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Walking With God

창세기 6:5-10

새해 들어 세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첫 주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설교를 했고, 지난 주에는 ‘크리스천 아이덴티티’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행(同行)’은 같이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같이 갈 뿐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Santiago)’를 갔다 온 선배 목사님의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 북부 서쪽 끝에 있는 도시입니다. 9세기에 그곳에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유골(遺骨)이 발견되면서부터 그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총 4개의 ‘산티아고로 가는 길 (Camino de Santiago)’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 길’은 길이가 80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길을 모델로 해서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해마다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바쁜 일상생활을 살던 사람들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선배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그 길이 무척 아름다워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길 가는 중에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상당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모두 같은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 많이 필요 없고, 눈 빛 하나만으로도 의사 소통이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둘이 같이 갈 수 있겠는가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간단한 말씀이지만, ‘동행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많은 영감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동행하는 삶’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언제나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비록 삶의 과정에서는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을 지 몰라도, 그 결과는 언제나 해피 엔딩입니다.

구약 성경에 요셉 (Joseph)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요셉의 삶은 한마디로 ‘형통한 삶 (successful life)’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succeeded in everything he did)” (창세기 39:2) 심지어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형통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요셉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간수장의 마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이 하는 일에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셉이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39: 20-23) 성경을 생각하면서 읽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그냥 읽지 않을 것입니다. ‘successful life (성공적인 삶)’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이 같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때 요셉은 어린 나이였습니다. 18살, 혹은 19살 정도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막내 아들 요셉을 늘 끼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씀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끼고 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혹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얘야, 하나님의 눈 밖에 나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해!” 아버지 야곱이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요? 야곱 자신이 형을 속이고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힘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거든요. 저는 이것이 요셉이 형통한 삶을 살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교육 덕분에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그런 죄를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9:9)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 결과는 언제나 해피 엔딩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美德)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 (4:6) 그러면,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살겠다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아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하지만 노아는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아의 자손은 이러합니다. 노아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This is the account of Noah. 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with God).” (창세기 6:8-9) NLT 성경에 보면 노아는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그 때 살았던 흠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의롭고,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노아가 모든 사람이 비웃는데도 불구하고 ‘방주(方舟, an ark)’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지시한대로 ‘방주’를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모스 말씀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이 말씀은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목적지가 같지 않으면 헤어져야 합니다. 목적지가 같아야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 보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Life is not a speed but a direction)!” 수영이라는 한국 작가가 이런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Emanuel Pastreich)라는 사람도 같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삶의 방향이 잘못 되었으면 삶 전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수영이라는 작가가 쓴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삶의 방향이 분명하다면 온 삶이 다 분명해진다. 하지만, 삶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면 삶은 늘 문제투성이가 되고 만다.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면 힘들 때 잠시 멈춰 쉬었다 가도 좋은 것이 인생이다.”

어떤 사람이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길어야 여섯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사람은 처음에는 무척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정리해서 모두 자선 기관에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몸에 별 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죽을 줄 알고 재산을 다 기부해 버렸는데, 그 돈 아까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6개월 동안 시한부 인생으로 살았던 때처럼 인생을 진지하고 보람 있게 산 적이 없었습니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는 의사의 진단이 이 사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삶의 내용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우리가 건강할 때는 이런 생각을 못할까요? 건강할 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어렵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삶의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또 하나 이유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한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 ‘The Contemplative Pastor: Returning to the Art of Spiritual Direction (묵상하는 목회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들이 바쁘다는 것은 헌신의 증상이 아니라 배신의 증상이다 (The word busy is the symptom not of commitment but of betrayal).” 바쁜 목사들은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수 없고, 말씀을 묵상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I can be active and pray; I can work and pray; but I cannot be busy and pray. I cannot be inwardly rushed, distracted, or dispersed. In order to pray I have to be paying more attention to God than to what people are saying to me (나는 활동적이면서 기도할 수 있다. 나는 일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바쁘면서 기도할 수는 없다. 나의 내면이 쫓기고, 산만하고, 분산되어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들은 유진 피터슨이 목사들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만,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빠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은 헌신의 증상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살기를 포기하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의 증상입니다. 맞습니까? 새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핑계대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유명한 설교자 중에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1899-1981)가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설교자라고 칭송을 받는 캠벨 모르간 (George Campbell Morgan, 1863-1945)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터교회 (Westminster Chapel)에서 30년을 목회하신 분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의 본문 말씀이 시편 73:27-28입니다. “Those who desert him will perish, for you de-stroy those who abandon you. But as for me, how good it is to be near God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망할 것입니다. 주를 떠난 사람들을 주께서 멸망 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1/12/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2

