penitent, or a saint) on the basis of some method or other, but to be a man—not a type of man, but the man that Christ creates in us. It is not the religious act that makes the Christian, but participation in the sufferings of God in the secular life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느 특별한 타입의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 골로새서 1:2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겪는 고난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와 중세기의 교회, 현대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면, 교회의 역사는 이 말씀과는 정반대로 흘러왔습니다. 교회는 고난 받는 공동체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교회는 영광을 받고 섬김을 받는 교회로 남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섬김의 공동체가 되기를 거절하고 섬김을 받는 공동체가 되는 순간부터, 교회는 생명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고난 받기를 거부하고 평안과 안전과 부를 누리는 일에 안주(安住)해 왔습니다. 교회는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아직도 그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쉐핑 (Elis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이 남긴 말을 기억합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모두가 그리스도의 정신을 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섬김을 거절하고 성공을 꿈꾸는 이 시대를 울리는 경종 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섬김의 삶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 아닙니까? 섬김의 삶이야 말로 교회 공동체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섬김의 가치를 가르치고, 실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본회퍼가 남긴 말을 들어 보십시오. “Seek God, not happiness- this is the fundamental rule of all meditation. If you seek God alone, you will gain happiness: that is its promise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추구하라. 그대가 하나님만을 추구한다면 행복을 얻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Being a Christian is less about cautiously avoiding sin than about courageously and actively doing God’s will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죄를 주의하고 피한다는 의미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본회퍼의 천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유니온 신학교의 폴 레만 (Paul Lehmann, 1966-1994)이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머물면서 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을 본회퍼에게 했습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본회퍼는 미국으로 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 자기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본회퍼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니온 신학교의 학장인 코핀 (Henry Sloane Coffin, 1877-1954) 박사의 집 정원에 앉아 나 자신과 조국 독일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기회가 있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했다.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우리 민족이 고난을 받고 있는 이 때 나는 독일의 크리스천들과 운명을 함께 해야 했다. 만일 이 때 나의 민족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갖지 못할 것이다.”
고난을 대하는 크리스천의 태도는 특별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일상(日常)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고난 받는 사람들은 “Keep on doing what is right, and trust your lives to the God who created you, for he will never fail you (옳은 일을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19절)
7/1/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0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VI The Christian Way of Life
베드로전서 4:7-11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읽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에 살던 유대인 크리스천들입니다. 제가 터키 성지 순례를 하면서 그들의 예배 장소를 가 보았습니다. 전면은 평범한 동굴로 되어 있는데, 뒤에 산을 끼고 있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뒤에 산을 끼고 있는 이유는 혹시라도 급습을 당할 때 산으로 피신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하루 하루는 불안과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고,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다 (7절)”고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잘한 사람은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은 벌을 주는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지금의 이 상황을 해결하실 분은 다시 오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이 위기의 상황을 모두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경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오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씀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게 무슨 해결책이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말씀으로 들리지는 않습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서 12:17-21) 베드로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말하는 것이 똑 같습니다. 악한 세력에 네가 직접 대항해서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은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2: 20).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나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대해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잘하고 잘못한 일에 대한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십니다. 조금만 부당한 일을 당하면 욱하는 심정으로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앙심을 품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마음을 깨끗이 하고 침착 하십시오. 그리고 정신을 차려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어줍니다. 불평하지 말고 서로 대접하십시오.” (7-9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end of the world is coming soon. Therefore, be earnest and disciplined in your prayers.” Be earnest라는 말은 정직하고 깨끗하라는 말이지요? Be disciplined라는 말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침착 하라는 뜻으로 나와 있습니다. 평소에 마음과 행동이 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경거망동하게 쉽습니다. 쉽게 흥분하기 쉽습니다. 앞 뒤를 가리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고, 마음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훈련이 기도를 통해서 온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비춰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 거울에 나를 비춰보면 나의 현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 마음의 숨은 생각과 감춰진 동기(動機)가 모두 드러납니다. 영어 단어에 ‘assets’라는 단어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말로 ‘자산’이라는 말입니다. 당장에 현금화 할 수 있고, 당장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자산을 ‘assets’라고 합니다. 기도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assets’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자산’입니다.
