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24/2018 | 사순절 34
십자가 후에 After The Cross
요한복음 14:16-19
성령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금방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요한복음 16:7)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됩니까?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지 않으면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고 ‘보혜사’께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보혜사 (16절)’라는 말입니다. 본래 ‘보혜사’라는 말은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하는데요. ‘곁으로 부르다’ ‘도움을 청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번역하다 보니까 ‘Advocate (대변자)’ ‘Comforter (위로자)’ ‘Encourager (격려자)’ ‘Counselor (상담자)’ 등 여러가지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6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쉽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자기는 하나님께로 가지만, 내가 너희를 버려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18절)”고 하시잖아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지만, 사실은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혹은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 (17절).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2:10).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때로는 대변자로, 때로는 위로자로, 격려자로, 상담자로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을 잘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깨달으면, 우리는 믿음생활을 바른 길을 따라 잘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 ‘보혜사’의 인도를 잘 받으면 우리는 진리의 길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일 많이 하는 오해는 성령을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영어에서 성령을 말한 때는 언제나 ‘He’라고 남성 명사로 표현합니다. 절대로 ‘it’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는 명사에 성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παράκλητος’는 남성 명사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대명사로 표현하려면 ‘그분’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격이 있으시다는 말은 성령께서 감정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면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지 않으면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방법은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니까 우리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영이시니까 우리의 영의 채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성령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입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꽉 차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내 속에 성령이 꽉 차 있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부흥사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아멘, 아멘”합니다.
성경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셨다.” (누가복음 4:1)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기를” (사도행전 4:8)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사도행전 6:3)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사도행전 11:24)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은 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꽉 찬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이미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3 말씀을 쉽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즉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그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이미 내 안에 온전하게 들어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지배하셨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해 지배하신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셨으면 우리는 그것을 ‘성령 충만한 삶 (The Spirit Filled Life)’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작은 차이라고 생각 되시나요?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생활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많이 넘어집니다. 사탄이 그런 사람을 공격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그런 때에 전혀 working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내가 구원 받았을 때 그때부터 이미 성령은 내 안에 계셨어요. 조금 계시고 많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많이 지배하느냐, 적게 지배하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은 제자들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완전히 지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잘 이해한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 생활에서 승리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서 working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양의 많고 적음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서부터 성령에 대한 오해가 시작됩니다. 성령은 처음부터 우리 안에 온전히 계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유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소유하는지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소유하시면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보세요.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신다고 생각하면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 일을 하다가 시험에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주 시험에 걸려 넘어집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성령께서 일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일하는 것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즉 ‘십자가의 죽음 후에’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아 가십시오. 잘못 배운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배운 지식이라야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working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대변자가 되시고,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격려자가 되시고, 상담자가 되시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23/2018 | 사순절 33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 A Personal Message from God
이사야 53:10-12
여러분들은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기독교의 성스러운 심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고요.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무슨 신비한 능력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고요. 또 목에 차고 다니면 위험한 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먼저 있어야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저께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이작 와츠 (Issac Watts, 1674-1748, 영국)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가 쓴 찬송가가 (물론 찬송시를 말함) 우리 찬송가에 12개나 들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중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 (149장)’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1절)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힘입어 교만한 맘을 버리네.” (2절) “못박힌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3절)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드리네.” (4절)
와츠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맘을 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볼 때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와츠가 쓴 또 하나의 탁월한 찬송이 있습니다. 151장 ‘만 왕의 왕 내 주께서’입니다. 그 찬송시 후렴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고통의 모두 사라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아니면 더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분들과 함께 처음으로 남미 코스타 리카 (Costa Rica)로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밖에 나가서 노방 전도도 했습니다. 국민의 95% 이상이 카톨릭을 믿습니다. 저는 그 때 까지만 해도 카톨릭도 예수님을 믿는 종교인데 95%가 예수를 믿는 나라에 무슨 단기 선교냐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 보니까 전도를 해야 하겠더라고요. 집집마다 방문 해 보았더니, 말이 카톨릭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선반 위에 무슨 부적을 모시듯이 올려 놨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어도 교회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도둑이 많고, 미혼모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마침 어느 교회가 비가 많이 와서 무너져 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닥이 흙입니다. 비가 오면 흙바닥에 앉기가 어려워요. 무너져 내린 벽은 자기들이 어떻게 손을 보겠는데, 벽을 손 볼 때 바닥에 시멘트를 깔았으면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단기선교 팀이 가서 바닥을 시멘트로 깔아줬습니다. 시멘트를 구입하는 비용을 우리 단기 선교팀이 부담했습니다. 현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님이 미리 그렇게 하기로 계획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시멘트를 물에 이기는 작업부터 우리 선교팀과 그 교회 교인들 몇 명이 같이 협력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교 팀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시멘트를 한 삽 뜨면 꽤 무겁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많으니까 몇 번 해 볼만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어집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 찬송가 한 구절이 떠 올랐어요.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이 찬송을 불렀어요. 그랬더니 우리 선교 팀이 따라 불렀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찬송을 현지 사람들이 알더라고요. 그래서 이 찬송을 모두 같이 불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바닥에 시멘트를 까는 힘든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 찬송가 부를 때마다 코스타 리카 교회 생각이 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성경 말씀이 보여 주는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 변경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첫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한 사람에게 지우셨습니다. 이 죄는 남의 것을 훔쳤다든지, 법을 어겼다든지 하는 죄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 없이 자기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인간의 교만한 생각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자기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생각 아닙니까?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만 (pride)’이라고 하고, 이 ‘교만’을 죄라고 합니다.
