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2022 | 시편 119편(X)

새벽에 주께 부르짖습니다 Early At Dawn, I Cry For Help

시편 119:145-160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열 아홉 번째 자음 [코프(Qoph)]로 시작하는 여덟 절, 스무 번째 자음 [레쉬(Resh)]로 시작하는 여덟 절, 모두 16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저자는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저자가 자기 자신의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기 시대에 대해 절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자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 눈에서 눈물이 홍수같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는 주의 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Rivers of tears gush from my eyes because people disobey your instructions).” (136절) 오늘 본문 말씀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신실하지 않은 자들을 보고 분노합니다. 이는 그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Seeing these traitors makes me sick at heart, because they care nothing for your word).” (158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시대를 향한 저자의 아픔과 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치가 존중되고 있습니까? 교회들이 이 시대의 풍조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전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세상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이 시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제일 제 마음에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147절 말씀입니다. “내가 새벽 이전에 일어나 도움을 요청하며 울부짖습니다. 나는 나의 소망을 주님의 말씀에 두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rise early, before the sun is up; I cry out for help and put my hope in your words.”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대한 키워드 세 개가 있습니다. 기도(prayer)와 금식(fasting)과 자선(almsgiving)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간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주님과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와 금식과 자선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 왜 주님과 가까워지게 될까요? 금식은 식욕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 중의 하나인 식욕을 절제함으로써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선을 하면 왜 주님과 더 가까워질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자선은 나만 바라보던 시선을 자기 밖의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생각하고 채워 줌으로써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야고보서 4:8)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은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지금 사순절 새벽기도가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참가한 교우들의 이름을 보면서 기도하는 것은 저에게는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요. 새벽에 기도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아무 때나 기도하라는 말씀도 있긴 있어요. 에베소서 6: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Pray in the Spirit at all times and on every occasion. Stay alert and be persistent in your prayers for all believers everywhere).” ‘무시로’라는 말은 ‘때를 가리지 말고 아무 때나(at all times)’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새벽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언제, 어디서 기도하셨는지 알아보는 것은 즐겁고 의미있는 일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Before daybreak the next morning, Jesus got up and went out to an isolated place to pray)” (마가복음 1:35) 새벽 ‘미명(未明)’이라고 했으니까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어두컴컴한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an isolated place)’을 찾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때 그런 장소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을 대면하기에 제일 좋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간이 예수님께서 사역에 필요한 힘을 공급받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은 자기를 반성하는 기도를 드렸고, 사역의 방향을 점검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기도 시간을 통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사역을 점검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한 사람이 자기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를 사전에 예수님께 알려주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고 피신하라고 했습니다(누가복음 13:31).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은, 바로 기도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많은 시편 저자들이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患難)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Each morning I will sing with joy about your unfailing love. For you have been my refuge, a place of safety when I am in distress).” (시편 59:16)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Satisfy us each morning with your unfailing love, so we may sing for joy to the end of our lives).” (시편 90: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It is good to proclaim your unfailing love in the morning, your faithfulness in the evening).” (시편 92:1)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시편 46:5)

이 말씀을 하나 더 볼까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Early the next morning he was back again at the Temple).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2) 그날 새벽부터 성전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왜 그들은 그 시간에 성전에 나와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성전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새벽이면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습관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시간에 미리 성전에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확 밀려오지 않습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기도할 것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씩 기도하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모두 중보기도에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자기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목사님과 교회 장로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팀장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팀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더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을 위해 많은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보세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But I have prayed for you, that your faith should not fail).” (누가복음 22:31-32) ‘중보기도’에 눈을 뜨면 자기만 위해서 기도하는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이 풍부해지고 그만큼 기도가 성숙해집니다. 자기를 위해서,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형제들을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기도할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면 대화가 끊어집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여러 번 만나고 친해지게 되면 그 때부터는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부터는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이야기거리가 되고, 서로의 관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설정되지 않았을 때는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를 잘 넘기면 그 때부터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는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도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새벽 기도가 주는 유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1: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떡 반죽에서 떼 낸 첫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 반죽덩어리 전체가 거룩합니다. 또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다 거룩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And since Abraham and the other patriarchs were holy, their descendants will also be holy-just as the entire batch of dough is holy because the portion given as an offering is holy. For if the roots of the tree are holy, the branches will be, too.”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이 거룩하니까 그의 후손들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반죽에서 일부를 떼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도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우리 교회에 한창 새벽기도의 불이 붙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기도에 대한 도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 때 읽은 책 중에 ‘와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 중국)’라는 중국 교회 지도자가 쓴 책이 있었습니다. ‘와치만 니’에 대한 이단 논쟁이 있기도 했지만, 그가 쓴 책들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 중에 ‘새벽 기도의 유익’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저는 그 책자에서 로마서 11:16 말씀을 새벽 기도에 적용한 말씀을 처음으로 읽었습니다. ‘와치만 니’는 그 책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하루 전체가 거룩한 시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저는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 있다면 그 때가 언제일까? 의심할 여지없이 청년 시절이다. 이 청년 시절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거룩하게 된다.” 

