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7

영적인 훈련 1 Train Yourself for Godliness

디모데전서 4:6-16

지난 주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두 가지 채널이 있는데, 이것을 “The Means of Grace (은혜의 수단)’라고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생각이 납니다. 크리스천들도 그럴까요? 크리스천도 그럴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되도록 빨리 내게 와 주었으면 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떠나고, 디도도 달마디아로 가 버렸습니다. 누가만이 내 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대가 올 때, 마가도 같이 데려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두기고는 내가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드로아에 있을 때, 가보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와 주십시오. 그리고 책, 특히 양피지에 쓴 것들을 잊지 말고 가져다 주십시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대가 이 곳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9-13, 21)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때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일생에 가장 외롭고, 춥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사람, 두 사람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직 한 사람 신실한 누가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착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22). 디모데는 루스드라(Lystra)에 살던 청년인데,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생각만해도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4).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때 한번이라도 꼭 얼굴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데모데였습니다. “되도록 빨리 내게 와 주었으면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대가 이 곳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겨울이 오기 전에 이 곳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Timothy, please come as soon as you can.... Do your best to get here before winter).” 그가 얼마나 데모데를 보고 싶어했는지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 (Carpus at Troas)에 맡겨 둔 털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에게는 다가오는 겨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던가 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 특히 양피지에 쓴 것들을 잊지 말고 가져다 주십시오 (Also bring my books, and especially my papers①. / ①Greek especially the parchments).”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이 책이 무슨 책인가 하고요. 그 때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을 때여서 ‘파피루스 (papyrus)’라는 원시적인 형태의 종이가 있었지만, 습기와 벌레에 약해서 ‘파피루스’에 쓴 문서들은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두루마리 중에 ‘파피루스’에 쓴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많이 훼손되고 떨어져 나가서 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양피지’에 쓴 문서들은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잊지 말고 꼭 가지고 오라는 그 양피지에 쓴 문서 (책)는 성경 말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람이 외롭고, 힘들고, 약해져 있을 때 가장 그립고 찾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해 줍니다. 한국 TV를 보면 왜 그렇게 ‘힐링 (healing)’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healing’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을 싸매 주고, 치유해 줍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외롭고 힘든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찾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내가 이 땅을 주리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빵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플 것이다. 그들이 지중해에서 사해까지 헤맬 것이요, 북쪽에서 동쪽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날에 아름다운 여자와 젊은 남자가 목이 말라 지칠 것이다.” (아모스 8:11-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도록 말씀의 채널을 모두 막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헤맨다고 합니다. 청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헤매다가 지쳐 쓰러진다고 합니다.지금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청년들은 잘 걸리지 않습니다. 60대 이상된 허약한 사람들이 잘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이 넘치는 청년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목이 말라 쓰러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sustain합니다. 나를 어렵고 힘든 시간에 붙들어 주고, 지켜줍니다. 위기의 시간에도 그 위기를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줍니다. “그 때에 그들이 괴로움 가운데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그들의 괴로움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치료하시고, 무덤에서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여호와의 변함 없는 사랑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시편 107:19-20)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rd, help!’” they cried in their trouble, and he saved them from their distress. He sent out his word and healed them, snatching them from the door of death.”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치유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가히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 (myste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모든 유익함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디모데전서 4:13)”고 충고한 것은 그렇게 해야 우리 삶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양쪽에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며,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까지 알아 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It is sharper than the sharpest two-edged sword, cutting between soul and spirit, between joint and marrow. It exposes our innermost thoughts and desires.” 직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매우 파워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이 있는 잘 드는 칼보다도 더 잘드는 칼과 같아서 영혼과 영 사이를 자를 수 있고, 뼈와 뼈 속에 들어 있는 골수를 분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드는 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갈망하는 것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비쳐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비쳐 보면 내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식사를 하고 나서도 한번 거울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브룩 쉴즈 (Brooke Shields)라는 미국의 유명한 영화 배우가 인터뷰 중에, 당신 같은 사람도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배우가 하는 말이 자기가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봤는데, 앞 이빨에 커다란 시금치가 끼어 있었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죽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줄도 모르고,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들 앞에서 웃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죽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아침마다 자기를 비쳐 보는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 자신을 건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편 92:1)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 보면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안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내 영혼이 건강한지 다 나옵니다. 요즘에 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 스캔이 유행합니다. MRI 스캔을 하면 우리 몸에 이상이 없는지 모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MRI 스캔에 잡히지 않는 것도 다 잡힙니다. 아무리 첨단 MRI 장비라도 우리의 soul (혼)과 spirit (영) 사이에 있는 문제는 잡을 수 없습니다. 최첨단 MRI 장비를 가지고 스캔을 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는 모든 정보가 다 나옵니다.

