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2018 | 성탄절 메시지 1

인카네이션 Incarnation

요한복음 1:9-14

설교 시작 전에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는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일까요?” 보기를 드립니다. (1) 요한복음 (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3)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4)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한번 정답을 맞춰 보십시오.

성서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후에 기록될수록 문장도 세련되고, 등장하는 용어들도 다양합니다. 그 때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고, 문화와 사상적으로는 그리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가 사용했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기를 원했던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도 이미 기원전 300년경에 그리스어로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70인역 (Septuagint)’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벌써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의 2세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00년에 걸쳐 번역 작업을 완성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72명의 권위있는 유대학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지파에서 6명씩 대표 학자들을 파견했기 때문에 모두 72명의 학자들이 번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과감하게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빼고, 이렇게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4)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로고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로고스’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로고스’ 사상을 잠시 빌려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지만, 정작 요한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14절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Word became human① and made his home among us.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②. An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Father's one and only Son. / ①Greek became flesh ②Or grace and truth 직역하면,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로스’ 사상에는 이런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번역합니다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거 재미있는데?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그들은 생소하게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이 말씀을 읽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이 로고스가 인간이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incarnare’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in’은 ‘into’를 말하고, 뒤에 나오는 ‘caro’는 ‘육체 (flesh)’를 가리킵니다. ‘육체로 태어나셨다 (to make flesh)’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집을 지으신 (made his home among us)’ 것입니다. 이 말씀이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The Word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with us (말씀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재미있는 번역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그가 번역한 The Message에서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 and moved into the neighborhood (말씀이 몸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곱개의 사인 (sings)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가나 (Cana)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1) 이 말씀에 나오는 ‘그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영광을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 (sign)’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인을 보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사셨다 (And Christ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on earth among us, Living Bible)”는 ‘인카네이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예수님의 ‘인카네이션’이 주는 교훈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겸손 (humility)입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도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대우, 더 좋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전 아닙니다. 전 성공적인 삶을 원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에서도 어떻게 하면 정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성경적인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아, 예,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굽실거리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South Africa)가 말한 것처럼 바닥에 쏟아진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제일 낮은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 고이는 것처럼, 겸손이란 제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Just as water ever seeks and fills the lowest place, so the moment God finds you abased and empty, His glory and power flow in.” 성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내 속에 영광을 채우고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공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인데요. 헨리 나우엔 (Henri Nouwen, 1932-1996, Netherlands)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바드 신학대학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정말 잘 나가는 교수였습니다. 아무 일 없이 보장된 삶을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그 질문은 “지금의 내 삶이 내가 살아야 하는 최선의 삶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L’Arche Daybreak)’라는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는 하바드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바드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던 것들을 장애인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죽은 후에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여기서 경험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이용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By giving words to these intimate experiences I can make my life available to others.” ‘Nouwen Society’에 속한 사람들은 나우엔이 보여준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신들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downward mobility (하향 이동성)’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성)’의 삶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사회적인 지위나 조건을 더 높은 레벨로 끌어 올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downward mobility’의 삶은 어떻게 하면 나의 현재의 사회적인 레벨을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갈까 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 놓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그랬습니다. ‘upward mobility’의 삶을 내려 놓고,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선택했더니, 그가 죽고 나서 ‘Henri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의 삶을 흠모하고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우엔이 ‘L’Arche Daybreak’에서 경험했고 발견했던 것들을 책으로 펴 냈는데, 그가 쓴 책마다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모두 39권의 책을 썼는데요. 모두 800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책이 28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인카네이션’의 삶은 겸손과 내려 놓음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성공을 지향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어느 삶이 더 가치 있는지, 어느 삶을 내가 선택할 것인지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번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후회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1-12절) 이 말씀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qualification)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o believe and to accept Him (그를 믿고 받아들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무심코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말들의 의미를 밝혀서 책으로 내는 일입니다. 이 일은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생활이 되고, 믿음생활에 변화가 없고, 믿음생활에 능력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全人的)인 결단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감정적인, 의지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holistic commitment’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전인적인 commitment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을 선포했고, 또 그런 설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는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망가질 것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교회가 출현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holistic commitment’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 곧 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같은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카네이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식)’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downward mobility (하향이동식)’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크리스천 (Christia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2/9/2018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마가복음 1:1-11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전 주에는 소망의 촛불을 켰는데, 오늘은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生)에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진정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 (shalom)’입니다. 유대인들은 서로 인사할 때 ‘샬롬’하고 인사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당신에게 임하기를!” 이런 뜻입니다.
 
