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2018 | 사순절 9

하나님을 추구함 Pursuing God

마태복음 7:7-11

오늘 말씀은 아마도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구절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도 이 말씀이 유명하니까요. 오늘 말씀에 ‘기도’라는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금방 알아챕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7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기도해야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받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그리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이 기도에 대한 어떤 영감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항상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며칠 전에 했던 똑 같은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는데, 그리고 그것들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시고, 소통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과 관계를 설정하고 싶어하십니다. 얼마나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시면, 우리 생명을 창조하실 때 우리 속에 ‘영원 (eternity)’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놓으셨다 (전도서 3:11)”고 하셨겠습니까?

솔로몬이 그의 생애 말년에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온갖 부귀와 영화를 다 가졌지만,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생각한 끝에 발견했습니다. 이 공허함의 정체는 하나님과 단절될 소통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의 풍성하심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9-11절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너희 중에서 누가 돌을 주겠느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누가 뱀을 주겠느냐?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에게는 ‘아들 (9절)’이라는 말과 ‘좋은 것 (11절)’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좋은 것’이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what is good’ ‘good thing’ ‘good gifts’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이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나쁜 일을 하는 아빠도 있습니다. 그런 아빠도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어느 아버지가 돌을 주는 아버지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잘 몰라서 돌을 달라고 해도 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의 자녀들이 잘 몰라서 뱀을 달라고 해도 생선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맞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종 예레미야에게 똑 같은 말씀을 주시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려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y are plans for good and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future and a hope. In those days when you pray, I will listen. If you look for me wholeheartedly, you will find me. I will be found by you).”(예레미야 29:11-14)

예레미야가 살았던 시대는 국가의 운명이 암울한 때였습니다. 그는 끝내 조국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In those days when you pray, I will listen (그 때는 너희가 기도할 때 내가 들을 것이다)”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지금 유다 왕국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잠깐 그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겠지만, 결국에는 그의 백성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너희가 다시 나를 찾을 것이고, 나를 찾는 사람은 모두 내가 만나 주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더 말하지 않아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알아 듣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알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열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으면 정말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함 (The Pursuit of God)’이란 책인데, A. W. Tozer (1897-1963, 미국)가 쓴 책입니다. 기독교 고전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 (desire)이 있다. 그러나, 우리만 이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갈망은 하나님을 어떤 것보다 더 높이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려는 갈망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세상의 어떤 보화보다 더 소중 하게 여기신 다.”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라. 당신의 마음이 갈망하는 만큼 높이 날아 올라가라 (Refuse to be average. Let your heart soar as high as it will.”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하는 데드라인이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영혼은 평안해 지고, 우리의 신경은 긴장을 풀게 된다.” 모두 Tozer가 쓴 책에 나오는 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좋은 일은 하나님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복되고, 이것처럼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특별하게 합니다.

 

A. W. Tozer는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을 찾고자 하시는 갈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나의 계획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을 열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십시오. 구하는 사람은 받게 되고,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A. W. Tozer가 말한대로 결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되는 ‘평범한 사람들 (average people)’이 되지 마십시오.


2/22/2018 | 사순절 8

기도는 배워야 한다 Learning To Pray

요한복음 17:1-26

오늘 요한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 세가지 직책이 있다고 합니다. 왕으로서의 직책, 예언자로서의 직책,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직책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는 전 인류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한반 다시 들어 보십시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겠지만, 이 사람들은 계속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저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11, 20-21절)