여러분, 내 영혼을 건강하게 지켜 나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평안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지켜 주시며, 여러분의 온몸을, 영과 혼과 육신 모두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날까지 아무 흠없이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Now may the God of peace make you holy in every way, and may your whole spirit and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until our Lord Jesus Christ comes again).” (데살로니가전서 5:23)

우리의 몸만 건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열심히 운동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습니까? 나의 영혼이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애매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영적인 훈련 (training for godliness)’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godliness’라는 말은 우리 말로 ‘경건’이라고 번역합니다. 달리 좋은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God (하나님)’에서 온 말입니다. 그 뜻은 ‘conforming to the laws and wishes of God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소원을 따르는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 혹은 ‘영적인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외우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요한복음 15:5-8) 조금 긴 말씀이지만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7절)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산다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삶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살게 되면 너희가 비로소 내 제자가 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요.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살게 하려는 노력, 예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나의 뜻, 나의 의지를 지배하도록 하는 노력이 바로 ‘영적 훈련’이고 ‘경건의 훈련’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되게 하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우리에게 익숙한 훈련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훈련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잘 지켜 나갈 수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2/16/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6

하나님의 은혜 3 Desiring God's Grace

디모데전서 4:4-9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 세 번째 설교입니다.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중요한가?” 그리고 “은혜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어야 하는가?” 오늘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은혜 받는 길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The Means of God’s Grace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수단)’입니다.

먼저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Breathing is the means that God uses to sustain life. So the command to breathe is the command to fall in with the purposes and patterns of God to give and sustain life. This is what I mean by the term, 'means of grace.' 'Grace' is the free keeping-work of God to sustain our spiritual life that leads to everlasting joy. The "means of grace" is our 'keeping ourselves in the love of God.' God's 'keeping' inspires and sustains our 'keeping.' His keeping is decisive and our keeping is dependent on his (숨을 쉬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숨을 쉬라는 명령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과 형식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단’이란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켜 나가기 위한 방법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시는 일을 잘 보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John Piper의 말입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God has revealed certain channels through which he regularly pours out his favor. And we’re foolish not to take his word on it (하나님께서는 규칙적으로 그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길들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매우 오래 전에 상영된 영화인데요.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라는 영화인데요. 1962년에 상영된 영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7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음향 효과상, 미술상)를 받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이 대치하고 있을 무렵 영국은 아랍인들의 참전 및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정보국 소속의 로렌스 중위 (피터 오툴)를 중동에 파견합니다. 로렌스는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고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중동 거점인 다마스커스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로 인해 아랍인들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전쟁은 계속 되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몰락이 가시화되면서 중동의 독립을 논의할 때가 되자 열강들은 독립의 약속을 내버리고 분할 점령의 음모를 기도합니다.