2,000년이 지나서 오늘 우리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소망합니다.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에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인류의 지식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우리의 삶은 편리해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소외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늘고 있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적대관계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 나라가 겪는 문제가 단순히 한 나라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전체 인류의 운명과 직결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류는 평화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약 2,500 년 전에 한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이사야 9:6-7)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His government and its peace will never end.” /①Or Wonderful, Counselor 우리는 그 예언자가 예언했던 ‘한 아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이 아기에게 온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1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본격적으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그 일을 미리 준비했던 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낙타 털로 만든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가죽 혁대를 맸고, 메뚜기와 들꿀 (石淸, wild honey)을 먹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의식주(衣食住)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상대나 해 주겠습니까? 오늘 센트랄 스퀘어에 이런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에게 호감이 가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아니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으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와서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의 말을 사람들이 들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은 차림새도 이상하지만,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마태복음 3:2)”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요한에 대하여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3:1에는 “보아라. 내가 네 앞에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고, 이사야 40:3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펴라’” 이런 말씀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뉴잉글랜드 노스필드 (Northfield) 출신으로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노스필드는 보스턴에서 서쪽으로 죽 가면 스프링필드에 속한 타운입니다. 무디는 노스필드 출신으로,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잠시 섬기다가 시카고로 이사를 합니다. 그가 설교자로, 부흥사로 활약한 곳은 시카고입니다. 시카고에 유명한 Moody Bible Institute가 있고, 무디가 섬기던 교회가 있습니다. 이름이 ‘무디교회 (The Moody Church)’인데, 초교파 교회입니다. 무디의 부흥 사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생키 (Ira David Sankey, 1840-1908)라는 훌륭한 찬양 사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디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생키로 하여금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놓도록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어려운 일 당할 때 (543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214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 (353장)’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 (419장)’ ‘양 아흔 아홉 마리는 (297장)등의 찬송가는 모두 생키가 작곡한 찬송가들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에든버러 (Edinburgh)에서 열린 집회 둘째 날, 그 날 무디의 설교 제목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무디는 생키에게 오늘 설교와 어울리는 찬송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생키는 무슨 찬송을 불러야 할 지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주머니 속에 신문에서 오려 둔 시가 한편 있지 않느냐?  이 시를 가지고 찬송을 불러라!” 이 시는 평생 병으로 고생하다가 39살의 나이에 고아원에서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클레페인 (Elizabeth Clephane, 1830-1869)이라는 여자가 시를 써서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마침 생키가 그 신문을 보다가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들어 그 시를 오려서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었습니다. 생키는 그 시가 하나님께서 주신 시라고 생각하고 즉석에서 곡을 붙여 집회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설교를 마친 무디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생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키, 그 찬송 내가 처음 들어 본 찬송인데, 어디서 났소? 이처럼 내가 감동을 받기는 처음이요.” 그 때 생키가 신문에서 오려 둔 쪽지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즉석에서 작곡한 이 찬송가는 그 후에 한번도 고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디와 생키처럼, 예수님과 요한은 그런 관계였습니다. 설교 전에 생키가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놓으면 이어서 무디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전했던 것처럼, 요한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예루살렘 사람들까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이런 사람들까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갈릴리 요단강까지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니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매사추세츠 노스햄턴 (Northhampton)이라는 곳에서 목회했던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 1758) 목사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학자이고 저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미국의 제 1차 영적대각성 운동 (The First Great Awakening, 1735-1755)을 일으킨 주역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에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는 글을 읽고 제 머리 속에 그가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런 열정적인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원고를 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요즘 같았으면 그런 설교자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니까 비록 박력 없는 목소리로 하는 설교였지만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입니다. 깜짝 놀란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의 말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3:13-15)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요한이 먼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향하도록 해 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한 사람으로 자기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 빛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들을 비추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빛이 아니었고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 8)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이 때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마가복음 1:19-21) 그냥 눈 딱 감고 “맞습니다. 내가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 만큼 그 때 요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요한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조사관을 파견할 정도로 주목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공의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끔 저는 성경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왜 여기에 있지?” 로마서 12:3이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Do not overestimate yourself)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는 교훈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은 ‘in accordance with the measure of faith God has given you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믿음의 척도에 따라)’ (NIV) ‘as God has allotted to each a measure of faith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척도대로)’ (NASB) ‘as God has apportioned to each a degree of faith’ (하나님께서 나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정도대로)’ (Amplified Bible) 이런 뜻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 (the measure of faith)’에 따라 자신을 평가했던 두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주인공이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모세가 들어갈 자격이 없다면 누가 그 자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그의 후계자로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여호수아에게 기쁨으로 안수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맡길 사명은 여기까지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한 사람은 마더 테레사입니다. 1989년 어느 날, 테레사가 측근들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을 때 주변에서 만류했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수녀님이 지금 은퇴하시면 우리 자선회는 어려워집니다. 지금까지 수녀님을 보고 후원금을 냈던 사람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 때 테레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보다 더 겸손하고, 더 헌신적이고, 더 순종적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자선회는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God will find another person, more humble, more devoted, more obedient to him, and the society will go on)."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연(助演)이 있어야 주연(主演)이 빛이 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역할이 주연이신 예수님께서 빛이 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를 위해서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생각할 때, 단호하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했고 (7절),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했고 (7절),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요한복음 3:30)”고 말했습니다.
2,000년 전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위해서 길을 마련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빛나게 해 드려야 할 조연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우리 각자 각자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우리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12/2/2018 | 대강절 첫째 주일 메시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Until Our Lord Jesus Christ Comes Again