후에 저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책을 읽으면서 본회퍼 역시 와치만 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회퍼가 ‘신자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이란 책을 썼는데요. 이 책은 히틀러 시대에 그가 지하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교재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entire day receives order and discipline when it acquires unity. This unity must be sought and found in morning prayer. The morning prayer determines the day(하루에 통일성이 있게 되면 하루에 전체에 질서와 규율이 생기게 된다. 이 통일성은 새벽 기도를 통해서 구해야 하고 발견되어야 한다. 새벽 기도가 하루를 결정한다).”


3/6/2022 | 시편 119편(IX)

어려움과 걱정이 나를 억누를 때 As Pressure And Stress Bear Down On Me

시편 119:129-144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열 일곱 번째 자음 [페(Pe)]로 시작하는 여덟 절, 열 여덟 번째 자음 [차데(Tsadhe)]로 시작하는 여덟 절, 모두 16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131절 말씀이 제일 눈에 띕니다. “내가 나의 입을 열어 헐떡거리며, 주의 명령들을 갈망합니다(I pant with expectation, longing for your commands).” 이 말씀은 시편 42:1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목이 말라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목이 말라 주를 찾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목마른 사슴이 가쁜 숨을 내 쉬면서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그토록 주님의 말씀을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은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됩니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목마름이 해소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eternity)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3:11)”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킵니다. 우리 안에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있어야 합니다.

영리한 사냥꾼들은 날씨가 가물어 시냇물이 마르면 사슴들이 물을 찾아 내려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사냥꾼들은 사슴이 내려오는 길에 덫을 놓습니다. 덫에 걸리면 크게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하지만 목이 마른 사슴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을 찾아 내려옵니다. 여기에 중요한 믿음 생활에 대한 통찰(insight)이 있습니다. 시간이 많고,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은 ‘갈망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고,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바쁘고 분주해서 도무지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경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잠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않으면 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없어 견딜 수 없는 사람,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맞습니까?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네 가지 유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순진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Even the simple can understand, 130절)”고 합니다. 여기서 ‘the simple’이라는 말은 ‘the minds of ordinary people(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성경에는 ‘the ignorant(무지한 사람)’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자는 평범하거나 무지한 사람이라도 성경을 읽고 그 뜻을 깨우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빛이 비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빛이 그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는(illuminate)’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비범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도, 비록 그 사람이 무지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보통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아주 비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깨우치거나 이해하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의력도 뛰어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 속에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나와 있는 것 같아서 참 신기한 말씀입니다. New English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Your instructions are a doorway through which light shines. They give insight to the untrained(주님의 말씀은 빛이 비치는 출입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들의 마음에 통찰력을 줍니다).” 정말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이 ‘통찰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膳物)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133절)”고 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오판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와 결심을 가지고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심하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어야 해결될 정도로 그 힘이 셉니다. 그만큼 죄의 힘은 대단합니다. 저자는 죄의 힘을 이기기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Guide my steps by your word.”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길을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나 나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2:21에 있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여기서 ‘모범’이라는 말은 ‘example’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선명하게 본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았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지만 보지 못했다.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 싶어했지만 듣지 못했다.” (마태복음 13:17)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겨 놓으신 선명한 발자취를 보고 따라가면 되지만,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까지도 따라서 살 ‘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Guide my steps by your word” 라고 소원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셋째로, “내가 보잘 것 없고, 무시를 당하고, 작아 보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세워준다(141절)”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am insignificant and despised, but I don’t forget your commandments.”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합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서 존재감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저자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럴 때 나의 ‘자존감(self-esteem)’이 얼마나 떨어집니까? 

