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 To Live As A Christian

고린도후서 5:14-21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마디로 제일 잘 표현한 말씀이 마가복음 10:45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 (the purpose of life)’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우리에게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삶의 목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 전에는 이런 말이 있는지 조차도 잘 몰랐습니다. 우리는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삶에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 곧 나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삶의 목적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막상 많은 사람들이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읽으면서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게,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섬기는 것은 겸손한 말이나 태도, 예의 바른 행동, 이런 것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섬긴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나오는 ‘대속물 (ransom)’이라는 말을 알아야 합니다. 

‘ransom’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이 말은 ‘rescue’ 혹은 ‘redemption (구원)’이라는 말과 관계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 (ransom)’이 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말에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도 ‘종(從)’이나 ‘노비(奴婢)’가 있었습니다. ‘속량’은 종의 몸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선량한 시민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속전(贖錢)’이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몸 값으로 지불하는 돈을 말합니다. 몸 값을 지불하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자유인이 됩니다. ‘대속물 (代贖物)’은 몸 값으로 지불하는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때,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감동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집에 종을 두고 있는 어느 양반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집 주인이 교회를 갔다 오더니, 그 집 종을 불렀습니다. “자네 내 방으로 들어오게!” 주인이 점잖고 진진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종은 영문도 모르고 주인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는 화로(火爐)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 않게.” 그 종은 평상시와 다른 주인의 목소리에 당황하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네 이게 뭔지 아나? 자네 노비 문서네.” 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노비 문서를 화로에 넣어버렸습니다. “이제 노비 문서를 태워버렸으니 자넨 이제부터 종이 아니네.” 우리 한국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전’이 되시고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양반 집 주인을 위해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 주인은 자기 집에 있던 종의 노비 문서를 태워 버리고 그 종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그 종에게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0:45 말씀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섬김’이란 말이 더 이상 ‘수사학적인 (rhetoric)’ 말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섬김’이란 말을 별 뜻 없이 가볍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 앞에 나가서 “전 이제부터 여러분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전 그 말을 들으면서 “섬기고 싶으면 조용히 섬기면 되지 그렇게 요란하게 선언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섬김의 삶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십시오. 다시는 죄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1-13)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you should consider yourselves to be dead to the power of sin and alive to God through Christ Jesus. Do not let sin control the way you live; do not give in to sinful desires. Do not let any part of your life become an instrument of evil to serve sin. Instead, give yourselves completely to God, for you were dead, but now you have new life in Christ Jesus. So use your whole life as an instrument to do what is right for the glory of God.”

이 놀라운 일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날부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놀라운 삶의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6에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the good work (선한 일)’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는데, ‘the good work’라는 말이 ‘making us instruments of God’s righteousness (우리를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instruments of evil to serve sin (죄를 섬기는 불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ransom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로 지금 여러분과 제 안에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여러분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는 사로 잡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 잡는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urge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키워드 (keyword)입니다. “왜 우리가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전에 살던 대로 살면 안 되고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질문입니다. “왜 우리가 이제는 ‘instruments of God’s righteousness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우리를 urge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을 urge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 양반 집 주인은 그 날 교회에 갔다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셨다는 설교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 속에서 urge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네는 이제 종이 아니라고, 종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속에서 우리를 urge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변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변화의 삶’의 핵심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관점(觀點)’은 사물을 보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a point of view’를 말합니다. 이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a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입니다.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입니다. 또 하나는,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성경적인 관점 (a biblical point of view)’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the eyes of faith (믿음의 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하여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보았고, 그들은 그들이 눈으로 본 대로 보고했습니다. 그들이 보고는 모든 사람들을 낙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의 정탐꾼들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보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민수기 13-14장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관점’이 바뀐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 (a new creation)’이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관점이 바뀌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맡겨 주신 중요한 사역은 청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청년들의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을 ‘인간적인 관점’에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이 틀렸다든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는 보지 못하고, 놓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봐야 비로소 보이고, 비로소 해석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대속물’입니다 (16절).

