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018 | 사순절 13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고린도후서 7:8-12

오늘 요절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godly sorrow)’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슬픔 (worldly sorrow)’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 슬픔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슬픔은 ‘세상의 슬픔’인데요. 무슨 슬픔일까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슬픔, 억울한 일을 당한 슬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슬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슬픔, 이런 슬픔들이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영적인 죽음 (spiritual death)’을 가져 온다고 했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읽은 한 토막만 떼서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왜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오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교회들은 거의 모두 바울이 세운 교회들입니다. 교회들마다 그 교들의 독특한 역사가 있고,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선교 전략지역으로 여기고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아무 예외적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본 이유는 환상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For I am with you, and no one will attack and harm you, for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사도행전 18:10)”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선교 방식에 있어서도 고린도 선교는 특별했습니다. 바울은 ‘tent-making mission (천막제조 선교)’이라는 독특한 선교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바울의 선교방식을 따르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즉 선교지에서 직업을 가지고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벌어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기서 평생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 I am thankful to them (그들 부부는 나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을 감수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들 부부에게 감사합니다).” (로마서 16:3)

이상이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대충 요약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용 면에 있어서 고린도 선교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8-9 상반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로 인하여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편지로 인해 잠깐이나마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알고는 나 자신도 후회를 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라니요? 그것이 무슨 편지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편지가 고린도전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보낸 또 하나의 편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눈물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편지입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A. D. 56년 경에 디도를 통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한 실랄한 책망과 충고,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그 편지를 보내 놓고 매우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강하게 편지를 쓰지 않았나?” “혹시라도 이 편지가 문제가 되어서 오히려 교회 문제가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내 편지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편지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을 돌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졌던 슬픔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

오늘 우리에게는 잘못한 것을 무조건 덮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냥 덮어 주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용서가 어떤 용서인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무조건 눈 감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덮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내셨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그 죄를 자기의 아들에게 전가 (imputation) 시켰겠습니까?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를 꺼내는 것은, 그 공동체 속한 모두에게 큰 아픔을 줍니다.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꺼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문제가 더 심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초기 단계에서 빨리 수술을 했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을, 수술할 시기를 놓쳐버려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힘든 치료 과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술을 해야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7:10에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to experience leads us away from sin and results in salvation. There’s no regret for that kind of sorrow.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우리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어제 한국 뉴스를 봤더니 또 한 사람이 자신이 연극인이라고 하면서 실명으로 TV 인터뷰에 나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실명으로 나를 밝히지 않으면 상대방이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하기 때문에 여자인 제가 실명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의 문제를 자꾸 말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드러내서 회개해야 할 문제인데, 그냥 덮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가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선자 (hypo¬crites)’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를 덮지 말고 입을 열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그런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자신에 대하여 진진한 반성이 없었지 않습니까? 한번도 입을 열어 진지하게 회개의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11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진지해졌을 뿐만 아니라 성의를 갖게 되었으며, 내가 지적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열심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의 도움을 바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서 죄지은 사람을 처벌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현대어성경)


2/27/2018 | 사순절 12

죄를 용서 받는 회개 A Call To REpentance

누가복음 24:44-4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모세의 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에 관해 쓰여진 모든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44절) 여기 ‘모세의 법’ ‘예언서’ ‘시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성경에 없었으니까, ‘모세의 법’ ‘예언서’ ‘시편’ 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모세의 법’은 흔히 오경이라고 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5권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삼 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회개가 전파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고난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일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ou are witnesses of all these things). 내가 미리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대로 되는지 되지 않는지 지켜 보고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절은 46-47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가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를 전파해야 합니까?
성경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크고 작은 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Me Too’ 운동을 보십시오. 법복을 입은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생각도 못할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예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인들도 똑 같은 일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행한 일들이 그동안 숨겨져 있다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23). 정말 문자 그대로 죽을 죄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어금니 아빠’라는 흉악범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미국 체조팀의 팀 닥터로 있는 래리 나사르 (Larry Nassar, 54세)라는 사람이 수십년 간 156명의 선수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것이 드러나서. 판사는 이 사람에게 175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판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수 없습니다!” 저도 뉴스에게 그 장면을 봤는데, 섬칫 하더라고요.