크리스천 아이덴티티 The Christian Identity

베드로전서 2:9-10

2020년 새해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는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과 아직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共存)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몇 주 동안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라는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 새해 첫 주에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크리스천 아이덴티티’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으로 피신해 사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시기는 일반적으로 A.D. 63-64년경, 네로 (Nero) 황제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에 화재가 난 것은 A.D. 64년 일이지요? 네로는 화재의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베드로전서를 쓴 연대를 20-30년 더 늦게,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던 도미티안 (Domitian, A.D. 92-96) 황제 때나, 트라얀 (Trajan, A.D. 98-117) 황제 때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9절) 크리스천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개역성경에 나오는 구절이 더 익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But you are not like that, for you are a chosen people. You are royal priests, a holy nation, God's very own possession).....” ‘but you are not like that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말씀 전에 믿음을 잘 지키지 않고,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을 잘 모릅니다. 몇 가지 이 말씀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짚어 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베드로전서 2장에 처음으로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 출애굽기 19:4-6에 이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말씀의 방점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이 말씀에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전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이 있습니다. ‘함무라비’는 제 6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 진 것이 B.C. 1754년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하면 고조선 때입니다. 높이 2.25m의 돌 비석에 ‘쐐기문자 (cuneiform)’로 쓰여 있고, 그 내용은 주로 ‘계약 (contracts)’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비교하면, ‘십계명’은 제정 연대가 그보다 2-300년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으로 보더라도 훨씬 발전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 자체만 보면 간단한 법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파생된 시행 규칙까지 더하면 실로 엄청나게 발전된 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에서 자기들만 유일하게 하나님의 법,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지만, 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바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법을 줄 터인데, 이 법을 잘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과는 아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되고, 귀한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되는 데에 조건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비즈니스 현장에서, 연구실에서, 실험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거짓말 해서는 안 되고, 남을 속여서도 안 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 인생을 짧게 보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인생을 길게 보는 사람들 아닌가요? 우리의 삶이 지금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닌가요?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작은 유익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팔 수 없고,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정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삶이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많은 것을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 (rewards)’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And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without faith. Anyone who wants to come to him must believe that God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 (히브리서 11:6)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은 당장에는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손해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보상 (rewards)’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크리스천의 ‘정체성 (identity)’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정체성’이라는 말이 영어로 ‘identity’라는 말이잖아요? 이 말에서 ‘신분증 (identification)’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신분증’은 ‘운전면허증’을 말합니다. ID 보여 달라고 하면 ‘운전면허증’을 보여 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ID가 없는 크리스천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들 (God’s chosen people)’이라는 ID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 (royal priests)’이라는 ID가 생깁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말씀의 방점은 ‘제사장’이라는 말에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왕 같은’이라는 말에 찍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에 찍혀 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그 제사장의 직분이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priests)’이라는 말은 라틴어 ‘폰티펙스 (Pontifex)’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영어로는 ‘브리지 빌더 (bridge builder)’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우리의 삶이 선하게 살게 됩니다. 절대로 악하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면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 (favor)을 줍니다. 자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사람들은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다’는 성경 말씀의 뜻입니다.
 
그 다음, ‘거룩한 나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거룩한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나라 (a holy nation)’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만이라도 해 보세요.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지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You are God's very own possession”이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You are a people belonging to God”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안한 존재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실수투성이입니까? 나의 삶을 내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결정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어느 레스토랑을 갈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간단한 것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증세를 ‘결정장애’라고 합니다. 간단한 일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입니다. 다윗은 탁월한 ‘사미스트 (psalmist)’였습니다. 그는 그가 쓴 시편에서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실 때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23:1).

베드로가 쓴 편지에 나오는 오늘 본문 말씀은 편안하게, 좋은 환경 속에서, 걱정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불안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준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로마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복했습니다.