데살로니카전서 5:14-24

오늘 읽은 데살로니카전서 5장 말씀은 16-18절 말씀 때문에 유명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개역성경) 그런데, “바울이 왜 여기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데살로니카전서가 기록된 것이 서기 50년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카전서는 갈라디아서와 함께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이보다 약 20년 후에 기록이 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카전서가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두려움 대신 그들에게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설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장)’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신랑이 한 밤중에 신부를 데리러 오는데 언제, 몇 시에 올 지 모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한 밤 중에 갑자기 “신랑이 왔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는 기쁨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 처녀들은 신부가 아닙니다. 이 처녀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신부의 들러리들 (bridesmaids)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들러리들의 마음이 이렇게 설레는데, 자기를 데리러 온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은 얼마나 더 설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대강절을 맞이하는 성도의 마음이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신부의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읽은 데살로니카전서 5장은 이런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카전서 5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23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날까지 (until our Lord Jesus Christ comes again)’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카전서 5장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바울의 부탁과 격려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카의 성도들에게 다섯 가지 부탁을 합니다.  
 
첫째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6절). 바울은 성도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Everything is peaceful and secure)’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3절) 성도의 삶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면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에 성도들은 깨어납니다. 고난의 때에 기도하고, 고난의 때에 성경을 읽고,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맞습니까? 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맞이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초짜 신자입니다.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성경이 어떤 책인지, 기도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초짜 신자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은 고난을 맞이하면 하나님을 더 찾습니다. 야보고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야고보서 5:13)
 