이런 것은 극단적인 예들이지만, 오늘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3:9).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 죄를 다 치르지 않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길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고 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해야 합니까? 이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길을 전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열린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의 회개를 전파해야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목격한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나의 증인들인 너희가 세상에 나가서 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를 전파하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특징은 쉽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쉬운 복음을 어렵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없습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편지에 나오는 말씀만 해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참 아이로닉한 일입니다. 로마서 말씀 같은 것은 얼마나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까? 설교자들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성경 말씀보다 목사들의 설교가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좋게 말해서 ‘지적인 설교 (intellectual sermon)’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말이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설교를 왜 ‘지적인 설교’라고 칭찬합니까? 또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설교를 지적인 설교라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보세요.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용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12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런데, 꼭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예, 꼭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 (door)’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순서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회개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깜짝 놀란 요한은 이렇게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주님께서 저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It should be done, for we must carry out all that God requires①." So John agreed to baptize him. / ①Or for we must fulfill all righteousness.” (마태복음 3:15)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보내서 먼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의 사역이 끝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회개는 복음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요한은 그 문을 여는 사역을 감당했고, 예수님은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교회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름 으로’ 죄를 용서 받은 회개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로들 여러분의 ‘Personal Savior’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 전에 여러분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말은 나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 사방이 고요한 시간에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여러분은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나에게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죄사함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생활 했던 햇수가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여러분의 ‘Personal Savior’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나는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 들입니다. 아멘.”


2/26/2018 | 사순절 1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The Supreme Moment in History

골로새서 2:11-15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Look!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요한복음 1:29, 36)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쉽게 이해합니다. 명절 때마다 어린 양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들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물로 드릴 양을 고를 때 깨끗하고 순결하고 아무 흠이 없는 어린 양을 골랐습니다. 그 어린 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 자신들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The Lamb of Go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take away (없애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신 ‘어린 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시는 분들은 금방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14에 나오는 ‘여호와이레 (Yahweh-Yireh)’라는 말이지요? ‘여호와이레’란 말의 뜻은 “The Lord will provide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위해서 이삭 대신 하나님께 드릴 어린 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제물로 쓸 어린 양을 준비하셨는데, 그 제물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실 때, 이 때야 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역사는 ‘그 순간 (the moment)’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의 (God’s righteousness)’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가 우리를 지배했던 역사가 끝이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나님과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라는 장매물이 제거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의 의미를 로마서 6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 (as instruments of evil)’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1-13)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미를 ‘new circumcision (새로운 할례)’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new circumcision’에 반대되는 말은 ‘old circumcision (옛날의 할례)’입니다. ‘옛날의 할례’는 유대인들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다!” 이런 표시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런 식으로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던 ‘old circumcision’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you came to Christ, you were "circumcised," but not by a physical procedure. Christ performed a spiritual circumcision- the cutting away of your sinful nature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식의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잘라내시는 영적인 할례를 행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씀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다 보니까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4-15절 말씀을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진 기록 (증서)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기록 (증서) 속에 우리가 율법을 어기고 따르지 않은 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기록 (중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아 깨끗이 없애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권과 능력을 꺾으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심으로, 십자가를 통한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You were dead because of your sins and because your sinful nature was not yet cut away. Then God made you alive with Christ, for he forgave all our sins. He canceled the record of the charges against us and took it away by nailing it to the cross. In this way, he disarmed the spiritual rulers and authorities. He shamed them publicly by his victory over them on the cross.”

약 20년 전에 유건호하는 청년부 학생이 있었습니다. MIT에서 박사 과정에 있던 학생이었는데요. 나름 성경공부의 배경이 탄탄한 학생이었습니다. 한번은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유건호하는 학생이 지금 읽은 골로새서 2:14-15 말씀을 자기가 배운대로, 자기가 이해한대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이 말씀을 그 청년에게 배웠습니다. 그 학생이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라는 장애물 (barrier)이 없어지고, 이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intimate fellowship)’를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내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랬더하면,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2/25/2018 | 사순절 새벽기도 3

주님께 귀한 것 드려 Offer A Precious Gift to The Lord

로마서 11:15-18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넌 크리스천의 삶과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성경에 보면 우리 크리스천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데살로니카전서 4:7),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2)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레위기 19:2, 베드로전서 1:1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로마서 12:2)”라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가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다른 무엇보다 먼저 구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넌 크리스천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5)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삶이 거룩해 집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Sovereign Lord has given me his words of wisdom, so that I know how to comfort the weary. Morning by morning he wakens me and opens my understanding to his will.”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지친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지 지혜의 말씀을 주셨다. 주께서 아침마다 나를 깨우시고 나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개역성경에는 ‘understanding’이 ‘명철(明哲)’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뜻입니다.

