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2019 |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Of Nazareth

사도행전 3:1-10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강림’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마지막 날’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서기 33년 어느 날, 오후 3시쯤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문이 여러 개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을 제일 많이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 앞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걷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날마다 그 시간에 이 사람을 메고 와서 그 자리에 앉혀 놓았던 것입니다. 마치 물건처럼, 저녁에는 누군가가 이 사람을 메고 가서 어디에 들여 놓았을 것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한 것이라도 그 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평범한 것이 비범한 것이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개입 (God’s intervention)’이라고 합니다.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平凡)한 (ordinary)’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개입해 들어오시면 ‘비범(非凡)한 (extraordinary)’ 것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범한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해 들어오시기를 열심이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그 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이 사람이 손을 벌리며 돈을 좀 달라고 구걸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눈 여겨 보면서,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Peter and John looked at him intently, and Peter said ‘Look at us’”라고 나와 있습니다. ‘intently’라는 말은 ‘강렬하게, 뚫어지게,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여’라는 뜻입니다. 위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 왜 그 날 그 시간에 두 사람은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이 사람을 그런 눈을 바라 봤을까요? 아니, 그보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 시간에 어디에 있고,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만 기도하러 왔을까요? 바쁜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피치 못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그 시간에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가다가 이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이 일이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고, 별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작고 사소한 일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보시오!”라는 두 사도의 단호한 말에 이 사람은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The lame man looked at them eagerly, expecting some money., 5절)”저는 이 순간이 바로 이 불쌍한 사람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6절) “I don't have any silver or gold for you. But I'll give you what I hav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get up and walk!” (New Living Translation)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껑충껑충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 기적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God’s intention and purpose)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서기 33년 어느 날 오후 3시에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그 때 일어났던 이 기적은 우연히 어쩌다가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한 권 가지고 갔습니다. 그 책이 톰 라이트 (Tom Wright)가 쓴 “톰 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답하다 (Simply Jesus)”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소름이 끼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톰 라이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유대인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의 문 (Ths Seep Gate)’ 바로 옆에 있는 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성전 바로 앞에 있는 연못입니다. 여기에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성전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전이 할 수 없고,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다고, 버젓이 성전 앞에서, 공개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intentionally) 38년된 병자들 고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적 역시 ‘아름다운 문’ 앞에서, 바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삽시간에 이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사도들은 이 소문을 듣고 모여 온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이 이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3:16) 이 사람에게 일어난 이 기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로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이 기적에 대한 소문은, 편협한 유대교에 대한 소문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은 말씀을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의 입장에서 말해 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시간부터 우리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절망도,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불행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의미가 달라집니다. 걷지 못했던 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로마서 8:28)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불행한 이야기도 전혀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기적이 처음으로 예수님 없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기적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후에 처음으로 이 기적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10:8)”라고 말씀하셨고, 여러 차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한복음 20:21-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이 성령강림절 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곧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 (요한복음 14: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인 되리라 (사도행전 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는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능력이 오늘 나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만 이런 능력이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어느 한 곳에도 예수님께서 개인적인 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내 속에 있는 능력을 드러내라고 하는 요구를 사탄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만일 그날 베드로와 요한이 사적(私的)인 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려고 했더라면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 없다 (6절)”고 선언하였습니다.

오후 3시에 무심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이라면 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면서 봤던 ‘아름다운 문’ 옆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일어나 걸은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로 인해 크게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When they realized he was the lame beggar they had seen so often at the Beautiful Gate, they were absolutely astounded!” (10절) ‘astound’라는 말은 놀라움으로 완전히 압도 당했다는 뜻입니다.

삽시간에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I always pray with joy being confident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carry it on to completion until the day of Christ Jesus (나는 늘 기쁨으로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마지막 그 날까지 그 모든 선한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1:6)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 (a good work)’을 시작하셨고, 그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 (calling)’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소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소명’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과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왜 내 안에 능력이 없다고 단언합니까? 내 안에 ‘착한 일’을 계속해서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필요한 때에 하나님을 우리를 능력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6/9/2019 | 성령강림절