성도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평안하고, 안전할 때가 문제입니다. 이 때가 영적으로는 무뎌 있는, 영어로 ‘dull’이라고 하지요? 영적으로 ‘dull’한 때이고,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를 경계합니다. 영어로 ‘alert’라고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지금은 아니겠지 하면서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 밤중에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처럼 오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11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encourage each other and build each other up, just as you are already doing.”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잘 해 온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사로를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서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나만 잘 하면 돼!” 이런 이기적인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나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격려하면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다섯 처녀들을 왜 충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기름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이렇게 서로를 충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신랑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 때서야 자기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그 때 기름을 준비했던 지혜로운 처녀들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안 됩니다. 기름을 나누어 주다가 우리까지 기름이 모자랄 지 모릅니다. 가서 기름을 사 오세요!”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습니다. 그들이 뒤늦게 기름을 사왔지만 문이 닫혀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뭐지? 왜 거절하는 거지? 기름을 좀 나누어 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고 세워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위로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상대방을 세워주려고 해도 세워줄 수가 없는 critical point가 있습니다. 지금은 문이 열려 있지만, 문이 닫혀서 들어갈 수 없는 critical point가 있습니다. 그 때는 도우려고 해도 도울 수 없고, 상대방을 원망해도 어쩔 수 없는 때입니다. 저의 삶에, 여러분의 삶에, 우리의 삶에 이런 critical point가 있습니다. 그 때가 되기 전에, 서로 선한 충고를 하고 충고를 들어야 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서로를 세워주고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습니다.
 
셋째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16-18절). 저는 이 세 가지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in Christ Jesus)’라는 말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in Christ Jesus’라는 말을 ‘who belong to Christ Jesus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슬퍼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고단한 삶을 살아왔든지 간에, 그 힘들었던 시간들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그 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에게는 힘들었던 시간보다는 신랑을 만나는 기쁨이 더 큽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종말론적인 기대와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4:4-5에 같은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Let your forbearing [spirit] be known to all men. The Lord is near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참음과 인내를 알게 하십시오. 주님이 가까이 와 계십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동안 참고 인내했던 힘든 시간이 끝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을 옳게 잘 분별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이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한 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감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2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우리의 믿음 하나만 보시고 우리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의 자리로 옮겨 주셨습니다).”
 
넷째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막지 말고, 예언의 말씀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19-20절). 여기서 ‘막는다’는 말은 ‘억제하다’ ‘불을 끄다’ ‘억누르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들, 말씀하시는 것들을 실천으로,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격려하라고 말씀하시면 격려하고, 성령께서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시면 뒤로 미루거나 지체하지 말고 도우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시키시면 그 마음을 억제하지 말고 감동이 있는 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번 ReNEW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체 집회 말씀이 좋았고, 세미나가 다 좋았다고 합니다. ‘좋았다’는 말은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전체 집회에서 은혜 받았고, 세미나에 들어갔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억누르지 말고 실천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Do not stifle the Holy Spirit”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tifle’이라는 말은 억제하거나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은 대부분 우리의 사명과 헌신과 결단에 대한 일들입니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성경께서는 많은 경우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상식에 벗어나는 일들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95% 이상은 그렇습니다. 5% 정도는 성령께서 상식에 벗어난 파격적인 일을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령께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의 사모님이 기도를 많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 사모님은 갑자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목을 붙들거나, 어깨에 손을 얹거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기분이 언짢지만 그냥 가만이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왜 이러시느냐고 언짢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모님이 “성령께서 장로님에게 가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런 일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목사님은 목회를 접어야 할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막지 말라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또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성령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고 하면서 사람을 찾아가서 몰상식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정말 그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들었는지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자신을 지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3절). 우리의 영과 혼과 몸, 모두를 깨끗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몸과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 것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온 몸, 곧 영 (the spirit)과 혼 (the soul)과 육신 (body)’을 잘 지켜야 합니다. 금욕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 (spirit)’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몸 (body)’는 학대하거나, 막 굴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는 영과 몸을 구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이 말씀에서 ‘몸’은 단순히 ‘body’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전체를,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한 마디 말씀이 우리의 삶 전체를 컨트롤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 지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하고요. 서로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서로를 세워줘야 하고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요.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하고요. 우리 영과 혼과 몸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요.

