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022 |

눈을 주님께 돌려(V) Turn Your Eyes Upon Jesus

고린도후서 2:12-17

제가 클레아몬트(Claremont) 신학교에 다닐 때, 그 때가 1984-1986년경이었습니다. 그 때 목회학 클래스를 한 과목 들었습니다. 그 클래스에서 사용했던 책이 ‘The Reformed Pastor(1656)’라는 책이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영국)라는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가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에 ‘reformed’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이 ‘reformed’라는 말은 ‘Reformed Theology(개혁주의 신학)’라는 의미입니다. 목사는 누구인가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목사의 사명과 역할은 무엇인지 정말 잘 쓴,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책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사를 하면서 그동안 소장했던 책을 거의 대부분 버렸습니다. 엄청난 양의 책을 직접 쓰레기 하차장에 가져가서 버렸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리차드 백스터의 책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아이쿠, 버렸나 보다” 하고 실망했었는데, 다시 찬찬히 찾아보니 책꽂이 한쪽에 잘 꽂혀 있더라고요. 그만큼 이 책은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입니다.

누가 언제 붙였는지 모르지만,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를 ‘pastor’라고 합니다. ‘pastor’는 목장에서 ‘양을 치는 목자(shepherd)’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pastor’라는 말에는 ‘a person who leads to pasture(초장으로 인도하는 사람)’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인들을 ‘목사와 평신도’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양(牧羊)’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자연히 목사 사무실을 ‘목양실’이라고 하는 것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인들을 목사와 평신도로 구별하는 것은 목사들에게 엄청난 특권의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양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앞에 가는 목자를 따라가듯이, 목사는 교인들을 앞에서 이끌어가는 사람이고, 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생각은 새 시대가 요구하는 크리스천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둘째로, 참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 요한복음 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는 목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목사들에게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리차드 백스터 역시 ‘pastor’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사람 같으면 ‘pastor’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책상에 앉아 책만 쓴 사람이 아니라 교인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을 교인들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200여권의 책을 쓴 경이로운 인물입니다.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쓴 “Knowing God(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저자 J.I. Packer는 리차드 백스터를 진정한 성자이며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칭송했습니다.

현재 카톨릭 교황은 266대 ‘프랜시스(Francis, 1936-현재, 아르헨티나)’ 교황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입니다. 교황으로 부임하면 이름을 바꾸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 분은 평소에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았던 ‘프랜시스(Francis of Assis, 1181-1226, 이탈리아)’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프랜시스’로 바꾼 것입니다. 이 분은 부임 초기부터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녔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말과 행동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프랜시스 교황이 2014년 8월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도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교황이 한국 방문을 거의 마칠 무렵에 카톨릭 성직자들이 모인 자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Be shepherds with the smell of your sheep).”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황이 여전히 목자와 양이라는 전통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사역자들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말을 사역자들이 양들과 대화하고, 양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양들과 공감하면서 양들의 삶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사역자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의 몸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야 할까?” 당연히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야 할까요? 다행하게도 오늘 성경 본문 말씀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15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Our lives are a Christ-like fragrance rising up to God(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올라가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또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Now he uses us to spread the knowledge of Christ everywhere, like a sweet perfume(하나님은 향기로운 향수와 같이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파하도록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편지를 어떤 상황에서 쓰고 있는지 아시나요? 한번 오늘 말씀을 찬찬히 읽어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 주님께서 내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나는 그곳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났습니다.” (12-13절) 이 말씀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3차 전도여행은 2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다시 따라가면서 교회들을 방문하는 식이었습니다. 드로아(Troas)는 바울이 꿈에 마케도니아 땅에 대한 환상을 보았던 곳입니다. 그는 이 환상을 따라 에게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별 감동 없이 읽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이 기독교 국가들이 된 데에는 2,000년 전에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에게 바다를 건너갔던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에서 볼 때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A Christian historian said that the ship that carried the Apostle Paul carried the history of the world in it. Arnold Toynbee said in his ‘A Study of History’ that,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한 기독교 역사가는 사도 바울을 태웠던 그 배는 그 배 안에 세계 역사를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작은 목선이 소아시아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을 태웠을 때, 세계의 중심은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Our Daily Bread, 9/11/2011)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기분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뭔가 알 수 없는 우주적인 기운을 이 말씀에서 느꼈습니다.