조금 신학적인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성서 학자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바빌로니아 포로시대라고 합니다. 그 때 포로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이 가장 절망했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을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절망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이사야’라는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서 학자들은 그 때 하나님께서 사용한 사람은 이사야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제 2 이사야’  혹은 ‘제 3 이사야’라는 말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야는 기원전 약 6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였거든요. 유대 민족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간 것은 이사야가 죽은 지 약 100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침마다 말씀의 지혜를 주셨고, 그는 절망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위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아침마다 (morning by morning)’라는 말씀입니다. 아침 혹은 새벽은 조용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에 좋고, 하나님과 소통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헤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사물을 잘 이해할 수 있는 ‘understanding’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딱 필요한 것들이 바로 ‘wisdom (knowledge) and understanding’ 이 두가지 아닙니까?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때와 장소가 기도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기도 역시 사방이 고요한 새벽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새벽에 하나님 말씀 듣고, 새벽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새벽 시간을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마가복음에 1장에 나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35절)

시편 저자들 (psalmists)이 일제히 ‘아침’ 혹은 ‘새벽’을 주목하는 이유는 아침이 말씀을 묵상하는 데 좋고, 하나님과 기도하기에 좋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오직 주께 기도 드립니다. 아침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시는 줄 압니다.” (시편 88:13) 아침에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말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효과적으로 잘 된다는 뜻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변함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며 즐겁게 노래하겠습니다 (Satisfy us each morning with your unfailing love, so we may sing for joy to the end of our lives).” (시편 90:14) 무슨 말씀인가요? 아침 시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 (unfailing love)’을 느끼고,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30: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합니다. 밤새 울었더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his anger lasts only a moment, but his favor lasts a lifetime! Weeping may last through the night, but joy comes in the morning.”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외에 어디서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밤새 울고, 잠을 못 잤습니다. 하지만 (but)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새벽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새 날과 함께 기쁨을 주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새벽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는 시간입니다. 새벽에 주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새벽에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벽의 유익 (profits)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길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녁 늦게 오랫동안 하는 일보다 이른 아침에 잠깐 하는 일이 더 성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아침이 저녁보다 집중력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침 (새벽)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제 경우를 말한다면, 새벽 기도 시간은 저에게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입니다. 다른 아무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궁금한 말씀들, 난해한 말씀들을 묵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제가 새벽 기도 시간을 통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동안 ‘아침형 인간 (morning person)’이니, ‘저녁형 인간 (evening person)’ 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Google에 들어가서 ‘아침 형 인간’, 혹은 ‘새벽 형 인간’을 찾아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론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고요. 또 어떻게 하면 새벽 형 인간으로 내 삶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지 수많은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밤이 즐거워도 아침과 맞바꾸지 말라.” “저녁에 할 일과 아침에 할 일이 다르다.” “수면시간은 오후 11시부터 오전 5시까지를 원칙으로 하라.”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제 공격은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아침의 1시간은 낮의 3시간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도 아침 형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런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1:15-18 말씀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새벽기도의 유익함을 말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인가?”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땅 속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나무에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뿌리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생각했고, 그 나무의 가지는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가고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뿌리로부터 수액(樹液, sap)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는 ‘접붙임의 원리 (The Principle of grafting)’에 주목했습니다. 바울이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처음 떼 내어 드린 반죽의 일부분이 거룩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고,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로마서 11:16),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뿌리로부터 수액을 공급 받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시나요? 어떤 사람이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얼마를 떼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반죽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조상들이 거룩하니까 그 조상들에게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는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삶의 곳곳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벽 시간은 하루의 첫 시간입니다. 이 첫 시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시간이 모두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 떠서 다른 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자신의 삶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떼어 드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첫 시간, 첫 수확, 첫 아들, 이렇게 ‘첫’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처음 난 것은 ‘firstfruits (첫 열매)’라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의 ‘첫 시간’이 언제 입니까? 잠에서 일어난 새벽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을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시려고, 이 시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unfailing love’를 경험하게 하시려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시간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귀한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그 때가 ‘청년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때’는 여러분의 ‘라이프 스팬 (life span)’에서 가장 귀한 가운데 토막입니다. 이 귀한 때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반죽을 만들어서 제일 먼저 한 부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한 반죽이 되는 것처럼,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사람의 전체 삶이 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솔로몬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한 말입니다. 솔로몬이 왜 ‘청년의 때’를 강조해서 말했을까요? 이 귀한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사람 인생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 되기 때문에 ‘청년의 때’를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십시오. 시간도 하루의 첫 시간을 구별해서 주님께 드리고, 여러분의 삶에서도 가장 귀한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2/24/2018 | 사순절 10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Jesus' Name