예언과 환상과 꿈 Prophecy, Vision And Dreams

사도행전 2:14-21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영어로 하면, ‘Pentecost Sunday’ 혹은 ‘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Sunday’ ‘Whitsunday(s)’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삼 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회개가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누가복음 24:46-49)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있는 한 방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방을 ‘마가의 다락방 (Mark’s Upper Room)’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방이야 말로 기독교를 탄생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방이다”라고 말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었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이 방’에서 있었고,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방을 씻어 주신 곳도 바로 ‘이 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숨어 있던 곳에 나타나셨는데, 그곳도 ‘이 방’이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을 비롯하여 유대 지도자들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순교합니다. 그들은 제자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이 위기의 시간에 제자들을 비롯한 신자들은 ‘이 방’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2:12).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방 (사도행전 1:13)’에 모여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120명 정도의 신자들이 ‘이 방’에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사도행전 1:14)”고 합니다. NASB에 이 말씀이 “These all with one mind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prayer”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가졌던 ‘한 마음 (one mind)’이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능력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능력’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 (power)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혹은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이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사도행전 1:14에 나옵니다. 그 앞에 나오는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감동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달라고 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그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비추어 지금 우리의 기도생활을 반성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을 부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자녀들이 잘 되게 해 달라고, 내 마음에 평안을 달라고, 온 식구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저 애가 나를 좋아하게 해 달라고, 오늘 시험 잘 보게 해 달라고, 오늘 인터뷰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바뀌느냐, 바뀌지 않느냐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고, 세상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이 ‘그 방’에 모였던 각 사람에게 내렸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방언 (다른 언어)’을 했다고 합니다. ‘방언’은 이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현상이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오순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각국에서 온 유대인 순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리비아, 로마, 크레타,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이 신자들이 방언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왔던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를 보십시오. 이렇게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도는 장차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져 나갈 것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귀에 신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가 각각 자기들이 사는 지역의 언어로 들렸습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본 사람들 중에는 “지금 이들이 새 술에 취해서 하는 짓거리야 (2:13, 현대어성경)!”하면서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베드로가 그 때 모였던 예루살렘의 순례자들에게 했던 해명 (설교)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유대인 여러분들과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지금부터 하는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이 일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해명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술에 취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5절). 둘째로, 오늘 여러분이 보시는 이 현상은 일찍부터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 요엘 2:28-32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이한 일을, 아래로 땅 위에서는 표적을 보여 줄 것이다.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 것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후에 크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언자 요엘 (Joel)이 살던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요엘은 기원전 835-796년 사이에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그 때는 요아스 (Joash)라는 7살 밖에 안 되는 어린 왕이 왕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 (Jehoiada)라는 훌륭한 제사장이 왕을 잘 도왔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허용함으로써 나라는 패망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역대하 24:18). 이 때,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지자가 요엘입니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요엘에게 주신 말씀 속에 장차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숨겨 있다는 것입니다. 요엘서는 3장 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성경입니다. 하지만, 이 성경 속에 마지막 때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숨겨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도 그렇습니다. 미가서도 7장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가서에 메시아 탄생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가 숨겨 있습니다. 스가랴서도 14장 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성경이지만, 이 속에 메시아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향하여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요엘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현상을 이상하게 보지 마십시오.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까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16-18절)
 
지금이 ‘마지막 때 (in the last days)’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 (승천) 때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으로 규정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만,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할 말씀은 디모데후서 3:2-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돈만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며,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고 용서도 없으며, 나쁜 말을 일삼으며, 절제하지도 못하고 잔인하며, 선한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를 배반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며, 교만하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베드로후서 3:3에는 마지막 날에 ‘scoffers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뭐라고? 복음을 들어야 구원 받는다고?” “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웃기는 소리하지 마!” 이렇게 성경의 메시지를 조롱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들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큰 일 났다는 불안한 생각이 듭니까? 아니,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런 주장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한 불법이 더욱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24:11-13)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 때에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 (those who endures to the end)’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저는 이 사람들이 바로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신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사람들, 더 나아가 이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 시대에 예언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환상을 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모두가 현실에 얽매여 있습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삽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이비 예언을 하고, 사이비 환상을 보고, 사이비 꿈을 꾸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건전한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부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지만, 부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가는 이 시대에,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꿀 사람들이 필요한데, 이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들 자기 일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꿈을 꾸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자기 살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환상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예언하게 하시고, 환상을 보게 하시고, 꿈을 꾸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고, 우리 교회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6/2/2019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Stop Doubting And Believe

