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18/2018 | 사순절 새벽기도를 앞두고 2
경건의 훈련이 주는 유익 The Profit of Godly Discipline
디모데전서 4:6-9
성경에 ‘훈련(訓練)’이란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훈련’은 말 그대로 ‘가르치고 익힌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iscipline’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disciple (제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 받았습니다. 모든 훈련이 그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을 배웠습니다. 광야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새벽마다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사람은 빵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신명기 8:3)” 는 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들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민족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한 개인도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미디언 광야에서 40년 간 모세를 훈련을 시켰습니다. 40년은 모세가 ‘자기 의 (self-righteousness)’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의 (God’s righteousness)’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미디언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는 80세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잠언 17: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도가니가 은을, 풀무가 금을 녹이듯,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신다 (Fire tests the purity of silver and gold, but the Lord tests the heart).”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test하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test하시는 과정을 우리는 ‘훈련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훈련이 혹독하듯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혹독하게,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이 훈련을 받으면서 잘 견디면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데모데전서 4:6-9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를 ‘멘토링’한, 제자 디모데를 훈련 시킨 말씀입니다. 여기에 ‘육체의 연습 (physical training)’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그 당시에 ‘physical training’이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강원도 평창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올림픽의 역사를 살펴 보면, 이미 BC 776년에 최초의 스포츠 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리스가 도시 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도시 국가들이 출전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도시 국가들 간에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하기 위해서 4년마다 스포츠 제전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남자들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고요. 특이한 것은 모두 옷을 벗고 경기를 했다고 합니다. 경기 종목은, 처음에는 단거리 종목만 하다가 점차 중거리, 장거리 달리기도 포함 시키고, 복싱, 레슬링, 원반 던지기, 창 던지기, 전차 경기 등이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스포츠 제전이 서기 393년까지, 293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로마에 의해서 중단되었다가, 쿠베르탱이 근대 올림픽을 설립해서 다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스포츠 제전이 시작된 BC 776년은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에 해당하고,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활약하던 1세기는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은 운동경기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ctetus, 55-135, 그리스)가 스포츠 선수로 입문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선수들이 겪어야 할 고충을 열거하면서 신중히 생각하라고 조언했던 글이 남아 있습니다.“누구나 올림픽 경기에 나가 우승을 하고 올리브 관을 쓰고 싶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렇다면 먼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행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선 모든 것을 규칙에 따라 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엄격하게 가려야 하며, 때로는 맛있는 것도 못 본 척해야 합니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지정된 시간에는 열심히 훈련하고, 찬물이나 포도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의사의 처방에 따르듯 트레이너의 말에 완전히 몸을 맡겨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손을 다칠 수도 있고, 발을 삘 수도 있습니다. 흙먼지를 많이 마셔 기진맥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혹독한 훈련을 받고서도 경기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경기에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글을 읽어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말,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Physical training is good, but.....”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청년들이 몸을 만드는 physical training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를 받아 읽는 디모데도 동시대의 청년들처럼 physical training에 열중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당시의 청년들은 미론 (Myron, BC 480-440, 그리스)의 ‘원반 던지는 사람’의 멋있는 몸을 생각하면서 physical training에 열중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physical training에는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몸을 만들면 건강에 도움이 되겠지요? 저도 physical training에 열중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팔뚝이나 어깨 근육을 보면서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칭찬해 주면 왠지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physical training이 주는 유익입니다. 청년들 중에는 혹독한 physical training을 견디어 내고, 운동 선수가 되어 스포츠 제전에 나가 월계관을 받는 영예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바울은 physical training도 좋지만, 정작 크리스천들이 힘써야 할 것은 ‘경건의 훈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대부분 ‘godly’라는 형용사를 씁니다. 명사형으로 하면 ‘godliness’가 됩니다. 이 말은 ‘god (하나님)’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godly’라고 하면 ‘하나님을 닮는’ 이런 의미가 됩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경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닮는 것이 경건입니다. 예를 들면, 거룩하심, 사랑, 인자, 자비, 오래 참으심, 진실하심, 선하심, 순결하심, 의로우심, 이런 하나님의 성품들을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바울은 ‘경건의 훈련’을 하면 여러가지도 유익한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에도 유익한 것들 것 많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 앞으로 오는 세상 (in this life and in the life to come)’을 위해서도 ‘경건의 훈련’은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경건의 훈련’을 꾸준히 해 나가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잠깐만 생각해 봐도 몇가지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음으로써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육체의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 두가지 훈련이 매우 닮았습니다. 두 가지 훈련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매우 닮았습니다. ‘육체의 훈련 (physical training)’을 받음으로써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경건의 훈련’은 영적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경건의 훈련’을 위해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고 있는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너는 젊다는 이유로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 너의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도록 하라.....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며, 그대가 크리스천으로서 발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 너는 삶과 가르침에 주의해서, 늘 올바르게 살고 가르치기에 힘쓰라. 열심히 성경을 읽고 사람들을 권면하며 잘 가르치라.” (디모데전서 4:12-14, 15-16)