지금 바울은 두 번째로 빌립보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도시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을 걸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벌써 2,000년 전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는지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교회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전도훈련을 받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지구촌교회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폭발 훈련 마지막 날, 전도폭발이라는 전도법을 만든 제임스 케네디(D. James Kennedy, 1930-2007) 목사님의 설교를 영상으로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에 이런 감동적인 예화가 나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투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도망병이 잡혀오면 가차 없이 공개 처형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도망치다가 붙잡혀 알렉산더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보니 파란 눈에 너무 앳되고 불쌍해 보여 죽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어린 병사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애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알렉산더는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라고?” 겁에 질린 병사는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이 자기와 이름이 똑 같았던 것입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가 다시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라고?” 놀란 병사가 “알렉산더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자 알렉산더는 그 병사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이 놈아,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의 태도를 바꿔라!”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를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이름이 무엇이냐?’ 그 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 이름은 무엇이냐?’ ‘크리스천입니다.’ ‘너희 이름은 무엇이냐?’ ‘예, 크리스천입니다.’ 우리의 대답에 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그의 아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희 삶을 바꿔라!’” 이렇게 소리지르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세상의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고 세상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적고 세상과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세상의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양들과 함께 지내야 우리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Merriam Webster 사전에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말에 대한 이런 정의가 나옵니다. ‘one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 of Jesus(예수의 교훈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간결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믿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송하지만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전을 찾아보다가 놀란 것은 ‘Christian’이라는 말이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treating people in a kind or generous way(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하는)’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전을 찾아봤더니, 형용사로 사용될 때 ‘decent(품위 있는)’ ‘respectable(존경할 만한)’ 이런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세요? 사도행전 11:26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속에 조롱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일년동안 열심히 섬긴 결과 안디옥 시민들의 눈에 비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관대하고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성서학자들 중에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유래를 그리스어 ‘카리스(χάρις)’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매력(attractiveness)’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결단의 시간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버리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올바로 살든지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뉴잉글랜드의 4월은 바람이 많이 불고 춥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 멀리 퍼져 나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황을 핑계대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풍성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 이 말씀에서 ‘보화’는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질그릇(clay jar)이 깨지면 오히려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이 더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 강렬하게, 더 멀리 전파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24/2022 |

눈을 주님께 돌려(IV) Turn Your Eyes Upon Jesus

빌립보서 3:7-11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무렵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까지는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자기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2-4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내가 여러분에게 전파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Amplified Bible에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By this faith you are saved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and set apart for His purpose], if you hold firmly to the word which I preached to you, unless you believed in vain [just superficially and without complete commitment]. 3For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4and that He was buried, and that He was [bodily]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For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누구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 받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 때 전도자들이 주고받았던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케리그마(κήρυγμα)’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 ‘케리그마’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설교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부활’에 대한 주제를 피하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1세기의 전도자(사도들)은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세기 크리스천들에게 ‘부활’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facts)’이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수많은 증언자들이 있었습니다. 법정에서는 확실한 증인 두 세사람만 있어도 그들의 증언은 그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을 때요. 이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도 모두 멀리 서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함께 온 여자들이 요셉을 뒤따라 가서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어떻게 누워 있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고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었습니다.” (누가복음 23:49, 55-56, 마태복음 27:55, 마가복음 15:47) 이 여자들이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무덤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 놓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걱정했습니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 주지요(Who will roll away the stone for us from the entrance to the tomb)?” (마가복음 16:3) 그런데, 막상 가 보니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서 있었고(마태복음 28:4),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옆으로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느냐?” (누가복음 24:5-7)

여러분, 그 때 이 여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여자들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자들은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무서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The women fled from the tomb, trembling and bewildered, and they said nothing to anyone because they were too frightened).” (마가복음 16:8) 하지만,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여자들이 그 길로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렸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8).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누가는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요한은 여자들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무덤 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달려갔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요한복음 20:3-4) 정말 여자들의 말 대로 무덤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20:9)”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이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확실한 믿음으로 자리를 잡았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 때 당시에 유대사회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많은 루머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루머가 돌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8:11-15). 새벽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루머도 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는 소문도 그 때 나온 루머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루머들이 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강력한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진실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단순히 말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 보여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고, 그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꼭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십자가에서 끝나면 안 됩니까?”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나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인간의 족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He was declared to be the Son of God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is Jesus Christ our Lord).” (로마서 1:4)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니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들로 판명될 것입니다(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then all our preaching is useless, and your faith is useless, and then we are found to be false witnesses about God, 고린도전서 15:14-15)”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톰 라이트(N.T. Wright)의 말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의 말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을 목숨 아닌가?” 이런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삽니다(고린도전서 15:32).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temporary residents(일시적인 체류자, 베드로전서 2:11)’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citizenship(시민권, 빌립보서 3:20)’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삶의 방식이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오늘 빌립보서 본문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한 후에 그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완전한 변화가 그의 삶 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의 삶이 가능할까요?