11/25/2018 |

네 마음을 지키라. Guard Your Heart Above All Else.

잠언 4:23


11/18/2018 | 추수감사절 메시지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For Those Who Forget God

시편 50:22-23

감사절 때마다 생각나는 네 컷 만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간 신문마다 네 컷 만화를 실었습니다. 동아일보에는 ‘고바우 영감’이라는 김성환 화백의 네 컷 만화를 실었고요. 중앙일보에는 ‘왈순 아지매’라는 정운경 화백의 네 컷 만화를 실었습니다. 서울신문에는 ‘코주부’, 경향신문에는 ‘장도리’, 또 여기 저기 신문을 옮겨 다녔던 안의섭 화백의 ‘두꺼비’도 유명한 네 컷 만화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추석이 되어서 과일 가게에 들려 선물로 포장된 감을 사서 들고 부모님을 방문합니다. 부모님께 사 온 선물 꾸러미를 전해 드리고, 밖으로 나와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감사드렸어!”

네 컷 만화가 그랬습니다. 그 당시의 정치나 문화, 사회 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네 컷으로 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받으면 먼저 만화를 봤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부모님께 대한 정성과 효도의 마음이 사라지고 핵가족 중심의 삶으로 옮겨 간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추석이 되면 선물 꾸러미 하나 사 들고 가서 부모님께 드리면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 당시의 시대 상을 그런 식으로 비판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거두어 드린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조상들과 부모님에 대한 감사도 중요하지만, 성경에서 배우는 감사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잠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1:7). 감사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모든 감사의 근본입니다. 근본이라는 말은 시작 (beginning)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써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지식을 시작도 못한 사람이니까 지식이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똑 같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의 삶을 시작하지 못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50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아삽 (Asaph)’이라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을 ‘다윗’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만, 의외로 ‘다윗’이 쓴 시편은 전체 150개 중에 73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윗’ 외에 다른 사람이 쓴 것이 77개나 됩니다. ‘고라의 자손’이 쓴 것이 10개, ‘솔로몬’이 쓴 것이 2개, ‘헤만’이 쓴 것이 1개, ‘에단’이 쓴 것이 1개, 모세가 쓴 것이 1개, 저자를 알 수 없는 것이 50개, 그리고, ‘아삽’이 쓴 것은 12개입니다. 시편 50편, 73편부터 83편까지 모두 12개의 시편을 ‘아삽’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삽’이라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쓴 시편을 읽어보면서 ‘아삽’이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겠다 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삽’이 쓴 시편들을 보면 그 내용이 매우 예리하고 비판적입니다. 이런 것으로 봐서 ‘아삽’이라는 사람은 한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의 특징은 시대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특징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이런 특징을 잃어버리면 지식인의 자격을 상실한다고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배웠으면, 이 시대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이 시대가 흘러가는 대로 따라 사는 사람은 지식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떠맡아 짊어지고, 고민하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특권(特權)입니다.

아삽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유대교의 형식적인 예배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시편 50편은 참된 예배를 갈구했던 ‘아삽’의 고민의 결과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삽’이 고발하고 있는 그 당시의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배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4절, 23절). 여러분, 예배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아삽’은 이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번 ‘아삽’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네가 드리는 제사를 탓하지 않는다. 네가 언제나 내게 태워 바치는 번제를 꾸짖지 않는다. 나는 네 외양간의 소나 네 우리 속에 있는 염소를 바라지 않는다.” (8-9절)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꾸짖지 않고,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배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예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찬양예배 때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시편 100:4-5 말씀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의 성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찬양을 드리면서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분에게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분의 성실하심은 대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이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For the LORD is good and his love endures forever; his faithfulness continues through all generations.” 직역하면, “하나님의 궁전의 대문을 감사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의 궁전 뜰에 찬송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 감으로써 시작됩니다. 시편 100편에는 “그 문으로 들어간다 (Enter his gates)”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집의 문을 통과한 사람은 더 깊숙한 곳으로,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갑니다 (Enter his courts).” 어떤 사람이 그 문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말씀을 잘 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with thanksgiving)’ ‘찬양으로 (with praise)’ 성경에는 오직 ‘감사와 찬양’ 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어떤 조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집의 문을 통과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집의 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목사라고, 장로라고, 집사라고, 교회 임원이라고, 성가대 지휘자라고, 반주자라고, 솔로이스트라고, 오케스트라 단원이라고 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의 대문에서부터 제지(制止)를 받습니다.