이 말씀 속에 ‘경건의 훈련’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삶의 자세, 계속 성장하는 삶, 가르침과 삶이 다르지 않도록 일치 시키는 노력, 성경읽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삶 등이 ‘경건의 삶’을 훈련하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Physical training을 받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듯이, ‘godly training’을 받지 않은 사람이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충고했듯이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도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하는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And athletes cannot win the prize unless they follow the rules).” (디모데후서 2:5) 이 말씀이 주는 implication이 무엇입니까? ‘physical training이 그렇듯이, ‘godly training’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모든 훈련의 핵심은 ‘절제 (self-control)’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맨 먼저 1,500m에서 금메달을 딴 쇼트트랙 선수가 이 시간 이후에 무엇이 가장 하고 싶냐고 묻는 질문에 중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이젠 햄버거 하나만 먹어도 되겠죠?”라고 했습니다. 또 남자 1,000m에서 동메달을 딴 선수는 뭐라고 했습니까? “오늘만큼은 라면에 밥을 말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경건의 훈련’을 받으려면, ‘절제’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습관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은 대부분 ‘영적 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제는 그런 삶의 방식을 바꾸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 복종 시키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크리스천으로, 좋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만 가지고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한 후에 했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주님이 바로 정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은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7-8)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울은 그 자신이 전도자로서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했던 고난의 삶을 ‘선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I have fought the good fight”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했던 악한 세력들과 믿음을 지키면서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웠던 그의 저력(底力)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가 꾸준하게 훈련했던 ‘godly training’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디모데에게 충고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꿋꿋이 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5)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전도자로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이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고난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건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승리의 면류관 (winning prize)’을 받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는 것이 선수들의 최고의 영광이듯이, ‘경건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에게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전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은)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8) 저와 여러분을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싫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어서 익숙하지 않지만, ‘경건의 훈련’이 좋은 것은 알지만, ‘경건의 훈련’에 집중하면 다른 일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지만,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점을 따는데, 선택 과목이 있고, 필수 과목이 있습니다. 선택 과목은 반드시 그 과목을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과목 대신 다른 것을 들어도 됩니다. 하지만, 필수 과목은 반드시 학점을 따야 합니다. 그래야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경건의 훈련’은 크리스천으로서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이 과목을 하지 않으면 좋은 크리스천으로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과목을 하지 않으면 많은 profit (유익함)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 기도가 시작됩니다. 매일 아침 새벽 5:35에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날 것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영적으로 성장 시키려고 하시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육체의 훈련’이 주는 유익이 크지만, ‘경건의 훈련’이 주는 유익은 이보다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2/11/2018 | 사순절 새벽기도를 앞두고 1
거룩한 삶의 비결 The Secret To Living A Holy Life
디모데전서 4:4-5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 디모데를 멘토링 했던 내용을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 때 디모데의 나이가 30살이 채 안 된 때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 속에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Run from anything that stimulates youthful lusts. 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디모데후서 2:22)”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lust’라는 말은 ‘욕망’이라는 말로 번역하면 좋겠습니다. ‘youthful lusts’라고 하면 ‘청년의 때 빠지기 쉬운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companionship’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이런 것들을 청년의 때에 추구할 가치로 알고 이런 가치들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 보면,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좋은 멘토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때 저를 이끌어 줄 좋은 멘토가 곁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한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디모데 같은 사람은 사도 바울을 멘토로 두었으니까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청년의 때에 질문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기심은 얼마나 많습니까? 시행착오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열정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열정을 올바로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멘토가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 인생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모데는 청년의 때에 교회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 때 교회는 지금의 교회하고 많이 다릅니다. 지금 교회들은 제도화 되어 있지만, 그 때 교회들은 타문화권에 신자들 몇 명이 가정에서 모이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된 두루마리 모양의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생활을 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문제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 이런 문제들을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똑 같습니다.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을 때 크리스천들이 먹는 음식까지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제사 지냈던 음식들이 시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크리스천들이 그런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또 하나, 그 당시에 영지주의 (Gnosticism)라는 사상이 유행했습니다. 이 사상은 육적인 것을 경멸하고 영적인 것을 찬양하다 보니, 정력을 증강 시키는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은 영지주의자들이 금하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까? 아니면 먹지 않아야 합니까? 청년 디모데가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잘 다룰 수가 있었겠습니까? 