고린도전서 12:3에 “예수님은 주님이시다(Jesus is Lord)”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 말로 “Κυριος ΙΗΣΟΥΣ”라고 합니다. 이 말은 1세기 크리스천들이 사용하던 일상적인 말입니다. ‘Κυριος’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lord, master, chief, ruler, owner’라는 뜻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Κυριος’라는 말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arly Christians confessed Jesus Christ as their Kyrios instead of the emperor(초대 크리스천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Kyrios로 고백했다).” 그 당시에 황제를 ‘Kyrios’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Kyrios’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Kyrios’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사는데 어떻게 삶이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1세기의 크리스천들에게는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에게나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Kyrios)’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Kyrios’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주인이 되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변화의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10절) 

‘부활의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처럼,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삶의 문제들을 이기는 것입니다. 로버트 플래트(Robert Fla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resurrection gives my life meaning and direction and the opportunity to start over no matter what my circumstances(예수님의 부활은 내 삶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고, 어떤 상황에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여러분,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이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I want to suffer with him, sharing in his death)” (10절)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힘들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나는 날마다 죽습니다(I face death daily in Christ Jesus)” (고린도전서 15:31) 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을까요? 날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4/17/2022 | 부활절 메시지

눈을 주님께 돌려(III) Turn Your Eyes Upon Jesus

요한복음 12:20-26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을 영어로 ‘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레저렉션(resurrectio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셨다(re+surge)’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크리스천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foundation)와 같습니다. 이 말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크리스천의 삶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언제, 어떤 인생의 위기를 만나 무너질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확장되던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을 가리켜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사도행전 9: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는 하나님의 도구(instrument)로써 그의 인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We are more to be pitied than anyone in the world).” (고린도전서 15:14, 19) 이 말씀이 맞습니까? 

부활에 대하여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Our Lord has written the promise of resurrection, not in the books alone, but in every leaf in springtim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봄이 되면 죽었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파란 잎이 돋아나는 자연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톰 라이트(N. T. Wright, 1948-presen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essage of Easter is that God's new world has been unveiled in Jesus Christ and that you're now invited to belong to it(부활절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새로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고, 당신은 그 새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앞에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몰랐을 때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후에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 인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본회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기 4개월 전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갇혀 있던 수용소에 연합군이 들어오기 불과 며칠 전에 교수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본회퍼의 전기(傳記)를 읽어보면 그의 사형을 집행했던 간수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다.” 본회퍼는 교수형을 받기 위해 끌려 나가면서 같이 갇혀 있던 동료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Good-bye. It is the end, but for me, beginning of life(안녕히 계세요.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의 묘비에는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Dietrich Bonhoeffer, a witness of Jesus Christ among his brethren)”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절 설교가 공식적으로 저의 마지막 부활절 설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성경 본문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 내용을 구상합니다. 제가 오늘 선정한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12:20-26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가장 잘 나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여러분의 삶은 진작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The Passover)’입니다. 이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이스라엘 내국인들과 해외에 나가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리고 이 축제를 구경하러 온 외국인들로 예루살렘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그리스’ 사람들도 유월절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순수한 그리스 사람들(Greeks)같아 보입니다. 말씀의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직접 질문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온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들의 질문에 대한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추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22-23) 이 말씀 속에 ‘유대인’ ‘그리스인’ 그리고 ‘크리스천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합니다. ‘표적(表迹)’은 ‘miraculous signs’이라고 번역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복음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말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당신이 표적을 보여주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 ‘지혜’라는 말을 영어로 ‘wisdom’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 말로는 ‘소피아(Sophia)’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하잖아요?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을 ‘philosopher’라고 하잖아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부터 지혜를 사랑했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모두 그리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소크라테스(470-399B.C.), 플라톤(428-348B.C.),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 피타고라스(570-495B.C.) 등이 모두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선교를 가서 가장 놀랐던 것이 아네테 시민들이 날마다 광장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만난 사람들 중에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에피큐리안들과 스토익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 이미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생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All the Athenians seemed to spend all their time discussing the latest ideas).” (사도행전 17:21)