‘교만의 죄’를 가장 쉽게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입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의 꿈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 간섭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 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간섭이 없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살아 본 결과는 파산이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교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 (The Original Sin)’라고 합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위선으로 이 ‘원죄’를 가리고, 어떤 사람들은 교양으로 자기 속에 있는 ‘원죄’를 가립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들 속에 있는 ‘죄’가 더욱 심각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위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를 한 사람에게 지웠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셨는지 우리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God’s unconditional love)’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야 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9-11) 이런 생각이 들어야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화목제물 (ransom)’으로 내 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둘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예를 들어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e law of Moses was unable to save us because of the weakness of our sinful nature. So God did what the law could not do. He sent his own Son in a body like the bodies we sinners have. And in that body God declared an end to sin's control over us by giving his Son as a sacrifice for our sins.” (로마서 8:3) “우리의 인간성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진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 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컨트롤 할 수 없다고, 죄의 지배의 종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많은 기적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예 (example)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충분히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5:7-9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5-6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새벽에 우리에게 승리는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3/22/2018 | 사순절 32
십자가의 중심부 The Heart of The Cross
마태복음 27:45-54
아이작 와츠 (Issac Watts, 1674-1748, 영국)가 쓴 찬송가 중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어릴 때부터 찬송시를 짓는 천재성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하루는 예배 시간에 시편을 인도자와 회중이 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니 어린 아이작 와츠가 시편 교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 온 아버지는 아이작 와츠가 예배 시간에 시편 교독을 하지 않은 이유를 대라고 하면서 아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가 잘못된 것을 꾸짖었습니다. 그 때 아이작 와츠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그 시편에는 음악이 없고 운 (rhyme)도 맞지 않은데, 그런 시편을 굳이 따라 할 이유가 없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화가 난 아버지는 “네가 다윗보다 다 똑똑하단 말이냐? 그러면 그 시편보다 더 좋은 찬송시를 써 봐라” 하면서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아이작 와츠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아이작 와츠는 14살도 되기 전에 5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와츠에게 12년 동안 시를 쓰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가정에서 아이작 와츠는 찬송시를 쓰는 데 탁월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찬송가에 아이작 와츠가 쓴 찬송시가 12개나 들어 있습니다. 그가 쓴 대표적인 찬송가 중에 ‘웬 말인가 날 위하여 (143장)’이 있습니다. 그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돌아가셨나” (1절)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2절)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3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립니다” (4절)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5절)
이 찬송시에 흐르고 있는 은혜와 영성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찬송가 가사처럼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정말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고 했습니다 (45절).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시간에 밝게 빛나던 해마저 빛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9:4-5)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그 때 해가 빛을 잃었던 것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우주적인 슬픔’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삶은 캄캄한 밤과 같은 어두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매우 어둡고 우울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절규하는 말씀이 나오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둡고 우울한 장면이지만 우리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시간이고, 소중한 장면입니다. 비록 어둡고 우울한 장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 장면은 없어서는 안 될 장면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방법 밖에 없었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생깁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뭔가 꼭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를 볼 때 생기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에서 보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예수님의 앞을 막은 것은 십자가가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a dangerous trap to me.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마태복음 16:22-23) 이 말씀을 바울 버전으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의 삶은 세상적인 혹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항상 이기적이고 불완전합니다. 항상 적을 만들고, 경쟁해야 하고,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방식은 평화를 가져 옵니다. 자기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좋게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불완전합니다. 그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외에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control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control을 벗어난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저께 제가 도표를 보여 드렸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또 십자가 아래서 일어났던 일 하나 하나가 이미 구약 성경에 특히 시편 22편에 세밀한 부분까지 예언되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control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God was in control perfectly at the Cross!”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결코 용서하실 수 없는 정의 하나님, 하지만 동시에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무 갈등 없이 완벽하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모두 그 아들에게 전가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의의 하나님께서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심으로써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탄은 힘을 잃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를 짓게 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노예로 살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심으로 사탄은 그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완벽하게 패배한 것입니다. 사탄은 무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어저께 아침에 읽었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고린도전서 15:56-57)
마지막으로, 만일 십자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났다면, 그것 만으로도 훌륭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50-51절 말씀입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며칠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나마 말씀 드렸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언약 (The New Covenant)’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에는 이 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이 길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던 이 길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길을 ‘새 길 (the new way)’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By his death, Jesus opened a new and life-giving way through the curtain into the Most Holy Place.” (히브리서 10:20).