디모데는 자기 멘토였던 바울에게 이 문제를 질문했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써서 보낸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4-5절)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으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①Or made holy 라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라고 나와 있습니다. ‘consecrate’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하게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우상숭배에 드려졌던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이해했을 때,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읽어 왔던 이 말씀 속에 이런 뜻이 들어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그 감동이 더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소위 말하는 ‘적용 (applic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아, 성경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 이 말씀을 가지고 지금 나의 문제를 해석하고, 내 삶에 이 말씀을 이렇게 실천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적용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개념이긴 합니다만, ‘implic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을 굳이 번역하자면 ‘함축’ 혹은 ‘암시’라고 할까요? “이 말씀 속에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거나 암시되어 있다” 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거나 암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록 어떤 음식이 우상숭배에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해 져서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implication’은 무엇입니까? 사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이 말씀 속에 사람에 대한 말씀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도 선한 목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삶에 이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창세기 말씀을 읽다가 크게 깨닫고 은혜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18:19 말씀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ve singled him out so that he will direct his sons and their families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what is right and just. Then I will do for Abraham all that I have promised."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고,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과 딸들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본 받아서 ‘the way of the Lord (주님의 길)’을 잘 따르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단순히 아브라함의 가정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만드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 (the people of God)’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의 길 (the way of the Lord)’을 잘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냥은 안 되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의 길’을 잘 따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님의 길’을 잘 따르고 있습니까? ‘주님의 길’이 아니라, ‘내 길’, ‘내가 원하는 길’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끔찍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기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게 해 주십시오 (마태복음 26:39)”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 ‘나의 길’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내가 원하는 말씀만 눈에 들어 옵니다. 그것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넌 크리스천들 (Non-Christians)’입니까? 성경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우리가 ‘이방인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면,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나의 길’을 고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이런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holy)’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 속에, 바울이 청년 디모데에게 멘토링 했던 말씀 속에 그 길이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다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셨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 이런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에 ‘아멘’하는 사람들은 손에 성경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성경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쏙쏙 들어 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How sweet your words taste to me; they are sweeter than honey., 시편 119:103)” 이렇게 썼던 시편 기자의 고백을 이해하게 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How can a young person stay pure? By obeying your word).” (시편 119:9) 이 말씀을 듣고도 성경을 펴서 읽지 않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음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 (communication with God)’ 입니다. 지금은 ‘소통’이라는 단어가 시대적인 화두(話頭)입니다. 어디서나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학생과 교수와의 소통, 세대 간의 소통, 직장에서의 소통, 교회 안에서의 소통, 어디서나 소통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보고 청년 목회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청년 목회의 비결도 소통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곳에는 청년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왜 유독 ‘하나님과의 소통’의 중요성은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소통이 잘 되어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과의 소통의 문제는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힘들어 하는지, 다시 말하면, 왜 사람들은 기도를 힘들어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상대방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통에는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 상대방을 보면서 서로 대화를 하면서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처럼 말씀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은 말이 없는 데, 혼자 10분, 20분, 30분 말을 하려고 하니까 그게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기도를 그렇게 힘들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식 기도를 훈련해야 합니다.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고 나서 “아멘” 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 옆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말씀 드렸습니다만, “나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저에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금방 “아멘” 하고 일어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난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기도에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 귀를 열고 들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이런 기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극심한 고통 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 27:46)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은 동시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다 이루었다!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상대방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말하는 ‘monologue (독백)’가 아닙니다. 기도는 ‘dialogue (대화)’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2분 기도했으면 2분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기다리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이런 훈련이 쌓여질 때, 기도는 힘든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저 광야같은 세상을 끝 없이 방황 하면서 위태한 길로 나갈 때, 주께서 나를 이끌어 그 보좌 앞에 나아가 큰 은혜 받게 하시네.”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1, 2절) 이 찬송의 영어 가사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Sweet hour of prayer, sweet hour of prayer’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은 이렇게 달콤한 시간입니다.