예수님을 만나러 온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새로운 지식이나 새로운 사상을 배우기 위해 온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유대나라에 지혜로운 랍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유월절 명절도 구경할 겸 예루살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알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24절)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해 줄 말은 이 말 밖에 없다. 너희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해 준 말 속에 너희들이 찾는 지혜가 모두 들어 있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I tell you the truth)”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꼭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경연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부상(副賞)으로 책을 받았는데, 그 책 제목이 “The Seed Must Die(씨는 죽어야 한다)”였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한국의 손양원(1902-1950)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목사님 중 한 분이신데요. 손양원 목사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정말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진 분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의 별명이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어떻게 양아들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 양아들이 목사가 되어서 지금 L.A.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인터뷰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최근에 ‘니콜라스 윈턴(Nicholas Winton, 1909-2015, 영국)’을 주인공으로 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체코를 점령한 나치는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난민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아이들까지 갇힌 난민 수용소의 실상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당시 29살의 은행원이었던 ‘니콜라스 윈턴’은 아이들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목숨을 내놓고 사비를 들여 아이들을 영국으로 빼돌려 입양을 시킵니다. 나치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이 일을 성사시켜 총 8번에 걸쳐 아이들을 기차에 실어 영국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빼돌린 아이들이 무려 669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번, 막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250명의 아이들을 싣고 가던 기차가 멈추게 되고, 안타깝게도 그 아이들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를 모르게 됩니다. ‘니콜라스 윈턴’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껴 그 후 50년 동안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락을 정리하던 그의 아내가 오래 묵은 그의 수첩을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빼곡하게 그가 빼돌려 목숨을 구해 준 669명의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내는 방송국에 제보를 합니다. 그래서 ‘니콜라스 윈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눈물과 감동 없이는 볼 수 없는 영상입니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idzS-K1LrPc)

놀라운 것은, 그가 구출한 669명의 아이들이 6,000여명의 아이들로 불어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 아닙니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5-26절)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아테네 광장에서 날마다 토론을 일삼던 말씀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어떻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몹시 궁금합니다.

철학은 아무리 그 내용이 심오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철학책을 읽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철학은 사람이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바울은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했습니다.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Don't let anyone capture you with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 that come from human thinking and from the spiritual powers of this world, rather than from Christ).” (골로새서 2:8) 기독교의 복음과 비교해 보면 철학은 그야말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입니다. 바울이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성경은 그 자리를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이라고 했습니다. 본회퍼도, 손양원 목사님도, 니콜라스 윈턴도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았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 희생과 헌신을 거부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특별한 생각 없이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런 삶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다시 톰 라이트의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새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도록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세상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4/10/2022 | 종려주일