한번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저께 한국 뉴스를 봤더니, 20대, 30대 청년들이 영정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현실이 각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자리가 없습니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여기서 살아 남기가 힘에 버겁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의 모습을 영정 사진으로 찍어 놓고, “너 그 때 힘들었지? 그런데 후회하지 않을 만큼 그 때 최선을 다 했니?” 생의 마지막에 가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도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영정 사진으로 찍어 놓는 것이 20, 30대 청년들에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일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일 자리 하나 나면 수 십 명, 수 백 명씩 경쟁자가 몰립니다. 이것이 지금의 각박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assets’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정직하고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고, 나의 마음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assets’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큰 인생의 자산입니까? 왜 우리에게 주어진 이 ‘assets’를 포기하는 것입니까? 왜 이 ‘assets’를 활용하지 않습니까?
이제 오늘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또한 각자에게 특별한 다른 선물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착한 종처럼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10절)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각각 자기만의 ‘특별한 (unique)’ 선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상황이 그려집니까?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생활이 다 같지 않습니다. 터키 정부에서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준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은 예멘에서 온 난민들 (refugees) 처리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금 국제 사회는 한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가 난민을 받을 만큼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난민을 받게 되면 계속해서 난민들이 들어오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마당에 설상가상으로 경제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난민들에게는 살 곳을 마련해 줘야 하고 일자리를 줘야 합니다. 이런 많은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이 난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터키의 본도 (Pontus), 갈라디아 (Galatia), 갑바도기아 (Cappadocia), 아시아 (Asia), 비두니아(Bithynia)에 살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터키에서 난민으로 받아들인 그래서 난민의 지위를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돌보아야 하고 서로 덮어줘야 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서로가 먹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한 말을 들어 보세요. “무엇보다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어줍니다. 불평하지 말고 서로 대접하십시오 (Most important of all, continue to show deep love for each other, for love covers a multitude of sins. Cheerfully share your home with those who need a meal or a place to stay).” (8-9절)
은사 사용에 대한 말씀은 이런 상황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은사는 매우 다양합니다. 오늘 말씀에 잘 나와 있지 않지만,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그 말씀이 잘 나와 있습니다. “God has given each of you a gift from his great variety of spiritual gifts. Use them well to serve one another.” (10절) ‘from his great variety of spiritual gifts (하나님의 매우 다양한 영적 은사 중에서)’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성령의 은사가 몇 개나 나오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은 은사가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은사도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몇 개라고 제한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은사는 매우 다양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지만, ‘the gift of helping others (남을 돕는 은사)’가 있습니다. 로마서 12:7에는 ‘섬기는 은사 (gift of serving others)’로 나와 있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섬기는 은사’가 은사 중의 은사입니다. 최고의 은사입니다. 우리 주님도 섬기는 은사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 (talents)’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물론 ‘spiritual gifts’와 ‘talents’가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더 많이 연구가 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재능’은 넌 크리스천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이 재능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열심이 재능을 개발해서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가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소현이라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습니다. 지금은 12살이 되었겠네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극찬했고, 줄리아드에서 정경화와 한 스승 밑에서 라이벌로 있었던 핀커스 주커만 (Pinchas Zukerman, 1948-현재, 이스라엘)이 극찬한 아이입니다. 서울에서 고소현과 협연을 한 주커만은 고소현의 재능을 설명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이한 재능이라고 했습니다. 소현이와 같은 아이는 그냥 놔 둬야 한다고, 그냥 그 아이를 보고 즐거워하면 된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받은 아이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재능을 잘 개발하면 세계적인 연주자가 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재능’과 다릅니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용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은사 사용의 목적은 “Use them well to serve one another”라고 했습니다. 자기 개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은사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내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를 사용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남을 도우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11절)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자기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예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고 합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사의 직무 가운데 하나가 설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 은사를 사용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Speak as though God himself were speaking through you”라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 자신이 너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말씀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목소리를 특별하게 하거나, 거드름을 피거나, 하나님 말씀을 빙자해서 사람들은 manipulate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예전에 어떤 교역자가 하나님 말씀을 빙자해서 “하나님께서 너 하고 결혼하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해서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기 자신은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남을 도와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힘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남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 it with all the strength and energy that God supplies (남을 돕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하십시오).” (11절) 모든 교우들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하지만, 특별히 남을 섬기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각 부서들의 회장을 선출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서로 회장을 하려고 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일입니다. 모두들 공부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회장에 선출되면 시간적으로 손해를 많이 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섬기고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내 힘과 에너지를 딴 곳에 쓰게 되니까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이 아니라 하니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섬기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를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절대로 섬기는 중에 손해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섬김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를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이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1세기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나,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나, 모두 이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6/24/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9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V The Christian Way of Life
베드로전서 4:1-6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다섯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긴 합니다만,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았을 때는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김형석 교수님의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안병욱 (1943-2013)) 교수님의 책과 함께 김형석 (1920-현재) 교수님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한참 인생에 대하여 생각이 많았던 때에 그들이 풀어내는 인생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안병욱 교수님은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숭전대학교, 숭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김형석 교수님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계셨습니다. 지금도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로 계십니다. 지금 연세가 한국 나이로 99세인데, 여전히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백 년을 살아 보니’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김형석 교수님이 어느 회사 신입 사원 교육 시간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대학 시절에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고전을 다섯 권 정도 읽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랬더니,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여러분 중에 인생에 도움이 될 고전을 세 권 정도 읽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회사에서 과장이 될 때까지는 열심히 앞만 보고 일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서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되면 정신적 빈곤을 느끼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의 지도자로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고전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 사람이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한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정신 세계가 빈곤한 사람이 한 회사나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의 경우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뽑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크리스천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해당하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이론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 이원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문제 아닙니까?