덮었던 성경을 펴서 읽으세요.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세요. 그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acceptable’ 삶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를 멘토링 했던 길이고, 성경이 제시하는 거룩한 삶의 길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오늘 말씀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2/4/2018 | 청지기/임명예배 설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 We Are Stewards Of The Mysteries Of God.
고린도전서 4:1-2
오늘 읽은 말씀 중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말 성경에는 이 말씀의 배경이 빠져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So look at Apollos and me as mere servants of Christ who have been put in charge of explaining God's mysteries”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볼로와 나를 단순히 그리스도의 서번트로 봐 주십시오” 이런 뜻이지요? 아볼로는 바울과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원치 않게 어떤 사람과 경쟁관계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하든지 경쟁자를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잘 생겼습니다. 학벌이 좋아요. 바울이 국내파라면, 아볼로는 해외 유학파였습니다. 세계 최대의 학문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했습니다. 아볼로는 웅변술에 능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잘 알았습니다. 정말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바울을 위협했던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 파가 있었고, 아볼로 파가 있었겠습니까? 그외 두 파가 더 있었지요? 베드로 파가 있었고, 그리스도 파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이 자기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아볼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이런 점을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바울은 나나 아볼로나 모두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servant (일꾼 혹은 사역자)’는 주인으로부터 명령 받은 일을 잘 하면 됩니다. ‘일꾼’끼리 경쟁 관계를 만들고, 서로 시기하고, 서로 모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리고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 3:6)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나와 아볼로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봐 주십시오. 누가 훌륭하고, 누가 잘하고, 못하고 하면서 우리 두 사람을 비교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각자가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면 각자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임명 받으시는 분들은 2,000년 전에 바울이 가졌던 심정을 이해하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서번트’라고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서번트끼리 경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협력해서 주님의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느 뛰어난 사람이 혼자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물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둘이 서로 협력할 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지금 회사나 연구소에서도 혼자 하는 일은 거의 없고 ‘team project’가 대부분입니다. 지금은 서로 협력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자라는 말씀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니까 이 말씀이 “We have been put in charge of explaining God's mysteri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설명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뜻이지요? 같은 뜻이지만, NASB나 NKJV 성경은 조금 다른 용어들을 사용했습니다. “We are stewards of the mysteries of God”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이런 뜻이지요?