“예수님의 기도가 참 크다, 예수님께서 큰 뜻을 품고 기도하셔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서 우리의 기도는 자기 문제 해결에 급급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기도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기 마련힙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생활이 쌓여지고, 우리의 기도가 성숙해지면, 자연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중보기도에 눈을 뜨게 되고, 온 세상을 품고 기도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몇 주 전에 설교 시간에 소개했던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Uchimura Kanzō, 1861-1930) 목사님 자꾸 생각납니다.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매사추세츠 애머스트에 있는 Amhurst College 재학 중에 그는 이런 마음을 품고 기도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의 비석에 이 글이 새겨 있다고 합니다. 큰 나무에 새가 깃들듯이,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재들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함석헌 선생, 김교신 선생 등 한국교계에 영향을 끼친 큰 인물들이 나왔습니다. 특이하게도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은 조선의 청년들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조국와 세계를 섬길 큰 인물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인물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를 해 봤자 결국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성공의 도구로 쓸 사람이 아니라, 조국과 세계를 섬길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여러분 중에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뜻을 품고 공부하고 큰 뜻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전체가 대화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말씀 전체가 예수님과 하나님이 간에 나눈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 드립니다만, 기도에 눈을 뜨고, 성숙한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화식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런 기도입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 누가 옆에서 이 기도를 들었더라면, 마치 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 계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친구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친한 친구 만나서 얘기하는데 무슨 격식이 필요한가요? 약속 장소로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마음에 부담이 가나요? 그렇게 부담이 간다면 정말 친한 친구는 아닙니다. 친한 친구는 만나도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담 없이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걱정, 나의 고민, 나의 관심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긴장해서 억양이 높아지고, 경직될 필요 없습니다. 멋있는 말을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미리 사전에 각본을 짤 필요도 없습니다.

아시지요? 성경에 모세를 칭찬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만,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a man speaks with his friend (하나님께서는 친구에게 말씀하시듯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1) 분명히 모세도 하나님을 그렇게 친근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친근하게 친구처럼 그렇게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데이빗 리빙스톤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교사이며 동시에 탐험가였습니다. 아프리카가 이 사람에게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가 죽은 것이 알려졌을 때 아프리카가 그를 위해서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침대 모퉁이에 기도하는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앞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의자에 마치 누가 앉아 있었던 것처럼, 리빙스톤은 의자에 앉아 있는 분에게 뭔가 얘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남김 없이 다 완수했다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자기 제자들을 지켜 달라는 내용입니다. 특히 자기 제자들에게 고난이 닥칠텐데, 고난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시고, 세상의 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의 제자들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분열되는 것은, 우리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분열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말 우리가,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 그런지 2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것은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2/21/2018 | 사순절 7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 Christ-centered Prayer

역대하 20:1-12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날은 “기도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가?”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제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를 하라” 이런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Christ-centered prayer’입니다. 혹은 ‘God-centered prayer’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드러나 있느냐,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크게 드러나 있느냐에 따라서 ‘God-centered prayer’가 되기도 하고 ‘Problem-centered prayer (문제 중심의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도에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이 크게 드러나 있고 문제는 작게 드러나 있으면 ‘Christ-centered, or God-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에 우리의 문제가 크게 드러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 있지 않으면 그 기도는 ‘problem-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힘써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도는 아니지만 ‘God-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의심의 여지 없이 ‘God-centered prayer’입니다. 연습 삼아 하나만 더 해 볼까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이 고백은 분명한 ‘Christ-centered prayer’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problem-centered prayer’가 아니라 ‘Christ or God cen-tered prayer’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금방 알아 듣습니다. “기도라고 해서 다 같은 기도가 아니구나! 앞으로 기도할 때 ‘God-centered or Christ-centered prayer’를 해야 하겠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Christ-centered or God-centered prayer’가 무엇인지 알아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역대하 20:1-12 말씀에 나오는 사람은 유대의 왕이었던 여호사밧이라는 사람입니다. 여호사밧은 35살에 왕이 되어 25 년 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열왕기상 22:42) 이 사람은 유대의 왕 중에 몇 안 되는 훌륭한 왕으로 평가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여호사밧에 대하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올바른 일을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에 그 조상 다윗처럼 살았습니다.” (역대하 17:3, 열왕기상 22:43) 여호사밧과 동시대 사람으로 북왕국의 아합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마온 사람과 함께 연합군을 편성해서 여호사밧에게 전쟁을 걸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사밧이 전쟁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연합군은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의 긴박했던 순간이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큰 군대가 사해 건너편에서 지금 왕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써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와 있습니다.” (2절) 이 소식을 들은 여호사밧은 두려웠습니다. 사람이 두려울 때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의 경우에는 위기의 순간에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칠 때 그 집이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 아니면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 하는 것이 드러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25, 27)

여호사밧은 어떤 행동을 보였습니까? “Jehoshaphat was terrified by this news and begged the LORD for guidance. He also ordered everyone in Judah to begin fasting. So people from all the towns of Judah came to Jerusalem to seek the LORD's help.” 야, 멋있지요? 여호사밧이 보인 이 행동이 저와 여러분이 보여야 할 행동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도 여호사밧처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하고, 위기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잖아요? 이럴 때 저와 여러분이 보여야 할 행동이 ‘God-centered action (하나님 중심의 행동)’입니다.