지난 주 설교에서 소개했던 에머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If I have lost confidence in myself, I have the universe against me).”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면 상대방이 하는 말이 모두 자기를 무시하는 말 같이 들리고, 자기에게 시비를 거는 말로 들리고, 자기를 따돌리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모두 자기를 공격하는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되라고 합니다. 되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말을 할 때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하고 “죄송합니다” 이런 말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 해서 얼마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but I don’t forget your commandments (하지만, 나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나의 자존감이 떨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어떤 전문가의 말이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심으로 내가 그 말씀을 듣는다면 그 말씀들은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나를 세워주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구속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Do not be afraid, for I have ranso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내가 아무리 무시를 받고 자존감이 떨어져도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정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나를 받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어쩌면 바울도 자존감이 떨어져 힘든 때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판단하겠습니까?" (로마서 8:31, 33-34)

마지막으로, “어려움과 걱정이 나를 억누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143절)”고 합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고 중압감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로, 사업상의 문제로, 학업의 문제로 억눌릴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술을 마시면 해결이 되나요? 그 순간에는 잠깐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술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술이 깨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HuffPost’에 2014년 11월 6일에 실렸던 글인데요. 예전에는 ‘Huffington Post’라고 했는데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100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 열 가지만 뽑아 소개하겠습니다. (1) 약 6분 간 책을 읽기입니다. 이 방법이 의외로 스트레스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68%나 감소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 모차르트 음악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의 라우셔(Frances Rauscher) 교수팀이 1993년 ‘네이처(nature)’지에 모차르트 음악이 두뇌와 감성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모차르트 효과(Mozart Effect)’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모차르트 음악은 잘 정리된 선율로 신체 안정을 꾀하는 부교감 신경을 자극하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맥박 수가 느려지고, 피부 온도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은 학생들은 뇌기능이 향상되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성적이 40%가 높게 나왔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바흐와 요한 슈트라우스 곡들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3) 다른 사람을 포용하기 (4) 교회의 성가대에서 찬양하기 (5)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6)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7) 새 소리나 바람 소리, 물 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듣기 (8)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9)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10) 산책하기 등입니다.

그런데요. 시편 119편의 저자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그런 방법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냈습니다. “I find joy in your commands(나는 주님의 명령으로부터 기쁨을 얻습니다).” (143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이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말에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명령(commands)’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말이잖아요? 명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데서 오는 ‘순종의 기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은 나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있어야 이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기쁨이 얼마나 크길래 이 기쁨을 가지고 모든 삶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아니면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로마서 8:35-37) 환난이나 어려움, 핍박,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이런 것들이 내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보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걱정이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 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저자는 이 기쁨을 가지고 삶에서 오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립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순종의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순종의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기쁨’으로 여러분을 억누르는 모든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넉넉히 이기시기 바랍니다.


2/27/2022 | 시편 119편(VIII)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하여 Not To Live A Life Of A Scum

시편 119:113-128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열 다섯 번째 자음 [싸멕(Samekh)]과 열 여섯 번째 자음 [아인(Ayin)], 모두 16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고백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나는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 (113절) “나는 나의 소망을 주의 말씀에 두었습니다.” (114절) “나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려 합니다.” (115절) “내가 항상 주의 법령들을 존중할 것입니다.” (117절) “내가 주의 법규들을 사랑합니다.” (119절) “나는 주의 법도를 공경하고 두려워합니다.” (120절) “나는 주의 모든 교훈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28절)