요한복음 20:19-29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주로 바울이라는 사람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 또래들 가운데 자기보다 더 열심이 유대교를 믿은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의 열심의 방향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이 지도를 한번 보세요. 이 지도가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던 지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멀리 일루리곤 (Illyricum)까지 광활한 지역입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 15:19, 23-24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 이제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내가 일할 만한 곳이 없고 (There is no more place for me to work in these regions), 또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기를 원했으므로,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여러분을 방문하여 잠시,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기쁨을 나누다가,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으로 가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 외에 베드로라든지, 바나바, 아볼로 같은 사도들의 행적이 조금 나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같은 시기에 나머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어디선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마 (Thomas) 같은 사도는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현재 인도에 도마가 세운 교회들이 있습니다. 도마가 모두 8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때가 A.D. 52년이었습니다. 바울이 한창 지중해 연안을 무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던 때와 일치합니다. 잠깐 도마교회 슬라이드를 몇 장 보여 드리겠습니다. 현재 인도에 기독교 인구가 약 3% 정도 되고, 힌두교 신자들이 약 83% 정도 됩니다. 의외로 불교는 1%, 이슬람교는 11%에 그치고 있습니다.
 
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9절에 ‘같은 날 (On the evening of that first day of the week)’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그 날 저녁을 말합니다. 새벽 어두컴컴한 때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그 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들어오셨는지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전해 주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요한복음 14:27)”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평안 (샬롬)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이 말씀을 읽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우리 속에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 최선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 외에도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이 제재로공급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갈 때 먼저 그 집에 평안을 빌어줘라 (When you go into a house, say, ‘Peace be with you (마태복음 10:12)’”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만날 때마다 서로서로 하나님의 평안을 빌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본 제자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아, 이 분이 우리 주님 맞구나.” “정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어!” “정말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 맞구나!” “주님이 살아나셨으니 우리가 무서워할 필요가 없구나!” 제자들은 모두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두모 (Didymus)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다”고 했지만, 도마는 자기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25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의심장이 도마”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도마를 ‘회의론자 (skepticist)’라고 하기도 합니다. 회의론자는 자신의 이성(reason)을 인식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의론자’라고 합니다. 도마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주일 후에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다시 오셨다고 생각합니까? 도마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도마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기 위하여 다시 도마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도마는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겁을 먹고 있을 때도 도마는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Let us go too, and die with Jesus., 요한복음 11:16)”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도마는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 중에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도마 한 사람만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모르는데 저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요한복음 14:6) 우리는 모두 도마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 때 도마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에 대하여 이처럼 분명한 말씀을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도마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도마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7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Stop doubting and believe!”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KJV에는 “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ing”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unbelieving’과 ‘believing’이라는 말은 시각적으로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앞에 ‘un’이 붙으면 믿지 않는 것이고, ‘un’이 떨어지면 믿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캠블 몰간 (G. Campbell Morgan, 1863-1945, 영국) 쓴 빌레몬서를 읽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다루시는 구나” 하고 큰 감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 (Onesimus)라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전에는 그대에게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나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Formerly he was useless to you, but now he has become useful both to you and to me).” (빌레몬서 1:11) 이 말씀에도 ‘useless’라는 말과 ‘useful’이라는 말이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없는 사람과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시각적으로 보아도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뒤에 ‘~less’라는 붙으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ful’이라는 말이 붙으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됩니다. 희랍어 성경에도 쓸모 없는 이란 말은 ‘acrestos’라고 나와 있고, 쓸모 있는 이란 말은 ‘eucrestos’라고 나와 있습니다. 앞에 ‘a~’가 붙느냐 ‘eu~’가 붙느냐에 따라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길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앞이나 뒤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에 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회의론자 (skepticist)’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거기에 네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라는 사람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도마가 지금은 “난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한번만 확인되면 금방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도마는 그 자리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My Lord and my God)!”이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에게서 ‘un~’자가 떨어져 나가고, ‘~less’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도마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도마를, 만일 주님이 그런 도마를 그냥 내버려 두셨더라면 하나님의 일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를 만나 그가 의심하는 것을 풀어 주셨습니다. 손바닥에 남아 있는 못 자국도 만져 보게 하시고, 허리에 남아 있는 상처 자국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남아 있는 의심의 꼬리를 떼 주셨습니다. ‘~less’가 떨어지고, 그 자리에 ‘~full’이 붙었습니다. ‘a~’가 떨어지고 그 자리에 ‘eu~’가 붙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A.D. 52년에 도마는 아무도 가 본적이 없는 인도에 갔고, 그 때 도마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힌두교가 82%인 척박한 땅에서 열매를 맺고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이 말씀은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도마처럼 직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대신 더 큰 축복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이 경험했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고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 (히브리서 11:1-2)”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지 않고도 자신에게 붙어 있는 의심과 불신의 꼬리를 떼어내는 사람에게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안셀름 (St. Anselm, 1033-1109)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습니다 (I believe so that I may understand)”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해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I understand so that I may believe)” 꼭 이렇게 말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논리적인 진리나, 실험적인 진리, 과학적인 진리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믿음이 우선입니다. 믿으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음으로 이해되는 진리입니다. 