저에게 청년들은 보석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제가 이 청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청년들이 ‘새로운 피조물들’이 될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주는 것입니다. 청년부의 간사들 역시 청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고 청년들 옆에 붙여 주신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로, 가족장으로 세움을 받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넓게 보면, 여러분을 이 믿음의 공동체로 부르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는 일에 도움이 되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ransom’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화목의 직분 (task of reconciliation, 18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직분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 (Christ’s ambassadors, 20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urge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11/10/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 To Live As A Christian

누가복음 22:25-30

고난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성경이 구약에서는 이사야서이고,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전서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서기 62-65년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 로마의 화재 사건이 서기 64년 7월 18일에 일어났습니다. 네로 (Nero, 37-68 A.D. 재위 기간 54-68년)는 화재의 책임을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게 돌렸고, 크리스천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피신해서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게도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크리스천들에게 2통의 위로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가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그 편지 속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이 글 속에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다 보면 고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받고 있는 박해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사셨으니 우리도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 속에 있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받는 삶에 참여하고 그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To live as a Christian means to participate and share in the suffering of Christ).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Paradigm Shift’라는 말이 있습니다. ‘paradigm’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frame of reference’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각자가 과거의 경험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만든 자신만의 ‘frame of reference’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마음이 평안한 사람들이다,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는 자기 나름의 크리스천들에 대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들은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그렇습니까?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여러분들 중에 이런 생각을 미처 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paradigm shift’가 일어납니다. 마치 자동차가 하이웨이를 달리다가 gear를 shift하니까 속도가 빨라지면서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되듯이 ‘paradigm’이 shift 되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전에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도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Elis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에 대한 영화를 통해서, 또 그녀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죽고, 그녀의 방에 붙어 있었다는 글 귀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하는 글 귀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독일 선교부에 보내 주는 선교비를 모두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담요 한 장도 절반은 누구에게 줘 버리고, 그녀 자신은 영양 실조로 죽었다는 글을 읽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리고,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또 느꼈습니다. 리빙스턴이 남긴 글 하나 소개할까요? “Oh, that I could dedicate my all to God. This is all the return I can make Him. God, send me anywhere, only go with me. Lay any burden on me, only sustain me. And sever any tie in my heart except the tie that binds my heart to Yours (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 드린 것 뿐입니다. 하나님, 저와 함께만 가신다면 저를 어디든지 보내십시오. 저를 붙잡아만 주신다면 어떤 짐이든지 저에게 지우십시오. 저의 마음이 당신과 묶여 있는 끈을 제외하고는 내 마음에 묶여 있는 모든 끈들을 끊어 주십시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 “아,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로구나!” 하는 새로운 ‘paradigm’이 생깁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고난의 삶에 참여하고, 그 고난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눈다’는 말은 자신도 그렇게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고난 받는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제 머리 속에 두 개의 성경 말씀이 떠 오릅니다. 하나는, 히브리서 5:8-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In this way, God qualified him as a perfect High Priest, and he became the source of eternal salvation for all those who obey him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를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셨고, 그는 그에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다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겠습니까? 교회생활을 좀 하고, 성경도 좀 알고, 기도도 좀 하는 사람들이 내가 받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이 맞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그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크리스천으로 살려고 하는 진지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고민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받는 고난이라면 그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라면 그 고난은 단순히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우리를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말씀은 베드로전서 2:24-25 말씀입니다. “그는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길 잃은 양처럼 잘못된 길로 갔지만, 이제는 영혼의 목자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전서 2:24-25)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of your souls.”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은 고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받은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 다른 사람의 아픔, 다른 사람의 염려와 걱정, 다른 사람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떠 맡으신 것입니다.

Joseph M. Scriven (1819-1886)이 쓴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찬송의 영어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니)”입니다. 그 찬송 1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 What a privilege to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우리의 죄와 슬픔을 대신 짊어지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니!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렵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마태복음 19:26) 그렇습니까? 자신도 연약한 몸이었지만 그 몸으로 조선의 여성들의 문제를 떠맡았던 Elisabeth Shepping (한국 이름: 서서평)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미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땅에서 살다가 그 땅에 죽은 리빙스턴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아니, 우리가 감이 접근할 수 없는 이런 사람들 외에도 이름 없이 조용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그들의 아픔과 걱정을 같이 해 주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안에 있는 ‘이기주의 (selfishness)’라는 적(敵, enemy)과 싸워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문제만 생각하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여러분, 잘 알아 두세요. 크리스천의 삶 속에 ‘이기주의’는 설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기주의’가 설 곳을 내주면 안 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만 위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과 평생 싸워야 합니다. “내가 왜?”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길 때 “나는 크리스천이니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적과 싸워야 합니다. 이 내 안에 있는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천박한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크리스천이 왜 저래?” 하는 비난을 받습니다. 내 안의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향기가 나지 않는 크리스천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골로새서 1:24에 있는 말씀입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나는 여러분을 위해 내 몸에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여러분 자신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You have stayed with me in my time of trial. And just as my Father has granted me a Kingdom, I now grant you the right to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누가복음 22:28-29) “나의 아버지께서 왕국을 나에게 주신 것처럼, 다도 너희에게 나의 왕국의 식탁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준다. 너희는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in my time of trial)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in my time of trial’이라는 말 대신 ‘in my time of temptations (내가 유혹 받는 시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삶은 장차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 앉을 권리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11/3/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X) To Live As A Christian