2020년 새해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어떤 마음음을 가지고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까?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 (identity)’를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손해를 좀 보더라도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는 말은 근거 없는 ‘신화(神話, myth)’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 말은 근거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 정체성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본회퍼 (Bonhoeffer, 1906-1945, 독일)가 쓴 ‘주님의 선하신 능력에 싸여 (Von guten Mächten)’ 이 노래를 같이 부르겠습니다. 이 시는 감옥에 갇혀 있던 본회퍼가 사랑하는 애인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에 들어 있던 시입니다. 아마도 이 편지가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을 것입니다. 이 시에 Siegfried Fietz라는 사람이 곡을 붙였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많은 용기와 위로와 격려를 주는 노래입니다.


1/5/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1

새로운 피조물 A New Creation

고린도후서 5:14-18

거룩한 산의 기슭에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세력이 그리 강성하지 못한 한 인디언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 부족의 추장은 나이가 많아서 곧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똑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희는 모두 저 거룩한 산에 올라가서 뭔가 우리 부족을 이끄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져오도록 해라. 가장 훌륭한 선물을 가져 오는 자가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며칠 뒤 큰 아들이 가장 먼저 돌아왔습니다. 큰 아들이 가져 온 것은 날카로운 화살촉과 창촉을 만들 수 있는 부싯돌 덩어리였습니다. “아버님, 이제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서 부싯돌을 잔뜩 찾아냈습니다.”

두 번째로 돌아 온 둘째 아들은 땔감이 많은 숲을 봐 두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이제 우리는 추위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모닥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땔감이 충분한 곳을 보아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막내 아들은 빈 손이었습니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께 보여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산 정상에서 멀리 새로운 땅을 보았습니다. 그 땅에는 숲과 초원, 산과 계곡, 물고기와 동물로 가득했습니다. 그 땅은 먼 곳에 있지만, 언젠가 저는 저희 부족을 이끌고 그 땅으로 갈 것입니다.”

세 아들의 말을 모두 듣고 난 추장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너는 나와 우리 부족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주었다. 너에게는 미래를 내다 보는 비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전과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은 그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비전과 열정은 삶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승화 시키는 요소입니다.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새로워지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매우 유명한 지도자였고,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존경 받는 랍비였습니다. 이 니고데모에게 새로워지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눈을 피해 ‘한밤중에 (at night)’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또 예수님을 우물 가에서 만났던 한 사마리아의 여자도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목마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셔서 제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4:15) 또 삭개오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았던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 위로 올라 갔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 “오늘 이 집에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그의 편지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고린도후서 5:17) 그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피조물 (new creature)’ ‘새로운 사람 (new person)’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 어디에 ‘방점 (the operative word)’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맞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outside Christ)’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핵인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로서 성격이 활발하고 모임에 무리 없이 녹아 드는 사람을 ‘핵인싸’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녹아 든 ‘핵인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인싸’가 되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united with Christ)’ 라는 뜻입니다.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 프랑스)이라는 유명한 명상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은 크리스천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며 동시에 의무이다 (It is in the ordinary labors and duties of life that the Christian can and should develop his spiritual union with God).”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와 연합하는 일은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의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에서 ‘나’는 ‘옛날의 나 (old self)’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관점과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과거의 나’는 죽었기 때문에 이제 예전에 추구했던 것들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막연하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같다는 감정이나 느낌을 가지고 말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으로 이런 변화가 내 속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새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나눈다 (partake)”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3).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속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태복음 6:9-10)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가졌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그가 가졌던 기도를 나의 기도로 삼고, 그 꿈을 나의 삶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보십시오. “나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쫓아 내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3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도 형식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복음서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떤 문둥병 환자 (a man with leprosy)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해져라!’ 그러자 바로 문둥병이 떠나고 그가 나았습니다.” (마가복음 1:40-42)