여러분들은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그의 말들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아니면, 저자의 삶이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옳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는 '모든 잘못된 길(every false way)’을 미워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력(理解力)이 있는 사람은 금방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견고하게 나의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요. 맞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잘못될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좁은 길’과 ‘넓은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3-14). ‘좁은 길’은 인생의 올바른 길을 말하는데, 이 길은 걷기가 힘들고 외롭습니다. ‘좁은 길’을 걷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 대신 ‘넓은 길’로 가기를 좋아합니다. 너도 나도 그 길로 가니까 안심이 되지만. 그 길은 ‘잘못된 길(false way)’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인생의 잘못된 길은 대부분 ‘넓은 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넓은 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저자는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옳은 길인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잘못된 길’을 미워한다고 합니다. 이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넓은 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라는 미국의 사상가(思想家)가 있습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태어나서 콩코드(Concord)에서 살다가 콩코드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든, 작은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는 것. 당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단 한사람이라도 조금 더 쉽게 숨쉴 수 있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이보다 쉽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나의 삶을 반성하게 하는 글이 또 있을까요? 에머슨은 목사였습니다. 그의 글은 쉬워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글에는 깊이가 있었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상의 밑바닥에는 성경 말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가장 저의 가슴에 와 닿았던 말씀은 “주는 땅의 모든 악한 자들을 쓰레기같이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법규들을 사랑합니다(119절)”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다른 번역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You skim off the wicked of the earth like scum; no wonder I love to obey your laws!” (New Living Translation) “As far as you are concerned, evil people are garbage, and so I follow your rules.”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You remove all the wicked on earth as if they were dross; therefore, I love Your decrees.”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You have removed all the wicked of the earth like dross [for they have no value]; therefore, I love Your testimonies.” (Amplified Bible) 이 말씀에 ‘scum(찌꺼기, 쓰레기)’ ‘garbage(쓰레기)’ ‘dross(쇠똥, 아무 쓸 데 없는 것)’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악한 사람들을 눈여겨보시고 악한 사람들을 쓰레기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시고 remove(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악한 사람들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다가 시험(試驗, temptation)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많은 시험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시험은 “왜 악한 사람들이 성공하고 잘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도 내가 하는 일은 잘 안되는데, 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저 사람들은 잘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시험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혹시 오늘 예배드리는 분들 중에 이런 시험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이 계시면 오늘 119절 말씀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으시고, 속히 시험에서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악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scum’처럼, ‘garbage’처럼, ‘dross’처럼 여기시고 제거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目的)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그 일을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形象)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창조의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창조의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착하고 선한 삶을 살아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부디 이 말씀을 가볍게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무 쓸모 없는 쓰레기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시고 제거해 버리십니다.

둘째로,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거절(拒絶)한 사람들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그들 속에 있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가려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서 그를 믿게 하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말이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이 기회를 스스로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레기’처럼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섭지 않습니까? 무섭지만 아직 우리의 삶을 고칠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언제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법규들을 사랑합니다(No wonder I love to obey your laws)!” (119절 하반절) 그는 조금도 의심 없이, 당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악한 사람이 되지 않는 삶의 비결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특별히 주목한 말씀이 있습니다. 121절에 나오는 “나는 지금까지 의롭고 정의로운 일을 해 왔습니다(I have done what is just and right)(121절)” 이 말씀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만큼만 정직하게 살라고 해!” “그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야!” “나는 양심에 걸리는 일이 없어!” 맞는 말 같지만 틀린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게 됩니다. 소위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4:4에 있는 말씀인데요. “나는 양심에 걸리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흠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My conscience is clear, but that doesn't prove I'm right. It is the Lord himself who will examine me and decide).” 정말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인간의 죄된 본성(本性)을 이 말씀처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말씀이 또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외에는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시편 저자가 “나는 지금까지 의롭고 정의로운 일을 해 왔습니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어려운 문제이지만, 저는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한계(限界, limit)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고, 나 자신을 아는 지식이 엄청나게 확장(擴張, expansion)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율법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얼굴에 베일(veil)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한계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오신 이후, 복음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베일을 벗고 사물을 보는 것과 같아서 훨씬 더 분명하게 사물을 구별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3-16에 나오는 유명한 바울의 ‘베일의 비유(The Parable of the veil)’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저자가 갇혀 있었던 한계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standard)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온전히 우리 주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우리가 쓰레기 같은 가치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기준에 맞춰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매번 그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실망스럽고, 힘들고, 짜증이 나기 때문에 오래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민들레 때문에 짜증이 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원의 잔디를 잘 가꿔 놓아도 어디선가 민들레 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서 잔디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민들레를 뽑고 또 뽑아도 끝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친구에게 “이 놈의 민들레 때문에 잔디를 가꿀 수가 없어!” 하고 짜증을 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가 하는 말이 “민들레를 뽑으려고 하지 말고 민들레를 사랑해 봐!”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민들레를 싫어하는 마음이 거짓말처럼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민들레를 잡초라고 생각하고 잔디를 망친다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지만, 민들레를 사랑하면, 민들레가 피우는 노란 꽃까지 사랑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다”라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에 기쁨과 감사가 주어집니다. 