백성들을 모아 놓고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여호와께서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세계 모든 민족의 나라들을 다스리십니다. 주께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도 주 앞에 설 수 없습니다 (O LORD, God of our ancestors, you alone are the God who is in heaven. You are ruler of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You are powerful and mighty; no one can stand against you)!” 우리가 이 여호사밧의 기도를 이 새벽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여호사밧의 기도를 들으니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 적들이 연합군을 만들어서 쳐들어 오고 있는데, 지금 가슴이 뛰고, 숨이 차 오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지금 여호사밧의 기도를 듣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 누구도 감히 설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연합군이 쳐들어 오고 있지만, 그 연합군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God-centered prayer’입니다. 이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연합군의 침략이 아니잖아요?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입니다. “하나님,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연합군이 쳐 들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가까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린 다 죽습니다.” 이런 기도가 ‘problem-centered prayer’입니다. 두 기도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이고, 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기도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드 기도가 엄청나게 다른 기도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저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십시오.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이 큰 군대를 당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십시오. “O our God, won't you stop them? We are powerless against this mighty army that is about to attack us. We do not know what to do, but we are looking to you for help."

이 여호사밧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 군대가 아무리 크다 해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이 전쟁은 너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 너희는 이 전쟁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그저 너희의 장소에서 굳게 서 있기만 하여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역대하 20:15-17)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기도의 내용을 한번 바꿔 보세요. 기도할 때 기도의 초점을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문제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보세요. ‘problem-centered prayer’에서 ‘God-centered, or Christ-centered prayer’로 기도의 초점을 바꿔 보세요. 기도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2/20/2018 | 사순절 6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 Why Pray?

마태복음 6:9-15

여러분은 간혹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왜 기도해야 하지?”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기도는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교회를 거쳐 간 사람 중에 한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일년 안식년으로 와 있는 바람에 우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서울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꽤 유명한 교수였습니다. 부인은 방송국에서 스크립트를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남편은 교회를 나오지 않고요. 부인만 교회를 나왔는데, 이분이 새벽 기도를 나오는 것입니다. 올 때는 다른 분이 라이드를 주시고, 집에 돌아갈 때는 제가 라이드를 드렸습니다. 자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래요. “저 아마도 내일부터 새벽기도 못 나올 것 같아요 남편이 새벽기도 못 나가게 해요. 전 어쩌면 좋아요?” 그 말을 듣고 저도 난감했습니다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강하게 말하세요. 난 새벽기도 꼭 나가야 한다고요.” 그리고 내려 드렸는데, 그 다음 날 이 분이 새벽기도를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살며시 침대를 빠져 나오려고 하는데, 남편이 발목을 꽉 잡더랍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충분히 당신 힘으로 살 수 있어!”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남편 얼굴을 똑바로 보고 “당신이 내 인생 책임 질 수 있어?” 그랬더니, 남편이 “아니!” “그럼 나 새벽기도 나가는 것 막지 마!” 그래서 다시 새벽 기도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까? 그 서울대학 교수는 기도는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꼭 그들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성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삶의 공허함 (the emptiness of life)’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허함을 하나님께서 채워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도서 3: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우리 마음 속에 심겨진 ‘eternity’가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 혹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a point of contact’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막히면 우리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소통의 채널이 열리면 우리는 ‘충만함’을 느낍니다.