지금 우리는 이 ‘새 길’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합니다. 교회 오면 예배 시간에 목사의 인도를 받기는 합니다만, 목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의미가 다릅니다. 목사 역시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새 길’을 따라 교우들과 같이 하나님께 나가는 성도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새 길’이 우리 앞에 열림으로써 어떤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읽어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우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입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와 도우심을 받읍시다.” (히브리서 4:14-16)
3/21/2018 | 사순절 31
회복의 기적 The Miracle of Restoration
이사야 53:6-9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에게 지게 하셨다.” (6절) 이 말씀에서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다”는 말씀은 목자의 인도를 거부하고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목자의 인도를 거부한 양은 ‘제 길’로, 흩어져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습과 비교되는 말씀이 마태복음 9:36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내팽개쳐져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마가복음 6:34에는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만 이사야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의 컨텍스트가 좀 다르긴 합니다. 이사야 말씀은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자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은 그 당시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타락해서 자기 직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모두 그 ‘고난 받는 종’에게 지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 종은 매를 맞습니다. 그는 이리 저리 끌려 다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운명이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같은 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털을 깎는 양이 아무 저항 없이 털 깎는 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것처럼, 그는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수치와 모욕을 당했지만, 아무도 그가 그런 고난을 받는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악한 일을 한 적도 없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는 데도 그는 악한 사람들과 같이 묻혔습니다. 특이하게도 그의 무덤은 부자들 사이에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만, New Living Translation은 이 말씀을 알아 듣기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He had done no wrong and had never deceived anyone. But he was buried like a criminal; he was put in a rich man’s grave.” (9절)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깜짝 놀랍니다. “아니,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파 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 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도 그랬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신기한 일이 이것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있었던 일들이 모두 구약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도표를 한번 보십시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just as the Scriptures said)’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는 ‘undeserved favor of God (자격이 없는데도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비슷한 뜻으로 ‘unearned favor of God (얻을 수 없는 호의)’ ‘unmerited favor of God (아무 공로가 없는데도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무슨 한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 (에베소서 2:8)’이라고 했습니다. “It is not by anything you have done. It is a gift of God”입니다.
세상에 선물을 싫어할 사람 없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누구나 기뻐합니다. 비록 작은 선물이라도 주는 사람의 사랑과 관심이 그 선물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선물을 받으면 기뻐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에게 기쁨이 주어집니다. 반대로, 죄는 우리의 삶에서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비록 교회생활을 수년 동안 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이렇듯 죄는 우리의 삶을 어둡게 하고,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이런 성경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5:1) 여러분, 잘 들으세요. 구원은 우리에게 잃어 버렸던 기쁨과 평화를 주고, 죄는 우리에게서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 죄를 범한 후, 예언자 나단의 책망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의 전형 (example)을 보여 줍니다.