시편 저자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주의 법규들을 사랑합니다.” (119절) “그러므로 나는 주의 법도를 공경하고 두려워합니다.” (120절) “내가 주의 모든 교훈들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128절) “내가 주의 명령들을 사랑합니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Truly, I love your commands more than gold, even the finest gold).” (127절) 이 말씀 속에 우리 인생을 쓰레기 같이 살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오늘의 양식’에서 시편 8편 말씀을 읽었습니다.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성경공부의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인자’라는 말을 보면 금방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나오는 ‘인자’는 앞에 나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나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이 시편을 쓴 다윗은 감격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그렇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우리가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면 안 되니까, 우리가 악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쓰레기 같이 버리시는 사람들이 되면 안 되니까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깨닫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20/2022 | 당회주일

장차 너를 게바라고 부를 것이다 You Will Be Called Cephas

요한복음 1:35-42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영국의 성서학자 중에 윌리엄 버클리(William Barclay, 1907-1978, 스코틀랜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1961년에 ‘예수의 생각(The Mind of Jesus)’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는 그 책을 쓴 목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더 잘 알게 되어 더욱 그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라는 인물을 보다 생생하고 살아있게 그리는 것이다(The purpose of this book is to make the figure of Jesus more vividly alive, so that we may know him better and love him more).” 그는 나이가 들어 거의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서재에서 수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밤 늦게까지 그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타이프라이터 소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1971년이거든요? 그 때 저는 윌리엄 버클리가 쓴 ‘Daily Study Bible(1960)’을 많이 읽었습니다. 모두 17권으로 된 이 책은, 그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 무렵, 날마다 라디오 방송에 나가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중에 원고를 모아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쓴 ‘바울의 생각(The Mind of St. Paul, 1958)’ 그리고 3년 후에 나온 ‘예수의 생각(The Mind of Jesus, 1961)’을 읽었습니다. 지금 읽어봐도 흠잡을 데 없는, 감동적인 책들입니다. 

그 때 제가 읽었던 책 중에 제 마음을 흥분시킨 또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바로 에르네스트 르낭(Joseph Ernest Renan, 1823-1892)이 쓴 ‘예수전(The Life of Jesus, 1863)’입니다. 철학과 종교, 그리고 뛰어난 언어학자였던 그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셨던 ‘인간 예수’의 숨결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르낭이 ‘예수전’을 쓴 때는 ‘자유주의 신학(The Liberal Theology)’이 꽃을 피우던 때였습니다. 르낭은 그 시대의 신학적인 사조(思潮)를 따라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가 쓴 ‘예수전’의 한 문단을 보실까요? “예수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품은 이상을 이 세계에 세우려고 노력하는 혁명가였고, 온 세상을 향해 그 뜻을 실행하는 개혁자였다. 그가 세우려고 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의 매력적인 말과 선(善)을 실천하는 인격은, 힘없고 가난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으며, 예수의 권위는 날로 커져만 갔다. 그를 따른 사람들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되리라고 믿었고, 그들을 위해 메시아가 세상에 왔다고 생각했다. 예수가 남긴 계명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였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다시 버클리가 쓴 ‘예수의 생각’이라는 책 이야기를 좀 더 드리겠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시작할 지 결정해야만 했다.” 지금 한국 문화가 세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BTS, BLACKPINK를 비롯한 K-Pop이 빌보드 차트 상위를 점령하고 있고,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같은 한국 영화들이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한국의 음식들이 또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불고기’ ‘갈비’는 말할 것도 없고, 냄새가 나서 외국인들이 싫어할 것 같은 ‘김치’ ‘된장’ ‘고추장’이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BTS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소향이라는 가수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불렀는데, 1절을 영어로 부르다가 2절은 한국말로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듣는 외국인들이 한국말로 부르는 노래가 멋있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모든 일에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 일러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되고,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하는데, 한국의 문화가 이렇게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타이밍’이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정확한 ‘타이밍’에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4에 나오는 ‘때가 차매’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 말을 다른 번역 성경에서 찾아보면 “When the right time came (New Living Translation)” “When [in God’s plan] the proper time had fully come(Amplified Bib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사역 내내 하나님께서 정하신 ‘타이밍’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My time has not yet come or Now is not the right time for me, 요한복음 2:4, 7:6)”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13:1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Jesus knew that his hour had come to leave this world and return to his Father)”

