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020 | 사순절 새벽기도 9

서로 하나님의 평화를 빌어 주라!

마태복음 10:1-15

오늘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전도를 내 보내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전도자의 매뉴얼’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매뉴얼’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지키지 않는 매뉴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만, 오늘날 이 ‘매뉴얼’을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 ‘매뉴얼’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이 ‘매뉴얼’을 지킵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 말씀이 없지만, 다른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두 사람씩 보내셨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6:7). 여섯 팀으로 나누어 전도를 내 보낸 것입니다. 지금 몰몬교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둘씩 다니면서 전도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둘씩 다니면서 전도합니다. 교회는 이런 방식 버린 적이 오래 되었는데, 이단종교에서는 이런 방식을 지금도 사용해서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전도합니다.

교회는 왜 이런 방식을 버렸을까요? 촌스럽다고 버렸습니다. 시대가 변한만큼 전도방식도 세련되게, 현대인들에게 맞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버렸습니다. 버린 이유가 또 있습니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경우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새학기가 되면 청년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앉아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reach out)’ 사람들은 교회로 초대해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계속 사람들을 기다려야 합니까?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이슈가 되면서 한국에서는 뜻하지 않게 ‘신천지’라는 이단종교에 대한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검찰에서는 수사를 미루면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사를 해야 하는 명분은 그전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이만희 죠주가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회견장에 부모들이 피켓을 들고 회견 중간 중간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자기 아들이, 딸이 신천지에 빠져서 집을 나가고 행방불명이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고, 간혹 신천지에 빠졌다고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것만 해도 신천지를 조사해야 할 명분은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조사를 지금껏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난 뉴스를 보면서 검찰이 신천지에 살인교사 죄를 적용할 수도 있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아직까지 수사에 들어갔다는 말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신천지에서 얼마나 치밀한 ‘매뉴얼’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접근합니까? 한 사람을 신천지에 끌어 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공을 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순수하게 한 사람의 영혼을 소중하게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업적을 쌓아야 신천지에서 말하는 ‘추수꾼 144,000’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천지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에 144,000명을 발표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숫자에 약간 못 미치게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천지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얼마 남지 않는 수에 들어가기 위해서 마음이 다급한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실적을 올리려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혹 신천지에 들어온 사람들을 내부적으로 결속하기 위하여 40,000명, 50,000명 이런 규모의 집회를 자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천지에 약간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잘못될 리는 없잖아?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하면서 마음을 돌이킨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이단종교에서도 144,000명이라는 숫자를 제시하고, 전략을 세우고, 그 안에서 경쟁을 시키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결속 시키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아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이 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무방비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시대는 급속도로 변했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변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의 미래가 어둡습니다. 교회 전문가들 중에 간혹 이런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 놓아도 이 말을 심각하게 듣는 교회들이 없습니다. “아닌데? 우리교회는 괜찮은데? 우리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이런 이기적인 생각들을 하면서 전문가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의 현실입니다.

조금 마음이 어둡긴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들을 좀 추려보면서 우리가 어떤 생각들을 해야 하는지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을 쫓고, 모든 병과 허약함을 치료하는 능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1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권위와 능력인데, 이 권위와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권위와 능력을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열 두 제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그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권위와 능력을 주십니다. 맞습니까? 히브리서 13:8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똑같으십니다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

이 말씀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그 부르심과 보내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가 그 부르심을 거절하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핑계대는 이유들을 모두 들어 주십니다. 말을 잘 못한다고 하면 말 잘하는 모세의 형 아론을 평생 모세 곁에 있게 해 주시고, 능력이 없다고 핑계를 대면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니라고 하시면서 그 지팡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표시라고 말씀하시고, 또 모세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알려줍니다. 모세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스스로 있는 분 (I AM WHO I AM)’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The Lord will guide you continually, giving you water when you are dry and restoring your strength. You will be like a well-watered garden, like an ever-flowing spring.” (이사야 58:11)