이에 로렌스는 영국 정부에 항의하며 아랍 민족들에게 단결을 호소하지만, 그들 또한 탐욕에 눈이 멀어 단결하지 않습니다. 결국 로렌스는 영국 정부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돌아갑니다. 로렌스는 계속해서 자신을 중동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청하지만, 이미 로렌스가 돌아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많이 바뀝니다. 중동 문제는 이미 열강들과 현지 기득권 세력 간의 정치적 협상거리가 되고 맙니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로렌스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자신도 결국 소모품으로 이용 당했다는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결국 로렌스는 오토바이를 타고 엄청난 스피드를 내고 달리다가 마주 오는 자전거를 피하려고 하다가 스피드를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로렌스는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이 장면이 첫 장면인데, 이 장면이 이 영화 전체가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스피드를 통제할 수 없어서 결국 사고로 이어진 것처럼, 국가 간의 협상의 무대인 전쟁에서 한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로렌스를 향한 영국 정부 관리들의 비웃음,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로렌스의 광기 넘치는 눈빛 연기가 압권이라는 평을 듣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장면 중에 로렌스가 아랍 사람 몇 명을 데리고 런던을 방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현대화된 영국 거리를 보면서 어리둥절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나 틀기만 하면 찬물이 나오는 콸콸 나오는 수도 꼭지 (the water faucets)였습니다. 그들이 로렌스에게 이 수도 꼭지를 사막에 가져 갈 수 있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들은 찬물이 나오는 수도 꼭지만 보았지, 이 수도 꼭지가 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무관심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우리가 그냥 우리 방식대로 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지 그 방식을 알아서 그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John Piper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The Means of God’s Grace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전서 4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채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①Or made holy 여기서 ‘it’는 ‘everything God created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안에 저와 여러분도 들어 있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은혜의 수단’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받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들로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이 두가지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길은 우리에게 익숙한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낯설고, 어색하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니까 “스스로에게 경건의 훈련시키라 (Train yourself to be godly) (7절)”는 말씀이 나오고, 8절에는 다시 ‘경건의 훈련 (training for godliness)’이란 말이 나옵니다. 요즘에 ‘육체의 훈련 (Physical training)’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하고 (그 일들이 주로 앉아서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퇴근 길에 체육관에 들려서 운동하고, 샤워하고 집에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일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몸이 그만큼 건강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꾸준하게 운동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그만큼 ‘경건의 훈련’을 꾸준하게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Physical training is good, but training for godliness is much better, promising benefits in this life and in the life to come (몸을 훈련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경건의 훈련을 받는 것은 훨씬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경건의 훈련은 이 세상에서도 유익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John Piper 목사의 말을 다시 여러분에게 리마인드 시켜 드립니다. “God has revealed certain channels through which he regularly pours out his favor. And we’re foolish not to take his word on it”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이 어떻게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따라 살면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How can a young person stay pure? By obeying your word).” (시편 119:9)

“조국이여, 안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면 ‘구국기도실’이 있는데, 그 기도실 들어가는 현관에 이런 말씀이 씌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국은 걱정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이 말이 생각난 것은, 여기 집을 떠나, 부모를 떠나 미국에 와서 유학생활 하는 청년들,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겠습니까? 청년의 때에 얼마나 유혹이 많습니까? 자칫 한발만 잘못 디디면 곁길로 가기 쉬운 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이런 청년의 시기를 잘 붙잡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을 이렇게 안심시켜 드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서 교회 생활 잘 하고 있고요. 말씀 훈련도 잘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여러분에게 소개할 말씀이 있습니다.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입니다, 성경은 진실하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데 아주 좋은 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셔서 그의 자녀들을 모든 선한 일에 쓰임 받도록 준비 시키십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기도가 쉽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색합니다. 더구나 지금같이 추운 새벽에는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훈련이나 훈련 받을 때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 있습니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잘 견뎌내야 합니다. 피아노를 치거나, 악기 연주를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한 곡을 잘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힘든 연습, 힘든 훈련을 해야 합니까? 연습 또 연습, 지루하지만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곡을 마스터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생활도 훈련해야 합니다. 새벽기도 한번 나왔다가 기겁을 하면서 “난 새벽 기도 체질이 아니야!”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Jesus returned to the Mount of Olives, but early the next morning he was back again at the Temple. A crowd soon gathered,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m (예수님은 올리브산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일찍 다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그 시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께서 밤에 올리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거기서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밤에 기도하시고 이른 새벽에 다시 성전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자연스러웠습니다. 힘든 일이 아니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힘은 기도에서 왔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께 흘러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This kind can be cast out only by prayer.” (마가복음 9:29) “왜 예수님은 이런 병을 낫게 하실 수 있고, 우리는 안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그랬습니다. “그 차이는 기도하고, 안 하고의 차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The Means of God’s Grace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에 주목하고,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9/2020 | 청지기주일/임명예배

나의 사명 The Ministry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사도행전 20:17-27

여러분, 먼저 이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바울의 제 3차 선교여행의 루트를 그린 것입니다. ‘드로아 (Troas)’ ‘앗소 (Assos)’ ‘미둘레네 (Mitylene)’ ‘기오 (Chios)’ ‘사모 (Samos)’ ‘밀레도 (Miletus)’ ‘고스 (Cos)’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나오는 ‘에게 바다 (Aegean Sea)’ 연안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보기에는 이 섬들이 터키 연안에 가까이 있어서 모두 터키 영토인 것처럼 보이는 데, ‘고스’는 현재 그리스 영토입니다.