예수님은 바로 지금이 제자들을 부를 ‘타이밍’인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제자로 삼은 사람은 요한과 안드레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의 제자들을 스카우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저 사람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저 분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다, 저 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저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저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요한복음 1:26-36)”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요한복음 1:37). 한 사람이라도 자기 제자를 더 만들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그런데, 자기 제자들이 다른 랍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오히려 조장한 듯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한 이 말은 이해가 되시나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He must become greater; I must become less).” (요한복음 3:30) Amplified Bible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must increase [in prominence], but I must decrease(그는 유명도가 점점 커져야 하고, 나는 유명도가 작아져야 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되는 날이 속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훗날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던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39절)”라고 썼습니다. “It was about four o'clock in the afternoon when they went with him to the place where he was staying.” (NLT)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이 바뀌는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는 제일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Simon, we have found the Messiah(형, 나 메시아를 만났어)!” (요한복음 1:41) 이 말을 들은 시몬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난과 전쟁 속에서, 조국을 잃어버리고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메시아가 오신다는 믿음 하나를 가지고 모든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인의 역사 속에 수많은 메시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행전 5:36에 나오는 ‘드다(Theudas)’라는 사람입니다. ‘드다’를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400명 정도 되었다는 아주 구체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거짓 메시아들은 역사를 바꾸지 못했고, 백성들을 위로하지도, 구원의 희망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유레카(Eureka)’라는 말을 아시지요? “나는 발견했다!”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입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시라쿠사(Syracuse)’의 왕 히에론 2세(Hiero II)는 금세공사에게 황금을 내주면서 자기의 왕관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금세공사는 그 금을 가지고 아름다운 왕관을 만들어 왕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금세공사가 금을 빼돌리고 은을 섞어 왕관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 BC-212 BC)에게 왕관의 순도(純度)를 알아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순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에 고심하던 아르키메데스는, 우연히 목욕을 하다가 자기가 탕 속에 들어갔을 때 몸의 부피만큼 물이 밖으로 넘치는 것을 보고 왕관의 순도를 재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유레카!” 하고 외치면서 옷을 벗은 것도 모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형, 나 메시아를 만난 것 같아! 함께 가보자!” 그 때 안드레의 목소리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안드레의 목소리는 단순히 흥분된 목소리가 아니라 확신(確信)에 찬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형 시몬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시몬을 처음 본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이제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oking intently at Simon, Jesus said, ‘Your name is Simon, son of John - but you will be called Cephas(which means Peter).’”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미 시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것도, 그의 아버지 이름이 요한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은 변화되지 않은 자연인(natural man) 시몬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시몬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에게서 난 여느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모든 사람들은 자연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인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연인 시몬이 장차 ‘게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바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 하면 ‘페트로스(Πέτρος)’입니다. 역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피터(Peter)’라고 하는데요. ‘베드로’라는 우리 말은 그리스어를 그대로 발음한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아냈다(I saw the angel in the marble and carved until I set him free).” 그는 “조각은 하찮아 보이는 돌덩이 속에서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형태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 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조각가들에게 외면당한 채 무려 40년 동안이나 먼지에 쌓여 있던 길이 5.17m의 커다란 대리석은 미켈란젤로의 손을 거치면서 생명을 얻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대표작 ‘다윗(David)’입니다. 그는 일부러 ‘다윗’의 발 아래 거친 돌들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처음 보았을 때 “너를 장차 게바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너에게서 불필요한 것들이 모두 제거될 때, 사람들은 너를 게바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장 눈 앞에 서 있는 시몬을 보신 것이 아니라, 장차 게바(반석)와 같은 인물이 되어 그 반석 위에 그의 교회가 세워질 미래를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16:18).