‘아삽’은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으냐 준비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예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2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time is coming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that way. For God is Spirit, so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이 말씀에 ‘true worshipers (참된 예배자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시는데, ‘true worshipers’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삽이 말한 참된 예배자는 ‘with thanksgiving’,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아삽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참된 예배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을 내다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삽이 말한 ‘with thanksgiving’은 예수님 버전으로 하면 ‘in spirit and in truth’이다.”

그러면,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아삽’은 왜 그렇게 예배자가 갖춰야 하는 감사의 마음을 그렇게 강조했을까요? 왜냐하면,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예배 의식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찬양이 준비되어 있고, 아무리 탁월한 설교자가 있어도, 예배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예배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배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예배 안내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성가대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설교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추수감사 헌금이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헌금은 예배자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드린 헌금이 아닙니다.

여러분,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헌금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헌금에 대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옆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과부가 ‘두 렙돈 (two lepta)’을 헌금한 것을 보았습니다. 렙돈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제일 단위가 적은 코인입니다. 달러로 하면 센트라고 하기는 그렇고요, 가치로 따지면 한 20센트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1:1-4) 재미 있는 것은 그 때 당시에 성전 입구에 놓여 있던 헌금함의 모양이 나팔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나팔을 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 부자들은 헌금을 하면서 난 이만큼 헌금했다고 하면서 자랑했던 것과 헌금함의 모양이 꼭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부자들의 헌금에는 감사의 마음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넣었던 과부의 헌금에는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우리 마음에서 감사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남편과 아내가 화를 냅니다. 아빠의 마음에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서 야단을 칩니다. 예배 안내자들은 왜 얼굴 표정이 그렇지요? 뭔가 잔뜩 화가 난 얼굴들입니다.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중요한 날인데, 오늘따라 대원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습니다. 지휘자의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가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어제 아침 간사 성경공부 때 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설교자가 무슨 이유로 감사의 마음을 상실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의 전략은 완전히 성공합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 ‘아삽’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22절 말씀 보십시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들아 (You who forget God)!” 예배자들이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자들에게 감사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 몸을 찢을 것이니, 아무도 너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22절) ‘이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그 뒤에 나오는 23절 말씀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23절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드리는 예배가 너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23절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나를 높이고 길을 예비하는 자이니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줄 것이다.” 이 말씀이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who offers a sacrifice of thanksgiving honors Me; And to him who orders [his] way [aright] I shall show the salvation of God.” 시편 50편 말씀의 요절(要節)입니다. ‘a sacrifice of thanksgiving’ ‘감사의 제사’ 혹은 ‘감사의 예배’를 말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준비해 가지고 나를 예배하는 사람이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다른 것 없이, 감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하는 질문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대답에 모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 살았던 ‘아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의 ‘올바른 길 (his way aright)’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인생의 여정을 들여 다 보십시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8:20, 12:7, 8, 13:4, 13:18, 22:9). 1620년에 우리가 사는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Plymouth)에 도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지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Plymouth Plantation)’을 한번 방문해 보십시오. 그 때 그 사람들이 살았던 집은 예전 한국의 어느 시골 가난한 집의 구조와 비슷합니다. 작은 뜰과 작은 부엌, 그리고 작은 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이들이 지은 교회에 이런 현판을 붙였다고 합니다. “Think and Thank (생각하고 감사하라)!” 이제는 이 전통을 이어 우리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