며칠 전에 프랜시스 교황이 환영하는 사람들을 만나다가 어떤 사람이 교황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교황이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의 손을 뿌리친 영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교황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나도 인간이기에 자주 이런 잘못된 면을 보일 때가 있다고,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일이었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Mov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and touched him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compassion’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헨리 듀넌트 (Jean Henry Dunant, 1828-1910)라는 스위스 사람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말 로는 앙리 뒤낭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명한 은행장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만나고 싶어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야망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스위스의 은행장으로서 프랑스와 경제협력의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스위스의 경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서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전쟁터로 떠난 후였습니다. 듀넌트는 실망하지 않고 전쟁터를 찾아가서라도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전쟁터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난생 처음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있는 수많은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허무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는 거기에 남아서 의사를 도와 부상병들을 처리하고 시체들을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을 만나 개인적인 야망을 채우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점차 이 꿈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의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시작된 것이 ‘적십자 (The Red Cross)’입니다. 이 꿈 덕분에 그는 1901년에 프랑스의 Frédéric Passy와 함께 첫 번째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것이 예수님의 삶을 나누고 실천하는 일이 아닌가요? 이것이 세상에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미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전에 가졌던 꿈을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우리 안에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Since we are living by the Spirit, let us follow the Spirit’s leading in every part of our lives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5: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뜻,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a worldly point of view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 혹은 ‘a spiritual point of view (영적인 관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꿈을 좇던 사람이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꿈을 꾸게 됩니다. 사람이 관점이 달라지면, 자연히 추구(追求)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2020년 새해를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소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워지고 싶은 소원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을 여러분의 삶에서 잘 깨닫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12/31/2019 |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새 술은 새 부대에 New Wine Is Stored In New Wineskins

마태복음 9:9-17

오늘 송구영신 예배 나오신 교우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디 엘 무디 (D. L. Moody, 1837-1899, 미국)가 한번은 교회에 비판적이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의 집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응접실에는 난로가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무디는 난로를 열고 타고 있는 나무 장작을 밖으로 꺼내 놓았답니다. 주인이 놀라면서 왜 이러시느냐고 물었답니다. 무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얼마 되지 않아 장작의 불이 꺼졌습니다. 무디가 입을 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잘 타던 장작불이 밖으로 꺼내 놓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모여서 예배 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 우리는 서로 격려를 받으면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And let us not neglect our meeting together, as some people do, but encourage one another, especially now that the day of his return is drawing near.” (히브리서 10:25) 주님이 오실 날이 더욱 가까워 온 지금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고,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 마태는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라고, 너를 나의 제자로 삼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So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묻거나, 지체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 다른 아무 것도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 뭔가 자꾸 집어 넣습니다. 생각을 더 해 보겠다고 하고, 생각할 시간을 필요하다고 하고, 누구하고 의논을 해 봐야 되겠다고 하고, 요즘에는 기도를 해 보겠다고 말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3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옆에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제자들은 하나씩 크리스천은 어떻게 사는지 예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과 제자들을 옆에서 지켜 보는 사람들은 그들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왜 당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까?” 이 말씀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은 ‘tax collectors and sinners’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tax collectors and sinners’는 다른 말로 번역하면 ‘scum’입니다. ‘인간 쓰레기’라고 할까요? 우리 말에 ‘인간말짜’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 일컫는 말입니다. 영어의 ‘scum’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식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으나, 환자들은 의사가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12-13)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배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예배보다 ‘긍휼’과 ‘자비 (mercy)’에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가 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죄인들과 세리들’을 ‘인간말짜’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나는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죄인들을 받아 주고, 그들의 삶을 바꿔주고, 그들도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기대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까요? 아니, 단순히 이상하게만 보인 것이 아니라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이 가르치는 교리에만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한 생각을 아무 비판 없이, 아무 반성 없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옵니다. “왜 당신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좀 의외의 질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면 몰라도 어떻게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언행은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 교육을 제대로 받고, 경건한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자주 금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도 하지 않는, 막 돼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분노하면서 “우리도 금식하고, 바리새파 사람들도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질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같이 기뻐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신랑의 기쁨을 같이 나누지 않고 지금 금식 중이라고 하면서 슬퍼한다면 신랑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 때 금식하면 좋지 않겠느냐?” (15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왜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까요? 그들은 전통에 얽매여 있었고, 습관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교리나 지금까지 행해 왔던 전통에 대하여 한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번도 ‘왜’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냥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이니까 습관적인 금식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오래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이 한번도 ‘왜’라고 묻지 않고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생활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갖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면, 낡은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17절)”고 하셨습니다. “New wine is stored in new wineskins”이라고 하셨습니다. ‘new wine’은 ‘new wineskin’에 넣어야 하는 이유는, ‘new wine’이 팽창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old wineskin’은 딱딱하게 굳어서 신축성이 없습니다. 속에서 ‘new wine’이 팽창하면 압력을 견디지 못해서 그만 터져 버립니다.