‘청지기’라는 말은 ‘steward’라는 말인데, 지금은 이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배나 비행기의 승무원들을 말할 때 지금도 ‘steward’라고 합니다. 여자 승무원들을 ‘stewardess’라고 합니다. 그 외에는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부자집에 ‘집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 뉴스에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집사’ 역할을 했던 ‘김백준’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김백준’이란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을 모두 관리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steward’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steward’는 하나님의 경륜을 꿰뚫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steward’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엇이고, 그 구원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집사다, 가족장이다, 간사다, 팀장이다, 임원이다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섬기는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역사상 유명한 재상들을 보면 모두 시대의 경륜을 알고 국가를 경영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steward’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알려면, 성경 읽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성경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교회의 ‘steward’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밖에 없지 않나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16:23) 우리는 ‘하나님의 일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경륜 (God’s mysterious plan)’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일 (a human point of view)’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good steward’가 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steward’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We have been put in charge of explaining God's mysteries”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steward’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세요? “Turn away from evil and do good. Search for peace, and work to maintain it. The eyes of the Lord watch over those who do right, and his ears are open to their prayers. But the Lord turns his face against those who do evil. Now, who will want to harm you if you are eager to do good? But even if you suffer for doing what is right, God will reward you for it. So don't worry or be afraid of their threats. Instead, you must worship Christ as Lord of your life. And if someone asks about your Christian hope, always be ready to explain it. But do this in a gentle and respectful way.” (베드로전서 3:11-16)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행하십시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눈은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살피시고,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돌리십니다. 당신이 열심히 선을 행하려고 한다면, 누가 당신을 해치려고 하겠습니까? 설령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모두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겁주는 것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를 당신의 삶의 주로 삼고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누가 당신이 크리스천으로서 가지고 있는 희망에 대하여 묻는다면 항상 부드럽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답해 줄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의 경륜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런 사람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씀의 연장선에서, 저는 우리 교회의 네 번째 비전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네 번째 비전은 “조국과 세계를 섬길 인재를 배출한다”입니다. ‘인재(人才)’는 말 그대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재’라고 할 때는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교회가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 차고 넘칩니다.
제가 ‘인재’를 생각했을 때, 제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요셉’이었습니다. 제가 ‘요셉’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은 주어진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항상 최선을 다하는 요셉을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성경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원합니다. 주인이 볼 때만 일 하는 척하고 눈가림으로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모두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입니다. 골로새서 3:22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을 주인이 눈 여겨 봅니다. 주인이 좋아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 아이는 뭔가 특별함이 있는 아이다. 이 아이가 믿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와 함께 하시는구나!” (창세기 39:3)
주인의 눈에 들어서 잘 나가던 요셉에게 어느 날 갑자기 고난이 닥쳤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감옥에 갇힌 요셉을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9:21, 23). 하나님께서 요셉이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39:23).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말이 어울리는 말입니까? 하지만, 요셉은 감옥생활을 발판으로 해서 이집트의 바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해 줍니다. 바로는 단번에 요셉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경영(經營)하게 합니다. 이 말은 요셉이 천하를 경영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단순히 요셉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요셉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낸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셉이 처음부터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하나님의 경륜을 모두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요셉의 믿음이 점점 성숙해져 가면서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해석했던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해석했더라면 아마도 절망 속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나같이 불쌍한 사람은 없다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을 지 모릅니다. 다행하게도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형님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50:20) 성경 창세기에 요셉에 대한 말씀이 30장에서부터 50장까지 모두 21장이 나옵니다. 그 많은 말씀 중에 가장 빛나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교회가 말하는 ‘인재’입니다.
또 한 사람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 목사입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삽보로 대학 (The Sapporo Agricultural College, now Hokkaido University) 출신입니다. 그 때 삽보로 대학에는 윌리암 클라크 (William Clark, 1867-1879, 미국) 교수가 있었습니다. 윌리암 클라크 교수는 Amhurst College를 나와서 모교에서 15년간 교수로 있다가 UMass Amhurst에서 교수로 있었습니다. 삽보로 대학에서 윌리암 클라크 교수를 초빙했습니다. 클라크 교수는 초빙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방과 후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윌리암 클라크 교수는 “Boys be ambitious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장본인입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이 클라크 교수의 영향을 받아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우치무라 간조는 1885년에 윌리암 클라크 교수의 모교인 Amhurst College로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옵니다. Amhurst College를 졸업한 우치무라 간조는 하트포드 신학교 (Hartfor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지만, 금방 4개월만에 그만 두고, 1888년에 28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Amhurst College 재학 시절에 자신의 삶에 대한 뜻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우치무라 간조 목사의 묘비에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새겨 있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야, 그 말 멋지다!” 이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멋진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과 관련하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21-23)
마치 Jim Elliot (1927-1956)이 Wheaton College 재학 시절 일기책에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이렇게 써 놓았듯이,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 역시 Amhurst College 재학 시절에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전을 이렇게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이 결심대로 살았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는 일본을 성경 위에 올려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성경 강해를 할 때는 300-400명의 청년들이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해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 한국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재들이었습니다.