둘째로, 열 두 제자의 이름을 한번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요. 4절에 가나안 출신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Simon (the zealot①)’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①Greek the Cananean, an Aramaic term for Jewish nationalists 라는 reference가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나안’은 지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가나안 땅은 ‘Canaan’이라고 하고요.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열심당’이라는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의 특별 조직을 말합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단체입니다. 이런 단체 출신 한 명이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우리의 사상이 어떻든,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품는 사람들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어디에도 그들을 해치는 것이나 다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할 것이다 (Nothing will hurt or destroy in all my holy mountain, for as the waters fill the sea, so the earth will be filled with people who know the Lord).” (이사야 11:9, 하박국 2:14) 그 옛날 이사야가 품었고, 하박국이 품었고, 예레미야가 품었고 (예레미야 31장), 바울이 품었고 (빌립보서 2:9-11),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 받았던 계시를 통해서 보여 준 비전 (요한계시록 22:3-5)입니다. 이제 우리 시대에 여러분과 제가 품어야 하는 비전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이 매뉴얼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방 사람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성에도 들어가지 마라. 너희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로 가거라. 가면서 이렇게 전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환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워라. 문둥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내쫓아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5-8절)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라는 것은 한시적(限時的)인 지시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은 모두 거저 받은 것입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이유도 내가 거저 받은 것,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1:10-12)

넷째로, 우리가 어느 집에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전해 줘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평화 (Peace of God’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화를 빌며 인사하여라. 만일 그 집이 평화를 받을 만하면 너희가 빌어 준 평화가 거기에 머물게 하고, 평화를 받을 만하지 않다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 올 것이다.” (12-1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남긴다. 곧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줘야 할 평화는 어떤 평화입니까? 이 험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 주는 평화입니다. 내 속에 평화가 없고, 내가 불안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평화, 우리는 그 평화를 배우고, 그 평화가 내 마음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 평화를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꾸준하게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3/5/2020 | 사순절 새벽기도 8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

마태복음 9:27-38

오늘 설교 제목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 이런 제목입니다. 세상에 어떤 죄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일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I have been given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the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each these new disciples to obey all the commands I have given you.” (마태복음 28:18-20)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준 모든 교훈을 가르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 전에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authority)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은 권세를 가지고 명령한 것이니까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저께 그 말씀을 읽었습니다. 중풍병으로 걷지 못했던 사람에게 “안심하여라, 아들아! 너의 죄가 용서 받았다 (마태복음 9: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겠다고 하시면서 이 중풍병 환자를 일으켜 걷게 하셨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Fear swept through the crowd as they saw this happen. And they praised God for sending a man with such great authority.” (마태복음 9:9)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If we confess our sins to him (in Christ Jesu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wickedness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를 그에게 고백하면, 그는 그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1:9)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를 용서하십시오.” (에베소서 4:32)

성경에 이토록 용서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는데,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맨 먼저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을 고쳐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지 확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게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의 믿음대로 너희에게 이루어져라” 이렇게 말씀하시자 두 사람의 눈이 보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소문을 사방에 퍼뜨렸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귀신들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말씀입니다. 참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왔던 환자들의 병도 다양합니다.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간질병에 걸린 사람, 중풍병에 걸린 사람, 나병에 걸린 사람,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고열로 목숨이 위태한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마태는 예수님께서 ‘every kind of disease and illness (모든 종류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23) 마태는 예수님께서 직접 병을 고쳐 주시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마태복음 8:17, 이사야 53:4)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말을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33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crowds were amazed. ‘Nothing like this has ever happened in Israel!’ they exclaimed.”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격한 목소리로 “이런 일은 처음 보는 일이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 자리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냥 내버려 뒀다가 앞으로 무슨 일이 또 일어날 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우두머리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다.” (34절)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그들의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말못하게 하는 귀신이 쫓겨 나간 것은 예수라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라는 사람 속에 있던 귀신 두목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저께 공관복음서를 읽는 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은 서로 대조해서 읽으면서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고 재구성해서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식구들이, ‘예수가 정신이 나갔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잡으러 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 예수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모으시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하는데,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어떤 비방을 하든지 그것은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모독하는 죄는 결코 용서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한 죄이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21-30)

문제를 몇 개 내겠습니다. (1)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누구일까요? (3)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가 무슨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셨습니까? (4)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어떤 죄입니까? 또 그 죄는 어떤 죄인지 설명해 보십시오. 

영어 단어 중에 ‘deliberatel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일부러’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다 알면서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을 그들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알세불’이라는 귀신 두목이 부하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끝까지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I tell you the truth, all sin and blasphemy can be forgiven, but anyone who blasphemes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This is a sin with eternal consequences.’ He told them this because they were saying, ‘He'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마가복음 3:28-30)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이 말씀이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죄입니다.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세불이 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는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끝으로,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잠언 3:5-6)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의 인생의 길을 똑 바로 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길을 지도해 주십니다.