고린도후서 5:1-9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오경(五經, Pentateuch)’이라고 합니다. ‘penta’는 다섯이라는 뜻이고요. ‘teuchos’는 ‘tool’ ‘vessel’ 혹은 ‘scroll case book (두루마리 세트)’라는 뜻입니다. ‘다섯 책의 세트’라는 뜻이 되겠네요. 그 중에 ‘신명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신명기(申命記)’는 ‘다시 펼쳐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euteronomy (The Second Distribution)’라고 합니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나왔던 ‘출애굽 1세대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모세에게 ‘출애굽 2세대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1세대들에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서 2세대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감동적인 것은 모세가 40년의 광야생활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명기 8:1-3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주는 모든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살고 여러분의 수도 많아질 것이며,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지난 사십 년 동안, 여러분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께서 그리 하신 까닭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여러분의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가, 여호와의 명령은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낮추시고, 굶기셨다가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만나는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조상들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Yes, he humbled you by letting you go hungry and then feeding you with manna, a food previously unknown to you and your ancestors. He did it to teach you that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rather, we live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the LORD).”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나오는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사탄은 금식으로 배가 고픈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명령해 보시오.” 예수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4:4) “No! The Scriptures say,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키가 되는 단어는 ‘alone’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로는 ‘....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빵’이 꼭 있어야 하지만, ‘빵’만 가지고는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이 말씀의 포인트입니다. 만족한 삶을 위해서 ‘빵’ 말고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all that I need.....You honor me by anointing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시편 23:1, 5-6)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에게 공급되어야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5장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천막집 (tent)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보증하셨다고 합니다. “Now the one who prepared us for this very purpose is God, who gave us the Spirit as a down payment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는데, 성령은 이 사실을 보증하는 down payment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For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절)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말씀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신명기 8:3,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the LORD” 이 말씀에 대입 해 보십시오. ‘not bread alone’에 ‘not by sight’라는 말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by every word comes from the Lord’라는 말에 ‘by faith’라는 말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견학(見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직접 보면서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에 대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We proclaim to you the one who existed from the beginning, whom we have heard and seen. We saw him with our own eyes and touched him with our own hands. He is the Word of life).” (요한일서 1:1)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오늘 바울은 “For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고린도후서 5:7)”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not by sight alone’이라고 해야 합니다. 마치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듯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로 알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고, 천국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 부활, 하나님의 심판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놓치는 사람입니다. ‘빙산의 일각 (the tip of the iceber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빙산을 볼 때 눈에 보이는 부분은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약 10% 정도만 물 위로 나와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90%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1:1-2에 있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Faith is the confidence that what we hope for will actually happen; it gives us assurance about things we cannot see. Through their faith, the people in days of old earned a good reputation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하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좋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말씀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좀 무지막지한 사람들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믿고 어디로 갈 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고향을 떠난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찬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을 수 있는 ‘내적 증거 (inner proofs)’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5:5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Now the one who prepared us for this very purpose is God, who gave us the Spirit as a down payment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집을 마련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계약금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집을 사거나 할 때 집 값의 몇 %를 ‘down payment’를 합니다. 우리 말로 하면 계약서를 쓰면서 내는‘계약금’입니다. ‘계약금’을 내면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집 주인은 이 집을 당신에게 팔겠다고 약속으로 ‘계약금’을 받는 것입니다. 번역성경 중에 ‘down payment’라는 말 대신 ‘guaranty’라는 말을 사용한 성경도 있습니다. ‘보증’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시다!” “천국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부활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 (the inner proofs of the Holy Spirit)’를 믿는 것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조건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내적 증거’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이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갈 곳을 몰랐지만 고향을 떠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향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노아 역시 자기 속에 확실한 ‘내적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화창한 날이 계속되었지만,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소개할 말씀이 있습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up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그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Jim Elliot (1927-1956, Portland, Oregon)이라는 청년이 1949년 10월 28일 그의 일기장에 남겨 놓은 글입니다. 그 때 그는 시카고에 있는 휘튼 칼리지 (Wheaton College) 4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일 ‘그가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아 살았더라면 (If he lived by sight only)’ 절대로 그의 생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했고, 그는 29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그 결심을 실천했습니다.