2015년 9월 2일,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 (Bodrum)’ 해변에 빨간 셔츠를 입은 한 어린 아기가 엎드러진 채 죽어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일란 쿠루디 (Alan Kurdi)’라는 세 살배기 아이였습니다. 한 시리아 난민 가족이 시리아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 ‘코바니 (Kobane)’를 출발해서 육로로 터키로 들어 간 후 거쳐 고무 보트를 타고 그리스 영토인 ‘고스 (Cos)’로 가던 중에 거센 파도에 배가 뒤집히면서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 가족은 처음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려고 했지만 거절을 당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가 유럽으로 망명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지명들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명들이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에게 바다를 건넜던 지도에 등장하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 지명들이 뜻하지 않게 ‘시리아 난민’이라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지명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뭔가 우리 마음을 때리고,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하면서도 권력과 물질의 풍요로움과 평안 속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이에 이곳은 모두 이슬람화 되고 말았습니다. 터키도 그렇고, 에게 바다의 섬과 도시들이 모두 이슬람화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과거와 현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변화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유럽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리아 난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쿠루디 가족’이 무사히 ‘고스’ 섬에 도착하고, 그리스로 들어갔다고 해도 유럽의 국가들이 난민들을 거절하는 마당에 어떻게 되었을 지, 앞날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죽고, 혼자 살아남은 ‘쿠루디’의 아버지는 이제 나에게는 삶의 희망이 없다고 하면서 시리아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나라들도 모두 자기 나라에 대한 걱정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난민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이 일찍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 아닙니까? 우리에게 이런 역사에 대한 이해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나는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께서 내게 경고해 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내가 떠난 뒤에 어떤 사람들이 사나운 이리처럼 교회에 들어와서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나는 압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왜곡되게 말하고, 제자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을 밤낮으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쉬지 않고 교훈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능히 세울 수 있고 모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 누구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열심히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8-35절)

우리는 이 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 복음을 전해준 덕분에 내가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간절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I never shrank back from telling you what you needed to hear, either publicly or in your homes).” (20절) “I didn't shrink from declaring all that God wants you to know.” (27절)

오늘 말씀에만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기도 중에 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까닭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나누어 주어 여러분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9-11) 이 말씀 속에 복음을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그의 간절함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간절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열정이 없다고요.

로마서 12:2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NIV).”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패턴은 어떤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이 세상의 패턴 중의 하나입니다. 부부 간에도 서로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패턴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복음을 나눠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말합니다.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24절)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위해서 그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2,000년 전에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와 그물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송 중에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I'd Rather Have Jesus)’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Rhea. F. Miller (1894-1966, 미국) 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고, George Beverly Shea (1909-2013, 미국) 라는 사람이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죠지 베버리 쉐아’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쉬고 뉴욕에 있는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죠지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 NBC 방송국 프로그램 편성 부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죠지는 그 사람에게 자기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 담당자도 죠지의 굵직한 베이스 목소리가 호소력이 있고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NBC 스튜디오에서 1,500명의 방청객과 전국의 청취자들에게 ‘가라 모세 (Go Down Moses)’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청취자들은 굵직하고 호소력 있는 죠지의 목소리에 열광했습니다. 방송국 편성부장은 이 프로그램에 정기 출연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죠지에게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죠지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좀 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의 마음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희망에 부풀어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뭔가가 그로 하여금 쉽게 결정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시 한 편을 주면서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에, 죠지는 그날 교회에서 부를 찬송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을 떠나지 않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선택하고 싶다”는 어머니가 준 시에서 읽은 구절이었습니다. 그 순간 죠지는 자기도 모르게 피아노를 치면서 즉흥적으로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아들을 껴안으면서 “엄마는 이 노래 너무 좋구나! 오늘 예배 시간에 이 노래를 불러 줄 수 있겠니?” 하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찬송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NBC 방송극의 요청을 거부한 죠지는 그 후 빌리 그레이엄 크루세이드 (Billy Graham Crusade)의 요청을 받고 독창자로 세계를 돌면서 찬양을 했습니다. 그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양을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뜨거운 박수갈채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5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should remember the words of the Lord Jesus:‘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바울은 크리스천의 삶을 그 한마디로 요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 것을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열정이 있어야 하고, 내게 맡기신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의 소중한 것들을 내려 놓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1961년 1월 20일, John F Kennedy가 취임 연설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나라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주십시오).” 우리는 교회를 향하여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지 말고,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은 청지기 주일입니다. 여러분, 화면을 한번 봐 주십시오. ‘청지기 (Stewardship)’라는 말은 이제 잘 안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만, 교회에서는 여전이 이 말을 사용합니다. ‘청지기직 (Stewardship)’이라는 말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Give (주다)’ ‘Serve (섬기다)’ ‘Attend (출석하다. 참여하다)’ ‘Grow (성장하다)’ 이 네 가지가 각각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줌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자원 (resource)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을 수 있는 모든 자리에 열심이 출석하고, 참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크리스천이라야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2/2/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5