3/4/2020 | 사순절 새벽기도 7

우리의 절망을 사용하시는 주님

마태복음 9:18-26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가리켜서 ‘공관복음서 (Synoptic Gospel)’라고 합니다. ‘syn-‘이라는 접두사에는 ‘with (함께)’ ‘together (같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optic’이라는 말은 눈과 시력에 관계된 말입니다. 두 말을 합쳐서 ‘synoptic’이라고 하면 ‘taking a common view (같은 관점을 가짐)’이라는 뜻이 됩니다. ‘Synoptic Gospel’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같은 관점을 가지고 기술한 세 복음서,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기술한 관점이 세 복음서와 다르다고 해서 ‘제 4복음서’라는 이름으로 따로 분류합니다.

‘공관복음’이 비록 같은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엄연히 각각기록 연대가 다르고, 저자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관복음서’를 읽으면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지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똑 같은 이야기처럼 보여도 부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한번 보실까요? 오늘 말씀에는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나오지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면 회당장의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몹시 아파서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세부적으로 보더라도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이 회당장의 이름이 야이로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5:22).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회당장의 딸은 외동딸이었고, 나이는 12살이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8:42).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가서 그 딸을 살려 주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그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가복음 5: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집에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물러나라.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리다굼 (Talitha koum)” 하시면서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5:41). 그러므로, 우리는 공관복음서를 읽음으로써 말씀과 사건을 단편적으로 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야이로의 딸을 살이신 오늘 말씀의 의미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며 따라왔습니다 (마가복음 5:24)”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때 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이 여자는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여자는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가진 돈을 모두 써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고, 병세는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5:25-26). 이 여자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사람들 틈에 끼어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님의 옷깃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 여자는 “내가 이 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가 나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즉시, 피가 흐르는 것이 멈췄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사람들이 이렇게 에워싸고 밀치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댔다고 말씀하십니까?” 하고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옷깃에 손을 댄 사람을 찾으려고 둘러보셨습니다. 그 여자는 두려워 떨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라.” (마가복음 5:27-34)

문제는, 이렇게 야이로의 딸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급히 사람이 와 회당장에게 말했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 분을 댁에까지 모시고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무시하시고,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가복음 5: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러나라.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 예수님께서 방으로 들어가셔서 “달리다굼 (Talitha koum)” 하시면서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마가복음 5:41).

(문제) “왜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 시간을 지체했을까요? 1) 시간을 지체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일부러 시간을 지체한 것이다. 3) 급히 가도 어차피 야이로의 딸은 죽었을 것이다. 4) 이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이 일과 비슷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이 들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이틀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땅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3-7).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똑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시간을 지체하셨을까요?”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을까요?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나사로 병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11:4) 예수님은 나사로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 (요한복음 11:25) 예수님은 이 진리를 선포하시려고 나사로의 죽음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의 죽음도 진리를 선포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 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Don't be afraid. Just have faith)”는 진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 (이사야 45:7)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경험하는 빛과 어두움, 좋은 때와 나쁜 때,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창조하신 분이 하니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할 때 나에게 이런 일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야고보서 5:13)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오늘 읽은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가 성경 속에 갇혀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의 고난의 의미를 풀어내고, 해석하고, 여러분의 삶에 용기와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3/3/2020 | 사순절 새벽기도 6

나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왔다

마태복음 9:9-17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마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참 어떻게 보면 어이가 없는 말씀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와 똑 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를 부르실 때도 그랬고,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실 때도 똑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즉시,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And they left their nets at once and followed him).” (마태복음 4:18)

본회퍼 (Bonhoeffer)는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즉시 (at once)’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이 사람들의 순종 사이에 아무 것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정말 본회퍼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핑계를 대고, 뒤로 미루고, 이유를 대고, 사람들과 의논하고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 기회를 영영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즉각 그 자리에서 따를 수 있었는지 여전히 궁금합니다. 저는 두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But God treated me with undeserved grace! He made me what I am, and his grace wasn't wasted. I worked much hard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although it was really God's grace at work and not me).” (고린도전서 15:10)
 