그의 삶의 이야기는 읽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그는 결코 자기 일기장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받은 은혜를 일기장에 써 놓은 것입니다. 그가 남겨 놓은 이 한마디 말이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 (inspiration)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His journal reflects a deep desire to be used by the Lord (그의 일기는 주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고 싶은 소원을 일으킨다).”


10/27/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VIII) To Live As A Christian

마태복음 6:31-34

지금은 좀 열풍이 지나갔습니다만,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Stephen Covey (스티븐 코비, 1932-2012, 미국)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198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위키피디아 (WikipediA)에서 이 책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보았더니, 이 책이 무려 30,000,000권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 40개국어로 번역이 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책입니다. 이 책이 오디오 북으로도 나왔는데, 1,500,000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1년 8월 호 ‘타임지’에서 이 책을 ‘The 25 Most Influential Business Management Books (경영관리 분야 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권의 책)’으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한국어로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이렇습니다. [습관1]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Be proactive). [습관2]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Begin with the end in mind). [습관3] 중요한 것을 먼저하라 (Put first things first). [습관4] 윈-윈을 생각하라 (Think win-win). [습관5]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시켜라 (Seek first to understand, then to be understood). [습관6] 시너지 효과를 내라 (Synergize). [습관7]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고 건강하게 유지하라 (Sharpen the Saw).

여러분에게 이 책을 소개하면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습관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중요한 일들을 찾아 먼저 그 일들을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 (tasks)을 4가지로 분석해 보라고 합니다. 첫째는, Urgent and important tasks (시급하고 중요한 일들)입니다. 당연히 이런 일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는, Not urgent but important tasks (급하지는 않은데 중요한 일들)가 있는데, 이런 일은 시간을 두고 계획을 세워서 하면 된다고 합니다. 셋째는, Urgent but not important tasks (급하기는 한데 중요하지는 않은 일들)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서둘 필요 없고, 다른 사람을 대신 시켜도 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Not urgent and not important tasks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제거하라 (eliminate)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긴급한 일에 쫓기지 않고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 일에 집중합니다.

스티븐 코비가 한 말을 직접 들어 볼까요? “Putting first things first means organizing and executing around your most important priorities. It is living and being driven by the principles you value most, not by the agendas and forces surrounding you (중요한 일을 먼저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계획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회의 아젠더나 당신을 압박하는 주변의 일들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무슨 일에 가치를 두고 있느냐 하는 원칙에 따라 좌우된다).” 저는 코비의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중요한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자녀 교육에 뭐가 좋다고 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거기로 쏠립니다. 그런데, 코비는 그렇게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살아야지 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가치를 두고 있는 일에 중요성 (priority)을 두고, 그 일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성경 말씀을 보실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어디서 살까?” 하는 문제입니다. 한자로 ‘의식주(衣食住)’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정말 옷이 귀했습니다. 잘 사는 집이라야 옷을 입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헐벗고, 해어진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몇 번씩 깁고 또 기운 옷을 입었습니다. 나중에는 옷이 삭아서 기울 수도 없게 된 그런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집은 어떤가요? 자기 집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남의 집에서 일을 해 주고 얹혀 살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의식주’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저 분이 사람들에게 빵 (떡)을 실컷 먹게 해 줬다는데.....” 이런 기대를 가지고 배고픈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들었습니다.