지난 주 목요일 ‘오늘의 양식’에 아주 은혜로운 글이 실렸습니다. 그 글을 쓴 Julie Schwab이란 분의 말입니다. “성경에서 ‘위로의 아들’로 알려진 바나바에게는 주변의 사람들을 알아보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사울(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는 기꺼이 그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다. 바울 마저도 마가를 포기하고 버렸지만, 바나바는 끝까지 마가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나바는 당장이 아니라 시간을 가지고 사울(바울)과 마가를 보았던 것이다.”

오늘은 당회 주일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권사 5분, 그리고 집사 26분, 이명 집사 4분을 세웁니다. 성경을 보면 권사나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받은 사람(those who are well respected and ar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이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사도행전 6:3). 지금 당장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누가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주님의 눈으로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고 사람을 세웁니다. 이렇게 사람을 세우다가 잘못해서 실패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랬고, 바나바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는 가능성을 보고 사람을 세웁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에 불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계속해서 깎여 나가고 또 깎여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넘어졌습니까? 심지어 주님을 부인(否認)하고 배반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장차 너를 게바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초대교회를 지킨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때입니다. 지금은 ‘게바’와 같은 사람들이 나와야 하는 때입니다. 자연인 시몬에게 “장차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13/2022 | 시편 119편(VII)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며, 내 길에 빛입니다 Lord’s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시편 119:97-112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열 세 번째 자음 [멤(Mem)]과 열 네 번째 자음 [눈(Nun)], 모두 16절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저자는 구구절절히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의 법을 사랑하는지, 하루 종이 주의 말씀만을 깊이 생각합니다(I meditate on it all day long).” (97절) ‘meditate’라는 말은 우리 말로 ‘묵상(默想)하다’라는 뜻인데요. 이 말은 단순히 ‘무엇을 생각하다(think about)’라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意味)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생각이 계속되고, 확장되는(continued or extended thought on it)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묵상(meditation)’은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방법까지 생각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자는 “주의 말씀이 나의 입에 꿀보다 더 답니다(How sweet your words taste to me; they are sweeter than honey, 103절)”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찬송가 200장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성경 말씀에 흠뻑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달다!” 하나님의 말씀이 달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사람의 믿음이 많이 성장합니다.

계속해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두 가지 유익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지혜롭게 만든다고 합니다(98절).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적들보다 더 나를 지혜롭게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y are my constant guide(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나의 안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고린도전서 1:25) 무슨 뜻인가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 합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다 합해도 하나님을 능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시편 119편의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적들보다 나를 더 지혜롭게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정말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답답하고, 힘들 때, 내 힘에 버거운 일을 만났을 때, 아니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목요일 새벽기도 말씀에서 시편 147:11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사랑’ ‘은혜’ ‘도움’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구할 때 기뻐하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6) 부지런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청년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깊은 통찰력(洞察力)을 준다고 합니다(99절). 이 통찰력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인지,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주의 법규들을 깊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meditation)’하는 훈련을 하다 보니 통찰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통찰력(洞察力, insight)’이라는 말은 쉬운 말로 ‘이해력(understanding)’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히 쓰는 ‘understanding’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통찰력’이란 사물의 ‘본질(the true nature of a thing)’을 직관적으로(intuitively) 꿰뚫어 보고 이해하는 힘을 말합니다. 