사랑, 그 좁은 길 Love, the Narrow Path

빌립보서 2:6-11

‘사랑 그 좁은 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종려주일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 일상에서 무너졌던 우리의 감정과 마음이 예배 안에서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2019년 12월 1일에 바로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의 성가대 찬양이 ‘날 새롭게 하소서’라는 찬양이었습니다. “나 세상 살아갈 때에 한치 앞길도 보이지 않고 주저 앉은 채 눈물 흘릴 때 주님 날 만져 주시네” “내 십자가 지고 주 따릅니다 날 새롭게 하소서” 그날의 성가대의 아름다운 선율과 은혜의 가사가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 같아서 뭉클했던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6절로 8절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진정한 집을 떠나서 우리를 위해 성육신 하셨지요. 땅에서는 부모의 집으로부터 떨어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애를 보면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셨지요 (눅 9:58) 그리고 마침내 성문 바깥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9절로 11절에 보면 낮아지심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본문의 구조는 낮아짐과 높아짐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본문의 구절에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순종하심과 하나님의 행하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독교 용어로 케노시스 (헬라어: κενοσις; 영어: kenosis) 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케노시스의 삶은 참으로 좁은 길입니다. 인간 편에서 도무지 오를 수 없는 높은 길입니다. 지구상의 가장 돈이 많은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이것을 살 수 없으며, 권력을 지닌 사람도 오를 수 없는 길입니다.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머물 때에 우리를 영광의 길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저에게는 소중한 기도의 흔적이 담긴 물건 하나가 있습니다. 장인 어른께서 수술실로 들어 가시기 전에 손에 쥐고 계셨던 십자가입니다. 믿음으로 사셨던 아버님이 남겨주신 기도의 선물인데 이 십자가는 저를 진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는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까? 본문 6절로 8절은 예수님의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의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모두가 높아지려고 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더 좋은 것을 이야기하고 더 풍요로운 것을 따르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라 하는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안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위대하심을 겸손한 자들을 통해 드러내시지요.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내려놓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주님께 하듯 하는 믿음의 태도가 주님 안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며 위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내고 싶은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부인하고 외면하며 그리스도의 지식을 채워갈 수는 없지요. 복음을 위한 고난을 외면한 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 내야 하는 이 십자가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함으로 이겨낸 성도들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게 되면 피어나는 꽃들이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핍박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하심 너머의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10)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만나고 세상의 파도에 밀릴 때마다 구주의 십자가를 돛대 삼아야 합니다. 그 파도를 예수님의 물과 피로 한번 여겨 보십시오. 복음을 위한 영광된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에 거룩함을 향한 무뎌진 감각이 회복되고 허망한 기대와 텅 빈 영광은 하늘의 소망으로 채워지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은 힘들고 버거운 고난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고난 중에도 우리가 믿음 안에 머무를 때에 십자가가 삶의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머리로 믿어지는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A.D. 2022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분기점을 B.C.와 A.D.나눕니다.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A.D.는 '안노 도미나이 (Anno Domini)인데요. 이는 라틴어입니다. 안노 (Anno)라고 하는 말은 '한 해 : year'라는 의미입니다. 도미나이 (Domini)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님 : of our Lord' 라고 하는 뜻입니다. 즉, in the year of our Lord, ‘주님이 다스리는 해’ 이것이 A.D.입니다. 그러니까 A.D 2022년은 주가 다스리는 해가 1세기부터 21세기로 확장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걷는 이들에게 주님의 통치하는 나라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삶의 모든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에 대한 두 죄수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처형하는데 가담한 군인들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강제한 유대 지도자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이때 한 죄수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의 기도를 들으며 더욱 비방하며 포악해졌습니다. 죄수의 입장에선 스스로 원망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향해서 너와 나를 구원해 보라고 했겠지요. 이 죄수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에 반응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편 죄수의 고백은 달랐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과 그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이때 평생 자신을 붙들고 있던 원망과 쓴 뿌리가 녹고 그 순간에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이 죄수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자기 곁에서 죽어 가며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뜬 이 사람에게 주님은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절대 소수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무심히 어제와 같은 일상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알아본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상황에도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과거의 인식과 상처로부터 새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삶과 이별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매일의 새로운 삶을 허락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십자가 사랑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생명의 힘이기에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지요. 다시 일어서는 힘이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위기라고 하지요.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도 손을 놓지 않고 서로를 지탱해 주는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면 우리가 잡은 손이 위기를 이겨낼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조를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도전이 있을까요? 첫째는 다원주의의 도전입니다. 진리의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니 서로의 길을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것인데, 이는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지극히 겸손해야 합니다.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어떤 종교에도 없는 유일한 것이며, 그분의 속죄하심도 유일한 것이며, 그분의 부활하심도 유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세상에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겸손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두번째 도전은 물질주의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물질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 보아도 물질 세계의 질서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인간의 탐심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아닙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물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관대하게 사용하고 검소하게 자족하는 방식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욥1:21) 우리는 모두가 태어나고 돌아가는 두 사이의 짧은 순례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번째 도전은 윤리적 상대주의입니다. 