또,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합니까? 과거 어느 때도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 직장을 찾아 헤맵니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어려운 공부를 마쳐도 나를 환영하는 곳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uncer¬tainty)’이 이처럼 우리를 힘들게 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전도서 3:11에 있는 말씀을 계속 읽어 보세요.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사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뜻이잖아요? 지금 우리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시대의 ‘불확실성’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우리에게 삶의 충만함을 얻게 하고,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불안을 이기고, 초조함을 이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마태복음 6장 본문 말씀을 볼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9-10절)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한번 돌아 보십시오. 살기 바쁩니다. 조금만큼도 마음의 여유들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수업 듣고 페이퍼 쓰고, 숙제하기 바쁩니다.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이들 기르고, 가사 일을 하기에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여러분의 마음을 집중하고 이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고 하시면서 삶에 찌들어 있고, 불안하고, 초조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삶의 focus’를 옮겨 주십니다. 맞습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를 이기게 합니다. 불안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 다음으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1절)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니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먹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삽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요? 굶어야지요. 돈을 못 벌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기도는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필요한 것이 없는 상황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God’s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하심)’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intervention’이 있으면 단번에 상황이 역전(逆轉)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두 번 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12-13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죄의 고백,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시는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죄를 범했을 때, 죄의식으로 괴로워할 때,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나를 받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1:9) 기도를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2/19/2018 | 사순절 5

기도의 우선순위 The Priority of Prayer

마태복음 6:5-8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위선자’입니다. ‘히포크리트 (hypocrite)’라는 말이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연기하는 배우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각본에 있는 사람 역할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위선자’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5절). 기도를 ‘위선자’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곳에서 합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하지 않아요? 이 사람들이 받은 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칭찬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입니다. “아이고, 기도 많이 하시네요.” “축복 받으셨어요.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안 돼요.” 이런 사람들의 칭찬입니다.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반대로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내가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받을 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받을 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사람들이 보는 장소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6절)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도,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은 다 아시고 모두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7절). 기도가 좀 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짧으면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늘어 놓는 사람은 ‘이방인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잖아요?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이방인’이 잖아요.

예수님은 ‘이방인들’ 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을 닮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Don't be like them, for your Father knows exactly what you need even before you ask him!” (NLT) 그럼 왜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데,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합니까? 이 말씀에 대한 대답이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기도의 우선 순위 (The Priority of Prayer)’입니다.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기도하면, 기도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알고 기도하면 기도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위선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이길래 사람들이 많이 보는 장소에서 기도하고 (5절), 어떤 사람들이길래 기도하면서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늘어 놓고 ‘이방인들’ 같이 기도한다고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까 (7절)? 이 ‘위선자들’이 어떤 사람들이길래 예수님께서 그들을 닮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8절)?

좀 더 쉽게 말해 볼까요? 제가 누구하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속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동안이나 저하고 시간을 내서 얘기를 나누었지만, 모두 피상적인 얘기,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얘기를 늘어 놓은 것입니다. 이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생기지 않습니다. ‘relationship’이 생기지 않습니다. 관계는 인격과 인격이 서로 만나야 그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시는 포인트는 “너희들 하나님 앞에서 진심을 감추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를 원하신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와 진실한 관계를 원하시나요?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진실한 relationship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관계를 싫어하십니다. 보세요. 잠언 15:2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멀리하시나, 의인의 기도는 들으신다 (The Lord is far from the wicked, but he hears the prayers of the righteous).” 쉬운 말씀 같지만 결코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악인이 누구이고, 의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의인’이라고 해서 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 마음이 선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성경은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은 멀리하십니다. 악인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의인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는 우리는, 이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께 의인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일을 무엇보다 먼저해야 합니다. 무작정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의인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말씀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Don’t tear your clothing in your grief, but tear your hearts instead.” Return to the Lord your God, for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요엘 2:13) 옷을 찢는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는 표현으로 옷을 찢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사람의 마음에는 회개하지 않은 죄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해야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자녀들과의 진실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 관계가 설정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남겨 놨던 질문 하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아시고 계시는데, 왜 기도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은 왜 친한 사람과 만나서 얘기하고, 커피 마시고, 영화도 보고, 볼링도 치고 같이 시간을 보내나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예,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쌓입니다. 관계는 쌓이는 것입니다. 한번 관계가 생겼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면 그 관계가 약해집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는 계속해서 쌓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나요? 아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신다면서 왜 기도하라고 하시나요? 기도를 통해서 우리와 관계를 쌓아 가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쪽에서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아 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관계를 쌓아 가기를 원하십니다. 관계는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노력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