요셉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이집트로 팔려 왔습니다.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은 대학시절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어떤 삶을 살지를 결정했습니다. 짐 엘리엇 역시 대학 시절에 자신의 삶을 무엇을 위해 헌신할 것인지를 결심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목사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가슴을 펴라고요. 당장 눈 앞에 닥친 일만 보지 말라고요.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고, 내 가슴에 그리스도를 품고, 교회를 품고, 조국과 세계를 품으라고요. 큰 뜻을 품고 기도하고, 큰 뜻을 품고 성경을 펴고, 큰 뜻을 품고 공부하라고요. 눈 앞에 닥친 일들을 좇아가기에 급급한 인생을 살지 말고, 큰 뜻을 품고 ‘Purpose Driven Life (목적이 이끄는 삶)’를 살라고요.
1/28/2018 | 당회주일 설교
우리 교회의 비전 Our Church’s Vision Statement
에베소서 1:3-12
‘전당대회(全黨大會)’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 당에 속한 모든 당원들이 모이는 회의라는 뜻입니다. 주로 정치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요. 오늘은 우리교회 ‘당회(堂會)’입니다. 당회원들이 모두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는 회의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감리교회 장정에 보면 ‘당회원’은 만 18세 이상으로 ‘입교(入校)’한 교인들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만 18세 이상된 세례 받은 교인들을 ‘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당회’ 혹은 ‘교인총회’라고 해서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들에게 회원 자격을 부여합니다.
오늘은 그런 주일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 후에 이어서 ‘당회’가 열리는데, 여러분들 모두 참석 하시기 바랍니다. 당회원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올해가 우리 교회 창립 40주년 되는 해입니다. 50주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40주년이면 우리 교회로서는 꽤 의미 있는 해입니다. 지금까지의 교회 사역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베소서 1장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앞으로 우리 교회가 생각해야 할 사역의 방향이 나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라는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인데, 오늘 말씀을 잘 읽어 보면, 바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네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를 흠 없는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4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Even before he made the world (심지어 그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지금 여러분이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는 것이 어쩌다가 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만큼 지금 여러분이 믿음생활 하고 있는 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개입 (divine intervention)’하심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런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냥 어쩌다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주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 계획대로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의 나의 믿음생활을 전혀 새로운 시각(視角)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리고, 믿음생활을 더 성실하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주어집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5절). 첫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를 합치면, 하나님은 우리를 흠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to be holy (children of God) and without fault in his eyes’라고 나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로마서 말씀을 읽다가 크게 은혜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5:16에 있는 말씀입니다. 로마서가 16장까지 있으니까요. 로마서가 거의 끝나가는 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해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생활 방식은 우리와는 아주 다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냥 그대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줘서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으로, ‘as an acceptable offering to God’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데, 나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려고 한다.” ‘제사장’이라는 말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들과 하나님을 연결 시켜 주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계획을 하셨어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면 흠이 없어야 하잖아요?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냥은 안 되잖아요? 우리에게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냥은 안 되잖아요? 무슨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울은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세 번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6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네요. “We praise God for the glorious grace he has poured out on us who belong to his dear Son (그의 아들에게 속한 우리에게 은혜를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거룩한 사람들이 되고, 예수님을 믿어야 바울이 로마서 말씀에서 말한대로 하면 ‘as an acceptable offering to God’이 되고, 예수님을 믿어야 우리의 인간성이 변화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예수님을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이 은혜는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the grace he has poured out on us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신 은혜)’ 라고 했습니다. ‘비가 폭포수같이 쏟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그런 비를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한번 경험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로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동차 와이퍼를 빨리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브레이크를 밟고 서자니, 뒤에서 오던 차가 들이 받지 않을까 불안했습니다. 다행이 사고는 없었습니다. ‘He has poured out on us’라는 말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특권 (undeserved privilege)’이라고 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로마서 5:2).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고 그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the grace poured out on us’이고, ‘undeserved grace’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마지막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섬길 주인이 없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로 살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사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목적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목적을 깨닫게 하시고, 그 목적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10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this is the plan: At the right time he will bring everything together under the authority of Christ-everything in heaven and on earth (이것이 그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모든 것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두 그리스도의 authority 아래로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목적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먼저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피어리어드!! 