오늘 날도 상황은 똑 같습니다. 입고, 먹고 하는 것이 예전과 다르긴 합니다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집 문제는 정말 큰 문제입니다. 집 값이 자꾸 올라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파트 렌트비도 자꾸 올라갑니다. 그러니, 걱정을 안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알고 계신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도, 들에 핀 꽃들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 목숨을 창조하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들을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6:31-32, 26-30) 여러분은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될 때 이 말씀을 들으면 위로가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설교자인 저에게도 이 말씀은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얻은 결론은,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세상을 이기는 힘’의 비결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고 고민하다가 죽는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시선(視線)을 너희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둠으로써 세상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고, 그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히브리서 12:2)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온갖 고난을 받으신 분, 우리를 위해서 수치와 모욕을 참으신 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신 분,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그 상황 자체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께 시선(視線)을 두면,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받고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주는 히브리서의 메시지입니다.

찬송가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아이작 와츠 (Issac Watts, 1674-1748, 영국)가 쓴 찬송가 149장 가사를 보십시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될 줄 알고 버리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 시선을 두면, 나의 욕심은 부질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면 나의 문제는 작아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와츠의 찬송 가사에 놀라운 영성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저에게는 이 말씀이 이렇게 읽었습니다. “날 봐라. 너의 삶에 고귀한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날 봐라. 너의 인생에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여러분은 33절 말씀에 ‘방점’을 찍는다면 어디에 찍겠습니까? 저는 ‘먼저 (first)’라는 말에 ‘방점’을 찍겠습니다. ‘먼저’라는 말은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above all else, New Living Translation)’라는 뜻입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 시선을 두는 사람들은 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는 우리가 성공적인 (effective)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고 그 일을 가장 먼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Effective한 리더들과, effective한 경영자들에게서 그런 공통점들을 찾아 볼 수 있다고 그의 책에 쓴 것입니다. 저는 그의 이런 주장이 크리스천의 삶에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사는지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나의 눈을 돌려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시선을 두면, 나의 삶에서 무엇인 중요한지 비로소 보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바뀝니다. ‘덤’은 서비스로 받는 것입니다. ‘덤’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느라고 정작 꼭 구해야 할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재판을 올바로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이 대답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가 구하지 않았던 것까지 ‘덤’으로 받았습니다 (열왕기상 3:5-13).

이 시간 우리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에 가치를 두고,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먹고 사는 문제인가? ‘어떻게 하면 내 분야에서 성공할까? 아니면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것들은 ‘덤’으로 받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덤’으로 받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의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구해야 할 올바른 것을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우선 순위가 뒤바뀌어 ‘덤’으로 받을 것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방식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우리의 결단 (決斷)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을 제 삶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살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결코 ‘덤’으로 주실 것들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도록 해 주시고,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10/20/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VII) To Live As A Christian

로마서 6:11-14

지금 우리는 주일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찾은 답은 이렇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①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사는 것이다. ③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④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이다. ⑤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⑥ 먼저 자신을 guird하고, 교회를 guird하고, 교회를 feed하고 shpherd하는 것이다. 지난 주 창립 41주년을 맞이하여 그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설교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의의 도구 (as an instrument of God’s righteousness)’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단순히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로 설정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파악하게 된다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든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 말의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을 당시, 여러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표준으로 볼 때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선택하셨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선택하여 유력한 것들을 멸하셨습니다. As a result, no one can ever boast in the presence of God. God has united you with Christ Jesus. For our benefit God made Him to be wisdom itself. Christ made us right with God; He made us pure and holy, and He freed us from sin. Therefore, as the Scriptures say, ‘If you want to boast, boast only about the LORD.’” (고린도전서 1:26-31)

무슨 말씀인가요? 간단히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아무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올바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순결하고 거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셨습니다. “No one can ever boast in the presence of God. Therefore, as the Scriptures say, ‘If you want to boast, boast only about the LORD (29, 31절)’”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원히 말문이 막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나 자신의 의로움이나 나 자신의 자랑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할 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을 자랑하는 말 밖에 다른 말은 할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 사용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놀라운 일이 지금 나의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다니요? 이런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 저런 사람은 저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며칠 전에 이어령씨가 한 언론과 인터뷰한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인터뷰 글 제목이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였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내가 언론과 인터뷰하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숙연해 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자가 젊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덮어 놓고 살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실의 반대는 허위가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을 잊어버리는 망각(忘却, oblivion)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이라는 포장으로 덮어 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청년들은 부디 덮어 놓고 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라는 말로 읽혔습니다.