하나님의 은혜 2 Desiring God's Grace

시편 42:1-5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 두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에 대하여 성경이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는 지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foundational question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너를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LORD bless you and protect you. May the LORD smile 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May the LORD show you his favor and give you his peace).”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혹은 ‘여호와는 얼굴을 너를 향하여 드사’ 이런 말은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빈 말이 아니라, 너희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같이 축복하면 내가 그들을 축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굉장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축복의 말이 실제로 effective하게 working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더니, 그 약이 효과가 있어서 병세가 금방 좋아집니다. 이럴 때 “It works!” “It is working for me!”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축복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하고 빌어주어라. 만일 그 집 사람이 네가 빌어주는 평화를 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 평화가 그에게 내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가복음 10:5-6)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틀림 없이 민수기 6:24-26 말씀을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대방에게 이런 인사를 한다면 그 인사가 그 사람에게 효과가 있을까요? 성경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가 보았더니, 유대인들이 길 가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지나가면서 “Shalom!” 이렇게 인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shalom’이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 인사에 얼마나 진심이 담겼는지 모르지만 좀 형식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는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서로 만나 인사할 때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하는데 이 ‘안녕(安寧)’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평안하고 건강하다는 뜻인데요. 이런 뜻이 정확하게 히브리말 ‘shalom’ 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헤어질 때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인사합니다. 내내 평안하고 건강하시라는 참 좋은 인사입니다. 우리의 진심을 담아 이런 인사를 주고 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서로 헤어질 때 영어로 “Goodbye!”라고 인사하는데요. 이 말도 참 좋은 말입니다. “May God be with you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이런 뜻이잖아요? 우리의 진심을 담아 이런 인사를 한다면 최고의 인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민수기 6장에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비추사’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드사’ “May the LORD smile on you and be gracious to you!”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신다는 말씀도 성경에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얼굴을 돌리잖아요? 있습니다. “내 죄에서 주의 얼굴을 돌리시고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소서 (Hide your face from my sins Remove the stain of my guilt).” (시편 51:9) 다윗이 죄를 범하고 나서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내버려 두셔서,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Then God turned away from them and abandoned them to serve the stars of heaven as their gods).” (사도행전 7:42) 또 욥기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How many wrongs and sins have I committed? Show me my offense and my sin. Why do you hide your face and consider me your enemy?” (욥기 13:24) 욥이 이렇게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나중에 가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 속에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시편 42편 말씀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오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이 주를 찾아 헤매입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하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As the deer longs for streams of water, so I long for you, O God. I thirst for God,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stand before him?”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ng’이라는 단어는 “몹시 그리워하다” 혹은 ‘몹시 원하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어 성경에서는 ‘long’ 대신 ‘pant’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숨이 차서 입을 벌리고 헐떡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시편 42편은 ‘고라 (Korah)’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 쓴 것입니다. ‘고라’에 대한 이야기가 구약성경 민수기에 나옵니다. ‘고라’는 모세나 아론과 같은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레위 지파 사람인데도 하나님께서 모세나 아론만 지도자로 사용하시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이런 ‘고라’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벌을 내리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6:11).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고라’의 후손들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고라’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이 쓴 시편 42편은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저자는 무슨 일인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조롱합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지?’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 가슴이 찢어집니다. 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들어가곤 했습니다. 기뻐 소리를 지르고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그 행복한 사람들과 어울리곤 했습니다.” (3-4절) 지금 이 사람은 너무 너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그립습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겠습니까?” (2절)