이 시대는 상대주의가 문화를 잠식했고 교회 안에도 침투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 기준에 대해서 이제 혼란스러워합니다. 이러한 시대 풍조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경적인 원리를 삶에 적용하고, 우리의 행동의 토대가 예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백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삶은 인생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이지요. 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 외에도 그리스도인에게 참 많은 도전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세상 풍조에 맞서기 위해서 성도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 4:13) 아멘! 본문의 말씀 9절로 11절에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나타납니다. 낮아지심으로 순종한 그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마음을 모른 채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허망한 기대에 차 있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나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인(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중심 없는 마음과 갈증을 잃어버린 예배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갈망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예배 드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와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머문 자리에는 예수님의 이름만이 남아야 하겠지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그것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일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에 나의 선택과 말과 행동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도시는 수도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로마를 위해 싸웠던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관습과 법을 따르며 로마의 특권을 누렸고,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이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당시에 빌립보 교회에는 다툼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섬기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저희 둘째가 뱃속에 있었을 때 아내가 하혈이 심해져서 몇차례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의사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할 수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권하더군요. 모든 결정은 저희 부부의 몫이었지만 생명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지켜 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비록 과정이 힘들기는 했지만 둘째는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6개월때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모유도 이유식도 입에 대지 못하고 계속 힘들어하더라구요.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외국에서 출산을 하고 모든 게 낯설었던 그때 아내와 저는 너무 무섭고 두려웠지요. 여러 명의 의사가 차례대로 와서 아이의 상태를 점검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지친 아이는 점점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고 의사들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한다며 수술 동의서를 가지고 오더군요.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담당 의사가 지금까지 응급환자 중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순간 아이가 고개를 떨구고 숨이 멈추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는데 처음 경험한 그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발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내는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며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삶을 전부 희생하게 되는 것 같아 무서워서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내어드리겠다는 기도를 망설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의 고백이고 순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무거운 짐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고 의료진들이 급박하게 상황을 대면하는 것을 보니까 바로 무릎이 꿇어지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이 살려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면서도 깨어나지 못할까 봐서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세상의 것 구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 구하며 살아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부부의 동일한 기도가 간절히 드려지고 나니 차가워진 아이의 손과 하얗던 얼굴과 몸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며 목에 있던 피고름이 터져 나오고 아이가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희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부부의 온전한 고백을 기다리신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소중한 생명의 무게 앞에 서 보니 세상의 성공도 부함도 명예도 모래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의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은 유익없이 슬픔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일하십니다. 그 둘째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고 가끔 저에게 어떤 목사가 되어야하는지 가감 없는 조언을 해주기도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 앞에서 나의 순종을 기다리셨던 주님은 기댈 곳 없던 캐나다에서의 삶에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4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초기 기독 교회는 세례 받을 사람이 성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을 하고, 토요일 저녁에는 철야 기도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주일날에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처럼 생명의 물이 되신 주님과 함께 세례를 통해 마음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는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씨가 심겨 지는 것이고, 부활의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구원을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대표적인 지도자 카프리안(Cyprian)은 ‘거듭남의 물로 이전 삶의 얼룩이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위로부터 임하는 고요하고 순결한 빛이 하나님과 화해한 나의 마음 가운데 스며들었다.’ Cyprian, Ad Donatum4 라고 고백합니다. 세례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고백하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보여지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늘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여지는 것 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형편과 생활이 나아지면 편해질 수는 있지요. 그러나 인간의 실존은 나그네이기에 행복할 때도 불안해하는 불완전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지요.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옥중에서 기쁨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하심이 그의 공허했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영혼의 뜨거운 울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매년 고난주간에만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십자가 지고 주 따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우리의 삶에서 깨닫게 되면 고난의 그 끝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 내야 하는 외로움. 희망이 사라지고 소망이 사라졌을 때의 곤고함. 실패한 것 같아서 무너지고 깨어지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고백하셨던 주님의 그 음성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어둔 터널을 만나게 될 때 그 때에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감당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훈련이 없으면 단단한 믿음의 근육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연단이 없으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변함없이 기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 땅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내 영혼이 안전하기 원합니다. 좁은 길을 모두가 피해갈 때에 예수님이 걸어가신 좁을 길을 따라갑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믿음으로 통과합시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교회와 믿음의 공동체가 ‘사랑, 그 좁은 길’을 함께 걷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4/3/2022 | 사순절 다섯째 주일