둘째로,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에 대한 성찰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마태 같은 사람은 직업에 세리이다 보니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경멸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는 부족하지 않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것만으로 인생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소원이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삶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앞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그를 불렀고, 그는 그분의 요청을 받아 들이기로 결단합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다니던 직장을 떠났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위험 부담 (risk)이 있습니다. 마태는 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집에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로 더불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10절)”라고 그 때 일을 기록했습니다. 이 자리에 초대된 세리들은 마태의 친구들이었습니다. 마태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 자리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들어왔는지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하고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느냐?”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I have come to call not those who think they are righteous, but those who know they are sinners).” (13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누가복음 19:1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자’는 삭개오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는데, 그 ‘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태같은 사람, 마태가 집에 초대했던 마태의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은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고 경멸의 눈으로 보았고, 수군수군했습니다. 둘째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제외 시킨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인 인식이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셋째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환영하셨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교제하셨습니다. 삭개오를 향하여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다시 마태 같은 사람을 자기 제자로 삼아 천국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이다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마가복음 1:27)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판에 박은 교훈에서는 들을 수 없는 새로운 교훈이었습니다. 이 새 교훈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새로운 부대 (new wine skins)’가 되어야 합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낡은 부대 (old wineskins)’는 팽창력이 많은 ‘새 포도주 (new wine)’를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새 교훈’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교회를 통하여 ‘새 부대’에 예수님의 ‘새 교훈’을 담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낡은 교훈들’을 가지고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새 부대들’이 되어서 그 속에 예수님의 ‘새 교훈들’을 담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0:23-24에 있는 말씀입니다. “I know, Lord, that our lives are not our own. We are not able to plan our own course (주님,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우리 자신의 인생 항로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항로를 결정하시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나의 미래를 내 생각대로 결정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 항로를 맡기십시오. 지난 주 성경 시간에 배운 이사야 64:8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O Lord, We are the clay, and you are the potter. We all are formed by your hand.” 여러분의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신 분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십시오. “주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를 만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3/2/2020 | 사순절 새벽기도 5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

마태복음 9:1-8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소문이 온 유대 땅에 퍼졌습니다. 유대 땅뿐만 아니라 시리아에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모든 곳을 다니시며 유대인들의 회당 안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갖가지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시리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모두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간질병에 걸린 사람, 그리고 중풍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요단 강 건너편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4:23-25)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서는 항상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못 고칠 병이 없었습니다. 위에서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갖가지 병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못 고치는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지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고침을 받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이 중풍병 환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 데려 왔습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달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중풍병에 걸린 환자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안심하여라, 아들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2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eeing their faith, Jesus said to the paralyzed man, "Be encouraged, my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신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을 낫게 해 주려는 친구들의 믿음, 이 믿음을 귀하게 보신 것일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오고,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직접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고 예수님께 이 친구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했을까요? 바로 평생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던 이 사람의 고통을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자기 아픔으로 받아 들인 이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While Jesus was here on earth, he offered prayers and pleadings, with a loud cry and tears, to the one who could rescue him from death. And God heard his prayers because of his deep reverence for God.” (히브리서 5:8) 이 말씀에 나오는 ‘cry (울음)’ ‘tears (눈물)’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우는 울음,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아픔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울 때, 우리가 눈물 흘릴 때 우리를 달래 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This High Priest of ours understands our weaknesses, for he faced all of the same testings we do, yet he did not sin. So let us come boldly to the throne of our gracious God. There we will receive his mercy, and we will find grace to help us when we need it most.” (히브리서 4:15-16)

예수님은 이 친구들의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남의 눈물을 나의 눈물로 아파하면서 받아 들일 수 있는 믿음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생활 어디에서도 이기주의는 설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믿음은 설 곳이 없습니다. 대신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남의 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만이 설 자리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믿음으로 훈련 받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이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 조국이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2)”라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가 본받지 말라고 했던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기주의로 물들어 있는 세상입니다. 2,000년 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이기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벌써 여러분들 속에 들어와 있는 이기주의,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냥 이 사람의 병을 고쳐 주지 않고, 먼저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이 말씀을 해 가지고 율법학자들로부터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비난을 받았을까요? 영어로 ‘blasphemy’라는 단어가 있는데 ‘신성모독’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으시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6절)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7-8절)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눈으로 이 광경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Fear swept through the crowd as they saw this happe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분이라면 아까 이 분이 하신 말씀도 빈말이 아니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