저자가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통찰력은 나의 스승의 것보다 더 크고, 노인들의 것보다 더 많습니다.” (99절, 100절) ‘스승’은 나보다 먼저 지식의 높은 단계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노인들(elders)’은 세상에 대한 많은 연륜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 얻은 ‘통찰력’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비교할 수 없고, 세상의 경험에서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자성어에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 한 개를 던져서 두 마리 새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지혜’와 ‘통찰력’이라는 두 마리 새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눈]으로 시작되는 8개 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며, 내 길의 빛입니다(Your word is a lamp to guide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105절) “내 발의 등불’이라는 말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는 상황에서 내 발을 비춰주는 등불을 말합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시골에 있는 한 작은 교회에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밥을 먹고 몇 사람이 바람을 쐬러 나갔습니다. 사방이 어둑어둑했지만 별 생각 없이 서로 얘기를 하면서 논두렁 길을 한참 걸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친구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칠흑(漆黑)같이 어둡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얼마나 깜깜한 지 눈 앞에 자기 손을 갔다 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발짝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게 되자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어두움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좀 깜깜하다 싶으면 손을 눈 앞에 대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그런 상황을 겪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의 불빛을 보고 방향을 잡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의 여정을 바른 방향으로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25년 간 호스피스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을 돌본 경험을 가진 카렌 와이어트(Karen M. Wyatt, M.D.)라는 분이 ‘What Really Matters (2011)’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 말로 ‘일주일이 남았다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카렌 와이어트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7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은 한결같이 “이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당신은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 7가지 후회는 이렇습니다. “죽을 만큼 마음껏 사랑해볼 걸” “조금만 더 일찍 용서할 걸” “걱정은 내려놓고 행복을 만끽할 걸” “마음을 열고 포용할 걸” “한 번뿐인 인생, 열정적으로 살아볼 걸” “아등바등 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살 걸”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면서 살 걸” 등입니다. 여러분도 이 7가지 후회의 말에 동의하시나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후회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세요. 모두 성경에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올바로 잡아주는 안내자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서 지혜를 얻고, 그 말씀에서 삶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에 따라 나를 보호해 주소서.” (107절) 이 말씀을 번역 성경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have suffered much, O Lord; restore my life again as you promised.” (NLT) "I am exceedingly afflicted; Revive me, LORD, according to Your word." (NASB, NKJV) ‘revive’라는 말은 ‘to bring back to life(생명을 돌려주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의기 소침해서 죽게 되었으니 다시 예전처럼 일어나서 활기차게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restore’라는 말은 ‘회복(回復)하다’라는 뜻 아닙니까? 문자적으로는 이전으로 돌려 놓는다 뜻이지만, 본 뜻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태복음 11:28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한다(I will give you rest)”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ome to Me, all who are weary and heavily burdened [by religious rituals that provide no peace], and I will give you rest [refreshing your souls with salvation]. 이 말씀에 숨겨 있는 상당히 많은 의미들을 설명해 줍니다. 그 당시에 율법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교의 종교 의식들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평안을 주고, 구원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하고, 어깨를 무겁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오는 사람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위로와 평안을 주고,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를 마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 대로 살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그리고, 이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 말씀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다니?” “우리는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교훈이 너희를 진리로 인도하고 너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 말씀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시대를 율법의 시대와 새로운 시대 즉 복음의 시대로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시대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까지로 끝이 났고(마태복음 11:13), 이제 나를 통해서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고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교훈이나, 성전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너희가 위로와 평안을 얻고, 나를 통해서 너희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 말씀입니까? 분명히 예수님이 어디서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지 종교지도자들에게 모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 말씀이었습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그렇게 안간 힘을 썼던 것이 이해가 갑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revive’ 시켜 주고, ‘refresh’해 주었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Denmark)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신학자, 시인, 사회 비평가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그는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의 관념론(Idealism)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의 형식주의(Formalism)를 싫어했던 ‘실존주의 철학자(Existentialist Philosopher)’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When you read God's word, you must constantly be saying to yourself, ‘It is talking to me about me(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야’ 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힘든 고통의 시간을 혼자 겪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시간을 혼자 겪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시간에 나에게 지혜를 주고, 통찰력을 주고, 나의 인생의 여정을 바른 길로 안내해 주고, 나를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