‘new wine’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 복음에는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잘 말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6) 이 말씀에 나오는 ‘능력’이라는 말이 그리스 말로 ‘두나미스 (δύναμις)’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두나미스’라는 말에서 영어의 ‘다이너마이트 (dynamit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우물을 파는 것을 옆에서 구경했습니다. 한참 우물을 파 내려가다가 커다란 바위를 만났습니다. 아버지 혼자 힘으로 제거할 수 없어서 기술자를 불러서 바위를 제거했습니다. 그 기술자는 바위에 구멍을 몇 개 파고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 넣고 단단히 덮은 후에 폭발을 시켰습니다. ‘꿍’하는 소리가 나면서 속에 있던 단단한 바위가 갈라지고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에는 ‘다이너마이트’과 같은 폭발력이 있습니다. 마치 ‘new wine’ 팽창력이 있는 것처럼 이요.  ‘old wineskin’이 ‘new wineskin’의 팽창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터져 버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팽창력을 감당하지 못하면 터져 버리고 맙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모두 ‘old wineskin’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있는 ‘new wineskins’가 아니었습니다.

‘새 술 (new wine)’은 ‘새 부대 (new wineskin)’에 넣어야 합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새부대 (new wineskin)’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우리가 방심하면 뒤처지고 맙니다. 부지런히 우리가 가진 정보들을 update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복음과 시대의 변화를 함께 담을 수 있는 ‘new wineskins’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새 시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슈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교회의 전통과 성경에 대한 교리적인 해석에만 매달릴 수 없는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대답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혼자 대답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 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크리스천으로서 내 속에 복음과 시대의 변화를 같이 담을 수 있는 ‘새 부대 (new wineskin)’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전통과 관습 속에 머물러 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가죽 부대 (old wineskin)’가 되어서 복음을 땅에 쏟아버리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 시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립니다. 우리가 다른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을 감사 드립니다. 계속해서 복음에 충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하지만, 전통과 습관적인 믿음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복음과 이 시대를 함께 담는 새 부대들이 되게 하옵소서. 2020년 새해는 능동적인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넉넉히 헤쳐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12/29/2019 | 송년예배 메시지

유익한 후회 Godly Sorrow

고린도후서 7:8-11

2019년을 시작한 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9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뉴스 중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안구(眼球)’가 없이 태어난 희귀한 질병을 아기가 크리스마스 날에 새로운 가족에게 입양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생후 8개월 된 이 ‘사샤’라는 아기는 ‘안구’가 없다는 것 빼고는 다른 아기들처럼 건강하고 잘 웃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샤’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이어서 ‘사샤’의 치료비를 댈 수가 없고, 또 키울 형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에 이 아이를 키우겠다는 따뜻한 가족이 나타난 것입니다. 신문에서는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 지는 기사입니다.