“7 우슬초로 나를 씻겨 주소서. 그러면 내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소서. 그러면 내가 눈보다 더 하얗게 될 것입니다. 8 내 귀에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가 들리게 해 주소서. 주께서 꺾으셨던 내 뼈들이 즐거워하게 해 주소서. 9 내 죄에서 주의 얼굴을 돌리시고 내 모든 죄를 없애 주소서. 10 오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주시고 내 안에 올바른 마음을 새롭게 해 주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에 대한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셔서 주께 순종하게 하소서. 13 그러면 내가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14 오 하나님, 사람을 죽인 죄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하나님, 주는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니 내 입이 주의 의로우심을 노래할 것입니다. 15 오 주여, 주께서 제 입술을 열어 주셔서 제가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16 주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제사를 좋아하신다면 제가 드릴 것이지만, 주는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1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사는 깨어진 마음입니다. 오 하나님, 상처 난 가슴과 죄를 뉘우쳐 주님께 고백하는 마음을 주는 경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8-17절)
“7 Purify me from my sins, and I will be clean; wash me, and I will be whiter than snow.
8 Oh, give me back my joy again; you have broken me - now let me rejoice. 9 Don’t keep looking at my sins. Remove the stain of my guilt. 10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God. Renew a loyal spirit within me. 11 Do not banish me from your presence, and don’t take your Holy Spirit from me. 12 Restore to me the joy of your salvation, and make me willing to obey you. 13 Then I will teach your ways to rebels, and they will re-turn to you. 14 Forgive me for shedding blood, O God who saves; then I will joyfully sing of your forgiveness. 15 Unseal my lips, O Lord, that my mouth may praise you. 16 You do not desire a sacrifice, or I would offer one. You do not want a burnt offering. 17 The sacrifice you desire is a broken spirit. You will not reject a broken and repentant heart, O God.”
시편 32편이 다윗이 죄를 숨겨 두고 있었을 때 고통스러웠던 심정을 쓴 시편이라면,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시편입니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은 8절과 12절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잃어버렸던 기쁨을 다시 돌려 달라고, 회복 시켜 달라”고 합니다. “Restore to me the joy of your salvation!”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왜 크리스천의 삶 속에 기쁨이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기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삶에서 기쁨이 중요합니다.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Rejoice in the Lord always.” (빌립보서 4:4) 바울은 크리스천은 늘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나에게 기쁨을 달라고 말하지 않고,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기쁨은 단순히 감정적인 표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내 마음이, 내 심령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건강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내 안에 기쁨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마음이 어둡고, 마음이 지속적으로 down 되어 있고, 기쁨이 없다면, 심각합니다. 더 심각한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다윗의 기도를 따라 “주님,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 시켜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20/2018 | 사순절 30
부활의 능력 Power of The Resurrection
이사야 53:1-5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고,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 주변 사람 누구도 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 사람들은 그의 불행을 보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저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사람이 그런 아픔을 겪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앓았어야 할 질병을 대신 앓아 준 것이었고, 그가 상처를 입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그렇게 짓밟힌 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아픔을 겪고, 상처를 입고, 짓밟힌 덕분에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성서 신학자들은 편의상 이 사람을 ‘고난 받는 종 (the suffering servant)’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은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고난 받는 사람이 자기 민족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고난을 받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고난 받은 자기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고난 받은 것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는다는 이 말씀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크리스천들은 이 ‘고난 받은 종’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정확하게 오버랩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신 (for)’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가 그런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그가 대신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죄→심판→죽음’의 공식이 깨졌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공식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롭다함을 얻음→영원한 생명을 얻음’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공식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이 묻혀 있는 묘지에 가 보면 비석에 많이 새겨져 있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 누구의 묘’ 이런 비석들이 제일 많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 (디모데후서 4:7) 이런 말씀들도 많습니다. 가끔 이런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는 비석도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이 말씀 다음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전서 15:56-57)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우리가 따르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는 공식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저께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제자들의 ‘stubborn unbelief (고집 센 불신)’을 꾸짖기 위해서 였다고 말씀을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 속에서도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있었던 ‘stubborn unbelief’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stubborn unbelief’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버리지 않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특히 부활에 대한 우리 속에 있는 ‘stubborn unbelief’를 내려 놓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보면 부활의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청년들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 지금 부터라도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 우리 인생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게 하셨고, 삶의 미션을 가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부를 해도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나를 위해 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벌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example을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삶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에 걸린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걸어보지 못한 친구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으로 받아들인 네 친구는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느 집 안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되자, 이 네 친구는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들 것에 달아 내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예수님은 너희의 믿음이 친구를 구원했다고 하시면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의 중요성을 부각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에는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 인도한 빌립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 나다나엘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서 “친구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오겠어?” 이렇게 말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빌립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친구야, 일단 나와 같이 그 분에게 가 보자!” 하면서 결국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친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요한은 이 이야기를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의 복음서 1장에 이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