더 이상 다른 것 없습니다. 누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듣지 마십시오. 이 말씀 외에 다른 말을 할 것도 없고, 이 말씀 외에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첫 소망을 가진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기 원하십니다 (12절)”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 “We are the first to hope in Christ”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이 이 말을 썼을 때, 그는 이 말을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설교자인 저에 눈에는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한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 교회의 네 가지 비전 중에 제일 첫 번째 비전이 “한국교회의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연합하여 복음적인 신앙공동체를 이룬다”하는 것입니다. 이 비전을 정할 때 어떤 사람들은 “여기는 미국인데 한국교회의 전통이라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을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때 제 생각에는, 우리가 아무리 미국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좋은 전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곳 미국에서도 이 좋은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새벽기도’입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 전통이 살아 있을 때,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 전통이 사라지거나 변질되었을 때부터 한국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복음적인 신앙공동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복음주의 신앙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의 표현을 바꿔서 ‘복음적인 신앙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복음적인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복음적인 신앙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잘 이해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해 놓은 말씀이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입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 교회의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공유합니다. 그 교회의 목사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인 교회 안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은 ‘역동적인 (dynamic)’ 것입니다. 마치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속에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6). 그 때 바울이 사용했던 단어가 ‘두나미스 (δύναμις)’라는 단어인데, 이 말에서 영어 ‘다이너마이트’가 나왔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성이 새로워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관점 (humanistic point of view)에서 착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난, ‘born again Christians’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입니다.
자연히 ‘복음적인 교회’ 안에는 구원의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적인 교회 안에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형제 우애와 사랑이 넘칩니다. 그리고, 교회는 나오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거룩한 관심과 부담감이 생깁니다. 이런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 복음적인 신앙공동체입니다.
저는 정말 우리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요? 아니면, 여러분 모두가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지요? 밤이 어두우면 별이 더욱 빛이 납니다. 지금은 교회들이 복음에 대한 가치를 상실하고 있는 때입니다.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시대가 혼란하면 혼란할수록, 복음의 가치를 가진 교회가 빛을 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다른 무엇보다도 복음적인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21/2018 | 새해예배 설교 3
모든 일에 하나님 인정하기 Acknowledging God In All We Do
잠언 3:5-8
여러분, 잠언이 어떤 책인지 아시지요? 잠언(箴言)은 ‘바늘 잠’에 ‘말씀 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箴’는 ‘대나무 죽’ 자가 위에 있고, ‘함’자가 밑에 있습니다. ‘대나무 죽’자가 위에 있으면 ‘대죽머리 부’라고 해서 ‘경고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밑의 ‘함’자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잠언(箴言)’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proverbs’라고 복수형으로 쓰면 주로 성경의 ‘잠언’을 가리킵니다만, 단수형으로 ‘proverb’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속담’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잠언은 모두 31편까지 있는데요. 그 중의 많은 부분을 솔로몬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썼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3: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너와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이렇게 축복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구했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데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사도행전 13:22, 사무엘상 13:14)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죽었다.” (사도행전 13:36)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For David had done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and had obeyed the LORD's commands throughout his life, except in the affair concerning Uriah the Hittite).” (열왕기상 15:5)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잠언을 썼습니다. 그는 잠언을 쓴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읽는 사람들이) 지혜와 교훈을 얻게 하고, 슬기로운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 훈련과 지혜로운 생활을 얻게 하고, 의롭고, 올바르고, 정직한 삶을 살며,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사리 분별력을 주고, 젊은이에게는 체험적인 지식과 옳은 것을 깨닫는 능력을 주기 위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듣고 학식을 더할 것이며, 지각 있는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잠언과 비유, 지혜자의 가르침, 그리고 오묘한 일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Their purpose is to teach people to live disciplined and successful lives, to help them do what is right, just, and fair. These proverbs will give insight to the simple, knowledge and discernment to the young. Let the wise listen to these proverbs and become even wiser. Let those with understanding receive guidance by exploring the meaning in these proverbs and parables, the words of the wise and their riddles).” (잠언 1:2-5)