“한 번뿐인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에개나 매우 중요한 철학적인,혹은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복종하여 여러분 자신을 그 사람에게 바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6:16) 이 말씀의 포인트는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디에 인생을 바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 ‘무엇’이 사람도 될 수 있고, 물건도 될 수 있고, 그 밖의 어떤 대상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며 그 ‘무엇’에게 자기 자신을 바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 ‘대상’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순종의 종 (a slave to obedience)’으로 살기도 하고, ‘죄의 종 (a slave to sin)’으로 살기도 합니다. ‘순종의 종’으로 사는 사람은 ‘의의 도구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로 살게 되고, ‘죄의 종’으로 사는 사람은 ‘불의의 도구 (as instru-ments of evil)’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의 종’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그 자신을 ‘죄의 종’으로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과적으로 ‘불의의 도구’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누구를 만나서 그에게 헌신하느냐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릴리 해변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어떻게 형제가 같이 예수님의 만나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의 도구’로 드리게 되었는지, 감동입니다. 이들의 아버지 이름도 성경에 나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의 아버지 이름은 ‘요나 (Jonah or John, 마태복음 16:17)’이고, 요한과 야고보 형제의 아버지 이름은 ‘세배데 (Zebedee, 마태복음 4:21)’입니다. 이들의 어머니 이름은 ‘살로메 (Salome, 마가복음 15:40과 마태복음 27:56을비교한 결과 얻은 결론)입니다. 모두 축복 받은 이름들입니다.

여러분, 전도서 12:1 말씀을 아시지요? “Don’t let the excitement of youth cause you to forget your Creator. Honor him in your youth before you grow old and say, ‘Life is not pleasant anymore (네 젊음에 빠져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청년 시절에 하나님을 높이고 존중하여라. ‘내 삶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어’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날들을 후회하면서 다음 세대 사람들에 쓴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후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을까?” “내가 왜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순간적인 즐거움에 빠져 살았을까?” “왜 내 옆에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해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왜 그 때 내 옆에서 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서 다른 것에 순종을 드리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불의의 도구’로 살게 됩니다. ‘도구’라는 말을 ‘instrument’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유명한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이 기도문도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라고 번역합니다. 이 기도문에도 ‘instrument’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엇을 만들 때 사용하는 연장 (tools)을 ‘instrument’라고 합니다. 이 말이 악기(樂器)라는 말로 번역될 때도 있습니다.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같은 현악기도 있고, 프럼펫, 오보에, 플류트 같은 악기도 모두 ‘instrument’입니다. 악기는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누가 연주를 해야 비로소 소리를 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악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손에 들고 연주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손에 들고 연주를 합니다. 아름다운 소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많은 사람의 영혼을 치유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악한 사람이 여러분을 손에 들고 연주를 합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이런 일에 나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스도에게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악한 자의 손에 들려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고 결과적으로 가치 없는, 후회스러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의의 도구’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읽은 로마서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you also should consider yourselves to be dead to the power of sin and alive to God through Christ Jesus. Do not let sin control the way you live; do not give in to sinful desires. Do not let any part of your body become an instrument of evil to serve sin. Instead, give yourselves com-pletely to God, for you were dead, but now you have new life. So use your whole body as an instrument to do what is right for the glory of God.” (로마서 6:11-13)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말씀에 방점(傍點, operative word)을 찍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방점을 찍은 말씀은 “Instead, give yourselves completely to God, for you were dead, but now you have new life”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전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말씀에서 중요한 말씀은 “Do not let.....”이라는 표현입니다. “Do not let sin control the way you live (죄로 하여금 네 삶을 control하지 못하게 하라)!” (12절) “Do not let any part of your body become an instrument of evil to serve sin (네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악한 일의 도구가 되지 못하게 하라)!” (13절) 이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사탄은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나에게는 사탄이 하는 악한 일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I am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 of the age.” (마태복음 28:20) “Jesus is now sitt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interceding for us.” (로마서 8:34)

우리에게는 악한 자의 유혹을 물리칠 힘이 있습니다. 없는 것 같이 보이지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싸워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게 넘겨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새생명 (the New life in Christ Jesus)’은 결코 약한 생명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가 partake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삶을 악한 자의 손에 넘겨 주지 말고, 그리스도의 손에 넘겨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의의 도구’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축복된 삶을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