이런 따뜻한 소식이 있는가 하면,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닭강정 사건’은 모두의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어느 아파트에 혼자 있는 어머니에게 ‘닭강정’ 30 박스가 배달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많은 ‘닭강정’을 주문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문서에는 그 어머니의 아들이 배달 시킨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우리 집으로 배달이 되었고, 또 ‘닭강정’ 가게에서 손해를 볼 수도 없으니 30박스 돈을 모두 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 먹을 수가 없으니 3박스만 주고 모두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그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친구들이 장난을 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닭강정’을 받지 않으면 자기 아들이 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닭강정’ 가계 주인은 그 어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닭강정’ 값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카드 회사에 연락해서 지불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광고를 올려서 “이미 식어버린 ‘닭강정’이지만 필요한 분은 와서 가져 가라”고 광고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의 집에 시키지도 않은 ‘닭강정’을 배달하게 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에서 조사해 본 결과, 이 일이 ‘대출 사기단’의 소행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이 필요했던 그 어머니의 아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했지만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인터넷 광고를 통해 ‘대출 사기단’과 접속하게 되고, 이 사람들을 만나 문서를 위조하고, 대출을 받는 연습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은행에 가서는 겁이 나고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 아들은 뒷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출 사기단’ 사람들은 화가 나서 아들 이름으로 ‘닭강정’ 30박스를 배달 시킨 것입니다. 좀 무섭기도 하고, 마음이 우울해지는 기사입니다. 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닭강정’이 아니라 충분히 더 큰 보복이나 협박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험해 지고 있습니다. 인정은 메말라 가고, 기쁘고 행복한 일보다는 어둡고 우울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런 일들에 관심을 보일 마음의 여유조차 없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고 벅찹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을 돌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한 해를 훌쩍 보내고, 오늘 올해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윌리엄 버클리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일생에 세 번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스도에게 회개하는 마음, 교회에게 회개하는 마음, 그리고, 세상에 회개하는 마음이다.” 그리스도에게 회개하는 마음이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잘못 믿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생각과 결단 없이 자기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김형석 교수님의 신앙강연 동영상을 봤습니다. 올해 연세가 만으로 100세입니다. 그 동영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지만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교리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상황이 불리할 때는 믿음을 버리거나 예수님을 배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함께 꾸고, 예수님께서 옳게 여기신 가치들을 자기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뒤에 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방향으로 함께 걷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진작 예수님을 그렇게 믿을 걸!” 하고 후회하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도의 교제’에 올바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회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진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예수님이 옳게 여기시는 가치들을 나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서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으면서 같이 크리스천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성도의 교제’인데, 내가 그 교제를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평소에 ‘성도의 교제’를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후회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나의 책임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태복음 5:13)”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소금으로서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복음 5:14)”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잘 아시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것 (not to be served, bur to serve others)’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는 것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마가복음 10:45)’이었습니다. 누구를 특정(特定)하지 않고 그냥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for many)’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특정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주신 것입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 (Simon & Garfunkel)은 1960-70년 대에 가장 인기 있는 남성 듀엣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저는 이런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들으면서 대학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사이먼 앤 가펑클 말고도 좋아하는 가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존 바에즈 (John Baez)나 쥬디 콜린스 (Judy Collins) 노래도 좋아했습니다. 사이먼 앤 카펑클은 수많은 히트곡을 냈는데요. ‘Sound of Silence (1964)’ ‘Scarborough Fare (1966)’ ‘Mrs. Robinson (1968)’ ‘El Condor Pasa (1970)’ ‘The Boxer (1970)’ 이 많은 히트곡 중에도 가장 히트한 곡은 1970년에 나온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입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가 매우 시적이고 의미가 있습니다.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당신이 지쳤을 때, 당신이 작고 초라하다고 느낄 때, 당신의 눈물을 닦아 주고, 당신의 편에 서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옆에 친구가 없을 때, 험한 물결 위의 다리처럼 나를 놓아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그 노래의 가사를 음미해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섬긴 예수님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2019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누구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뭔가 아쉬운 마음이 한 구석에 있지 않습니까? 이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회개하는 마음, 교회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올바로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아닐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장 말씀은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회를 몹시 책망합니다. 뒤로 미루거나 주저하지 말고 단호하게 이 일에 대처하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쓴 바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의 편지를 읽고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고린도후서 7:10)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See what this godly sorrow has produced in you: what earnestness, what eagerness to clear yourselves, what indignation, what alarm, what longing, what concern, what readiness to see justice done. At every point you have proved yourselves to be innocent in this matter.” (고린도후서 7:11) 여기서 ‘godly sorrow’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을 말합니다. 반대로 ‘worldly sorrow’라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세상적인 슬픔’에 빠져 삽니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입니다. 이런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믿음생활에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godly sorrow’는 그 사람을 회개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고, 열심을 내게 만들고, 불의한 일을 보고 분개하게 하고, 경각심을 갖게 하고, 간절하게 사모하도록 하고, 관심을 갖게 하고, 정의감을 갖게 하고, 순결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소개하는 이유는, 2019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우리를 회개 시키는 데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godly sorrow’가 되어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 (metanoia)’라고 합니다.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뉘우치거나, 후회하거나,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changing one’s way of life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함)’ ‘making a decision to turn around, to face a new direction (돌아서기로 결심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마주 보기로 결심함)’입니다.

내가 왜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지 못했을까요? 내가 왜 교회생활을 제대로 못했을까요? 내가 왜 섬기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까요? 아쉬운 마음을 가지세요.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지금 나의 삶을 회개하세요. “2020년 새해에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2020년 새해에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데서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을 마주 보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결심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