눈을 주님께 돌려(II) Turn Your Eyes Upon Jesus

히브리서 12:1-11

오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We do this by keeping our eyes on Jesus, the champion who initiates and perfects our faith).” (2절) 또 3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고,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시대에 제사장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믿음생활 했는지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마가복음 7: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 29:13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시대이면 기원전 약 500-600년 전쯤 되거든요? 그 때 예배가 극도로 형식화되어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배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예배를 비판하시면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farce(우리 성경에 ‘헛되이 내게 예배 드리고’라고 나와 있음)’라는 말은 짧은 ‘소극(笑劇)’ ‘웃기는 연극’ 혹은 ‘코미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farce’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그 시대의 예배를 ‘코미디’라고 비판하셨을까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자들이 하나님과 아무 인격적(人格的)인 관계가 없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입에서는 “주여, 주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미안하지만) 난 너희가 누구인지 모른다(마태복음 7:7)”고 말씀하신다면, 이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the originator, the champion, the initiator and the perfecter of our faith’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요한복음 4:24)”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우리의 원대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라(마가복음 14:36)”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받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난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실존적(實存的)인 문제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고난의 때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받는 중에 당황스러워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Dear friends, don't be surprised at the fiery trials you are going through, as if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Instead, be very glad - for these trials make you partners with Christ in his suffering.” (베드로전서 4:12-13)

고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베드로는 고국을 떠나 타국에 와서 온갖 생존(生存)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겪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야단을 떨지 말라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당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예수님의 ‘파트너(partners)’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주님의 제자들의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맞습니까? 우리에게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을 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the followers of Christ)’이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는데, 우리가 고난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의 때에 예수님처럼 그 고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아내야 한다고 합니다(2절). 예수님이 고난을 참아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기쁨을 기대하셨기 때문이라(Because of the joy awaiting him,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2절)”고 합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Jesus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앞에 차려 있는 기쁨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와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endure’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무작정 견디는 것이 아니라 ‘for the joy set before them(그들 앞에 놓여 있는, 혹은 차려 있는 기쁨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도 바로 ‘그 기쁨(the joy)’을 위하여 주어진 고난을 참고 견디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그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 기쁨’이 무엇이길래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 참으셨을까요?

한자성어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생이 다하면 좋은 일이 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성공, 출세, 이런 것들입니다. 다분히 물질 지향적(志向的)인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기대하셨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C.S 루이스(C.S. Lewis, 1898-1963, 영국)가 쓴 책 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년)’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참급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는 이제 막 악마생활을 시작한 조카 ‘웜우드’에게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 자신이 평생 터득한 노하우를 전수해 줍니다. 그 노하우 중에 기쁨과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쿠르테이프’는 인간에게 ‘기쁨’이라는 감정 대신 쾌락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쁨과 쾌락, 이 비슷하게 보이는 두 감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기쁨’은 친밀하면서도 진실한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이에 반해 쾌락은 은밀한 습관 혹은 중독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감정입니다. 막 걸음마를 배워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기쁨일까요? 쾌락일까요? 기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은 무슨 기쁨일까요?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희생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 놓여 있는 무슨 ‘기쁨’을 보았을까요?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의 회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29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오래 전부터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아들과 같이 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아들이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쁨’은 자신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많은 형제와 자매를 얻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고 견디신 것입니다.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아직 죽을 정도까지 싸워 보지는 않았습니다.” (3-4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지치고 낙심될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들보다 더 큰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견디신 분이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참고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Jason Ever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Jesus didn’t suffer so we wouldn’t have to suffer. He suffered, so that we would know how to suffer(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고난 받은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단하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간단한 말이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반대로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지만, 우리는 고난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요. 

크리스천의 고난에 대하여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No healthy Christian ever chooses suffering. He chooses God’s will as Jesus did whether it means suffering or not (어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이라도 고난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고난을 의미하든 의미하지 않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뿐입니다).” 또 뉴욕에 있는 ‘리디머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는 팀 켈러(Tim Keller) 목사의 말도 한번 들어보시죠. “Jesus Christ did not suffer so that you would not suffer. He suffered so that when you suffer, you’ll become more like him. The gospel does not promise you better life circumstances; it promises you a better life(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음으로써 더욱 자기와 닮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복음은 당신에게 좋은 삶의 환경을 약속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삶을 약속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면 훈계를 받게 마련입니다...... 훈계를 받는 바로 그 때에는 즐거움이 없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훈계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올바른 길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7-8, 11절)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을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discipline’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훈련(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요즘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점점 ‘discipline’이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여러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discipline’을 거부하는 이 시대의 풍조(風潮, fashion)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풍조에 알게 모르게 우리가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본회퍼의 말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값싼 은혜란 회개와 세례, 그리고 교회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 용서의 설교, 그리고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을 말한다).” 본회퍼는 이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것이 결국 교회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without church discipline(교회 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이란 말이 눈에 띕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들어 보세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