오늘 여러분은 그가 쓴 이 시편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 시편 저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함’ ‘사모함’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카운트 한다면 약 3,500년 전에 살았던 이 시편의 저자는 지금 우리와 비교해 보면 비교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 불편한 것투성이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 풍족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간절함’을 목마른 사슴에 비유했습니다.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1-2절) 사슴이 목이 말라 입을 벌리고 헐떡거립니다. 목이 타 들어갑니다. 이 사슴에게는 어디서 시원한 물줄기를 발견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끝내 이 물줄기를 찾지 못하면 이 사슴은 죽고 말 것입니다. 지금 이 시편 저자에게 목마른 사슴이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목이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일에 보통 때보다 좀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면 됩니다. 목마른 사람이 어디서나 물을 마실 수 있듯이,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이 말라 입이 타 들어가는 사람에게 누가 물 한 컵을 준다면 그 사람은 마지막 한방울의 물까지 다 마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이 마른 사람이 예배에 참석한다면 예배순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방울의 은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배에 집중할 것입니다. 예배자에게는 시편 42편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간절함’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8)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한 사람의 ‘간절함’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Let them praise the Lord for his unfailing love and for the wonderful things he has done for them. For he satisfies the thirsty and fills the hungry with good things).” (시편 107:8-9)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간절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시편 67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May God be merciful and bless us. May his face smile with favor on us. (Selah) May your ways be known throughout the earth, your saving power among people everywhere.” (1-2절) 이 시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시편에 흐르고 있는 생각이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셀라 (Selah)’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일종의 음악 기호라는 것입니다. 음악 기호는 찬양이나 연주를 하는 사람들과 서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셀라’는 ‘여기서 잠깐 쉬라’는 ‘interlude’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편을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십시오. 주의 미소 짓는 얼굴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잠깐 쉽니다) 하나님,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길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들도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잠깐 쉬고 그 은혜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보세요. Interlude 다음에, 기도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구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26/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4

하나님의 은혜 Desiring God's Grace

시편 127:1-2

오늘 설교 제목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정했습니다. 2020년은 교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소원이 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양 중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조은아 씨가 가사를 썼고, 신상우 씨가 곡을 붙인 찬양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 은혜/나 주저함 없이 이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은혜”