베드로전서를 쓴 베드로는, 이미 2,000년 전에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루 하루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 있든지 간에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지금 살기 힘들고 고단한데,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학생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공부하기 바쁜데, 그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나중에 졸업하고 시간이 나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볼께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이 처한 환경을 핑계 대면서 이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반대가 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 일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모스는 기원전 800-75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가 살았던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대단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제적 호황이 나라가 곧 멸망할 사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두 사람이 동행할 수 있겠느냐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다르면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는 방향이 같아야 같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과 같지 않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라고, 나를 도와 달라고, 나를 형통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의 삶을 먼저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이런 말씀 카드가 있습니다. 제목이 ‘You Say.......God Says........’입니다. 중요한 것만 몇 개 말씀 드린다면, “너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것은 아무 가치 없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똑똑하지 않아’ 하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지혜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난 할 수 없어’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두려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외로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겠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성공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내 생각이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과연 이런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 하고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경우에는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힘들지만, 내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둘째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때는 과감하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맞아 떨어질 때, 뭔가 가슴 떨리는 전율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이가 들면 안경을 써도 보고 싶은 물체에 초점이 잘 맞지 않습니다. 어느 안경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 안경은 특수하게 제작되어 있어서, 안경을 쓴 상태에서 눈과 렌즈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TV에서 그 안경을 광고하는데, 렌즈의 거리를 조절하니까 초점이 맞아서 희미하게 보이던 물체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창조하실 때,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갈 때,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초점이 맞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뜻과 초점이 맞는 삶을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을 때 사물이 윤곽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초점이 맞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 (George Müller, 1805-1898, 독일)는 시편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 (시편 68:5)’라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씀을 보는 순간, 뮐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내가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뮐러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순간이야 말로, 뮐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뮐러의 생각이 초점이 맞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뮐러가 살았던 시대는 고아들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고아들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아들은 버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 우리교회가 세워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1863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제가 미국교회 평신도 대표였던 워렌 밀리 (Warren Milly)라는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이 교회를 세운 목적은 하버드 스퀘어와 센트럴 스퀘어에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다른 교회와는 구조가 다릅니다. 본당에 기둥이 하나도 없고 공간이 넓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가 건축한 교회는 아니지만, 이런 역사를 알고 예배당을 사용하면 더 많은 은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Magazine Street는 ‘Church Street’라고 할 만큼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들이 많았던 이유는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교회마다 교인들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성인들의 회심에 관심이 있었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때 이 교회가 주일학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나의 삶에서 예배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한 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설교 말씀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이 예배의 본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기 쉽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 주님이 ‘영적인 예배 (Spiritual Worship)’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영적인 예배’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1-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 - 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① / ①Or This is your spiritual worship; or This is your reasonable service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내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배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로 끝나면 안 되고, 내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이 예배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나가서 우리 교회 출신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나이가 비교적 어려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저도 얼굴은 익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중에 참석자들 이름을 쓴 리스트를 보고 알았습니다. 이름이 김혜성이었습니다. 지금 아리랑 TV에서 기자 겸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 전 케임브리지 교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전 거기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세상에 나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귀하고, 이보다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