이 말씀에서 특히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습니까? “젊은이에게는 체험적인 지식과 옳은 것을 깨닫는 능력을 주기 위함이다” 이 말씀이 특별한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나요? 잠언 하나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그렇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그러므로, 우리가 잘 되는 일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inspiration (영감)’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inspiration’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변화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했습니다. 평생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범사에,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에서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삶이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오늘 솔로몬이 쓴 잠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슬기를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한 일은 피하여라.”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했을 때, ‘인정한다’는 말은 ‘acknowledge’라는 말을 씁니다. ‘recognize’라는 말을 쓴 성경도 몇 개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성경들은 ‘인정한다’는 말을 ‘acknowledge’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acknowledge’라는 말은 앞의 ‘ac’이란 말과 뒤에 ‘knowledge’라는 말이 붙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knowledge’라는 말은 ‘know (알다)’라는 말과 관계되어서 ‘지식’이라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나오는 ‘ac’이라는 말은 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accord’라는 뜻이 있다고 하네요. ‘accord’라는 말은 ‘조화를 이룬다” “합의하다’ ‘동의하다’이런 뜻이 있지 않습니까? 조금 상상력을 동원해서 설명한다면 ‘acknowledge’라는 말은 내가 아는 지식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계시(啓示, revelation)되어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중대한 오류(誤謬, error)를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말씀 드렸습니다.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그들의 예배는 희극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만든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7: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29:13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자기들도 그런 착각에 빠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면 자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니,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은 이루시며, 약속하신 것은 지키신다.”(민수기 23:19)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조화된 삶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NIV 성경에 이 말이 “Don’t be impressed with your own wisdo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고, 얼마나 우유부단하고, 얼마나 실수투성이입니까? 바울이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Don't think you are better than you really are. Be honest in your evaluation of yourselves, measuring yourselves by the faith God has given us.” (로마서 12:3)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다고요. 자신의 약한 점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압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늘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 줄로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시편 118편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표적인 시편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절) 이런 감사로 이 시편이 시작됩니다. 이 시편을 죽 읽어내려 가면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편 118:8-9)”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기까지 얼마나 사람에 대한 실망을 많이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기 ‘고관’이라는 사람은 ‘princ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높은 신분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도 믿을 만한 사람들 아니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오직 신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이 시편 저자의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제일 먼저 두는 것입니다. "In everything you do put God first"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생각나고, 아내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누구가 되었든지 사람을 먼저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오늘 읽은 잠언 3:6 말씀을 “Listen for God's voice in everything you do"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귀를 기울여도, 그 사람이 기대했던 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귀를 기울이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응답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하게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divine intervention’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에게 ‘divine intervention’을 보여 주십니다. 맞습니까? 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divine intervention’이었습니다. 모세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어? 이상한데? 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는 않지?” 하면서 가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출애굽기 3:3). 이 때 모세는 그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WWJD'라고, "What would Jesus do?" 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1990년 대에 미국에서 ‘예수운동 (Jesus Movement)’가 일어났는데, 그 때 모토가 ‘WWJD’였습니다. 이 운동에 불을 지핀 것은 1896년에 Charles Sheldon이라는 미국의 목사님이 쓴 ‘In His Steps’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부제(副題, subtitle)가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잘 결론이 나지 않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질문해 보면 답이 쉽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 여러분도 한번 이 질문을 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 하시도록 하고, 나는 그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마태복음 16:2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9:2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송구영신예배 때 나눴던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에 구름을 머물러 있으면 자기들도 진을 치고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르면 그들은 출발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 믿음생활은 앞서 가시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순종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이 말씀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받았던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권면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믿음생활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신 발자국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보십시오. “He will clear the road for you to follow.” (CEV)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NIV) “He will guide you on the right paths.”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He will direct you and crown your efforts with success.” (Living Bible)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divine intervention’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연습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연습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제일 먼저 의식하는 연습을 하고,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을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때가 온다는 비전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다.” (이사야 11:9)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나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 찰 것이다.” (하박국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