우연히 신상우 씨의 간증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갔던 캐나다 이민 생활에서 처음에는 살기 위해 정신 없이 일하다가,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많은 방황을 했더라구요. 하지만 캐나다 이민 시절에 그는 많은 크리스천 음악가를 만나게 됩니다. 고형원을 만났고, 최덕신을 만났고, 조은아를 만났고, 송정미를 만납니다. 그리고, 최덕신을 통해서 송명희 시를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서 문득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날 조은아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사를 하나 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조은아는 그 다음 날로 가사를 써 왔습니다. 하얀 종이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만년필로 가사를 써 왔다고 합니다. 신상우는 이 가사를 들고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0분도 안 되어 곡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신상우의 곡 중에는 조은아가 쓴 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캐나다를 방문했던 박종호가 “이 곡 좋다”고 하면서 빼앗다시피 해서 이 곡을 가지고 귀국합니다. 그 후 신상우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박종호가 부른 ‘하나님의 은혜’가 제법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신상우는 소프라노 김영미 씨의 반주를 맡아 많은 공연을 함께 합니다. 김영미 씨가 부른 대표 곡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 까지가 제가 들은 간증입니다. 그 밑에 붙은 댓글을 보다가 그가 2017년 50살의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섬세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신상우는 CCM 곡들만 아니라 '베토벤 바이러스' '주몽' '대조영' '제빵왕 김탁구' 등 대중음악과 OST에도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는데, 그만 간암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고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7편은 솔로몬이 쓴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 위해 쓰여진 시편입니다. 순례자들이 일주일, 열흘 혹은 보름을 걸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갑니다. 순례자들은 길을 가면서 이 시편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여호와께서......하지 않으면 (unless the Lord builds a house, Unless the Lord protects a city)’이란 말입니다. 집을 짓는 일도 그렇고, 성을 지키는 일도 그렇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그렇고,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고, 가정 생활도 그렇고, 자녀를 기르는 것도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노력이 ‘헛되다 (in vain)’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서 1:2에 나오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Vanity of vanities,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What profit has a man from all his labor in which he toils under the sun)?” (NKJV) “Meaningless! Meaningless! Utterly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 (New Living Translation, New International Version) 어떤 사람은 솔로몬이 말년에 염세주의 (厭世主義, pessimism)에 빠졌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인생을 비관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에 대한 반성의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잠깐 세상적인 기쁨과 즐거움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런 삶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남긴 책이 전도서 (Ecclesiastes)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되고,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정말 모든 것이 헛되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만리장성 (萬里長城, The Great Wall)’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222년, 진나라의 진시황 때부터 시작해서 명나라 때 와서 완성된 무려 1800년 동안, 20개 왕조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길이가 무려 8,500km이고요. 198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우주선에서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만리장성’을 건축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희생되었습니다. ‘만리장성’에 동원된 사람들 때문에 중국의 인구가 ‘만리장성’을 따라 분산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을 쌓은 목적은 북방 민족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뇌물을 받고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막상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는 무용지물이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헛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만리장성’을 보게 되면, 사진만 찍지 말고요. 그 무거운 돌을 거기까지 운반해 왔을 엄청난 인간의 노역(勞役)을 상상해 보십시오.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사고로 깔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부상 당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언젠가 ‘만리장성’을 걸으면서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원망의 소리를 꼭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려 1,800년에 걸쳐 이룩한 엄청난 프로젝트의 결과 치고는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경비병들이 잠을 자지 않고 성을 지켜도 모두 헛된 일이 되고 만다는 성경 말씀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은혜 (grace)’라는 말은 ‘unmerited favor (그럴 만한 공을 세운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주어진 호의)’ ‘undeserved favor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주어진 호의)’라는 뜻입니다. 저는 많은 청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보스턴으로 유학 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거든요. 제가 이런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목사님, 전 정말 학위를 못 받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쓴 논문도 잘 되지 않았고, 너무 문제가 많았거든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졸업했습니다.”

저 자신도 유학생활을 했습니다만, 유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딱 좋은 생활입니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과 경쟁을 하면서, 좌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몰래 혼자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연약함과 아픔을 겪으면서 졸업을 하고 여기까지 왔거든요. 난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 찬양 가사에 나오지 않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고요.

성경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나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 마저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었습니다.” (고전 15:10) 이 말씀이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treated me with undeserved grace! He made me what I am, and his grace wasn't wasted. I worked much hard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although it was really God's grace at work and not me.”

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life is learning to fight for joy in a way that does not replace grace. We can fight to walk in the paths where he has promised his blessings (크리스천의 삶의 진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 방식 안에서 기쁨을 위해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신 길로 걷기 위해 싸워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크리스천의 삶에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replace (대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특히 미국같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는 자기가 일한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다투어서 ‘스펙 (specification)’을 쌓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보다 더 자격을 갖추고, 남이 하지 않은 경험을 쌓게 되면 그만큼 대우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 작용하고 있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럴 만한 일을 한 것이 없고, 그럴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크리스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일날 예배 드린다고 교회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그 시간에 밀린 과제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제가 우연히 시편 말씀을 읽다가 시편 65:11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이 너무 좋고 은혜가 되어서 제 책상 위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이 말씀을 써 놓았습니다. 컴퓨터를 켜면 항상 이 말씀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궁금하시지요?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개역개정) “주께서 그 선하심으로 한 해에 면류관을 씌우시니, 주의 길에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우리 말 성경) “You crown the year with Your goodness; Your ways overflow with plenty.”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올해 2020년을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에 복이 차고 넘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길에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좀 힘들더라도, 약간의 희생이 있더라도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신상우 씨가 그랬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간 그에게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그는 좌절했고 방황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도 하나님은 그를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작사자, 작곡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옆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고형원, 최덕신, 조은아, 박종호, 송명희, 송정미, 소프라노 김영미까지 그와 교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 당시 한국의 CCM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입니다. 그는 잘 몰랐지만, 그가 좌절하고 방황했던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이 그렇게 이 세상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도 똑 같은 방식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힘든 시간도 있고,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고린도후서 12:9)”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