요한복음 14:11-14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3-14절)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이 좀 필요한 말씀입니다. 단순히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면, 너희가 기도한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13절에 나오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so that the Son can bring glory to the Father)’ 하는 말씀과 ‘내 이름으로 (in my name)’ 이 두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봤더니 요즘에 ‘라벨갈이’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값싼 중국산이나 동남아시아 옷에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을 바꿔다는 것입니다. 라벨만 바꾸면 단돈 200원, 300원 하는 값싼 중국 옷이 ‘메이드 인 코리아’ 옷으로 둔갑해서 무려 5배로 값이 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사기입니다. 아무리 라벨을 바꿔달아도 그 옷은 한국에서 만든 옷이 아니라 중국에서 만든 값싼 옷입니다.

이제 세금 보고를 해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세금 보고 할 때, 잘못하면 IRS에 불려 가기도 하고, 편지를 받기도 합니다. 저도 몇 년 전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자기 혼자 세금보고를 하다 보니,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는 단순히 계산 착오라고 생각하는지 IRS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간단한 세금 보고를 제외하고 좀 복잡하다 싶은 것은 CPA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런 경우 CPA가 대신 보고한다는 이름과 싸인이 들어갑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틀릴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IRS에서도 믿고 서류처리를 빨리 해 줍니다.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Jesus’ name)’라는 라벨이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옷에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이 붙으면 그 라벨이 한국에서 그 옷을 만들었다는 증명을 합니다. 또 세금 보고서에 CPA의 이름이 들어가면, 그 세금 보고서는 실제로는 나의 수입에 대한 보고서이지만,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IRS에서 그 문제를 CPA와 의논합니다. 세금 보고서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May the Department of Revenue discuss this return with the preparer shown here (팔요하다면 국세청에서 당신의 세금보고를 대신 해준 사람과 의논해도 되겠습니까)?”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 이라는 라벨을 붙이면, 그것은 “이 기도는 내가 기도한 기도이지만 기도의 내용은 이미 예수님과 모두 의논하고 예수님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런 뜻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도, 능력 있는 기도생활을 하려면, 여러분의 기도 내용을 철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인지, 철저하게 기도의 내용을 점검해야 합니다. “예, 이미 점검을 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붙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두 번이나 “다 이루어 주겠다 (13, 14절)”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기도를 점검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기도를 점검하신다면, 제일 먼저 기도의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 아닌 것을 모두 삭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God-centered prayer’입니다.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려면 무엇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 책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성경이 교과서 (textbook) 입니다.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은 교수가 지정해 준 교과서 안 읽고 수업만 들어가는 학생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이기적인 기도, 자기 중심적인 기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싫어하시니까 당연히 그런 기도가 들어 있으면 삭제하시겠지요?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자기 희생이나 포기가 없는 기도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희생이나 포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23)

이상의 세가지 점검이 끝났다면, 우리의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힘으로 걸을 수가 없는 장애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자기들에게 구걸하는 이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3:6) 이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보시다시피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들의 말과 행동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구나!” 그렇지 않고 마치 자기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말과 행동에 ‘자기들의 이름’이라는 라벨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속임수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라는 라벨만 붙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긍휼이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그 사람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 주님이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이 사람을 고쳐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에게 병고침을 선포하겠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말과 행동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통해서 수많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던 것처럼 많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을 붙이십시오. 기도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만 붙이는 기도를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기도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3-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