5/26/2019 | 야외예배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This Is My Father's World

시편 8편

오늘은 전체적으로 햇볕이 나고, 낮 최고 기온이 84도나 된다고 합니다. 좀 더운 날씨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비가 오지 않고 춥지 않은 날도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린 장언한지요?” 그랬습니다, 똑 같은 말씀이 마지막 절에도 나옵니다. “O LORD, our Lord,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Your glory is higher than the heavens.” 직역하면, “오 주님 주님의 위엄 있는 이름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주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습니다” 이렇게 되겠네요. 예전 개역성경에는 이 말씀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야외예배 때 부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찬송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저께 우연히 이 찬송을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찬송의 3절 가사가 의외의 가사인 것입니다. 이 찬송은 Maltbie Davenport Babcock (1858-1901, 미국)이라는 분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사람은 뉴욕 Lockport의 목사였습니다. 이 목사님에 대한 기사를 찾아 봤더니, 아주 탁월한 설교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설교는 교회 내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하이킹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Lockport 근처의 깎아 지른 듯한 절벽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절벽 위에 올라가서 보면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는데, 숲도 보이고, 농장들도 보이고 과수원도 보이고, 저 멀리 호수도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시적 영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자주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나는 나의 아버지의 세상을 보러 간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찬양시의 제목이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나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세상입니다)”입니다.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내 아버지의 세상,
Oh, let me never forget
나는 결코 잊지 않겠네
That though the wrong seems oft so strong.
종종 악이 너무나 강하게 보일지라도
God is the ruler yet
하나님이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This is my father's world; Why should my heart be sad?
이곳이 내 아버지의 세상인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할까?
The Lord is king, let the heavens ring; God reigns, let the earth be glad
주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니, 하늘은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니 땅은 즐거워하라.

Babcock 목사님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이렇게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을까?” Babcock 목사님은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비록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악이 만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통치하고 계신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The battle is not done yet). 그러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8편 말씀의 은혜를 잠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8편 속에도 뭔가 우리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썼다고 합니다. 이 시편은 “지휘자를 따라 기쁜 곡조로 부른 노래”라고 나와 있고 “To be accompanied by a stringed instrument”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본래 수금 연주의 천재였습니다. 수금은 작은 사이즈의 하프(harp)와 같은 악기입니다. 사울에게 다윗을 처음 소개할 때 다윗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수금 을 연주하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수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며 말도 잘하고 잘 생겼습니다. 게다가 여호와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16:18) 이렇게 해서 다윗이 사울에게 발탁되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이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참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1, 9절)?”라고 했습니다. 누가 꾸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연은 아름다울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품 속에 그 작가의 혼이 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신성 (神性)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 있다 (로마서 1:20)”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을 한번 둘러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잎이 돋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억지로 꾸미거나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4-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지요?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우셨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들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t you made man a little lower than Elohim.” ‘Elohim (엘로힘)’이란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엘로힘’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도나이 (주님)’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무심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야!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래?”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세요. 다윗이 이 시편을 쓰면서 발견한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워 주신 존재입니다 (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You gave them charge of everything you made (6절)”라고 했습니다. ‘챠지 (charge)’라는 말은 돌본다,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계속해서 아름답게 돌보라는 책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겸손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생명 복제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잘 모르지만 복제산업이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로 개에 대한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내보다는 해외로부터 많은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그렇게 복제해서 태어난 개들이 원래 개와 똑 같이 생기긴 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행동이 좀 이상하고, 힘이 없고, 병에 잘 걸리고 일찍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참 잘 되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과학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할 때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참 두렵습니다. 인간이 자기 본분인 겸손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을 돌보는 ‘charger (챠져)’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때 인간이 사는 세상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5/19/2019 | 부활절 다섯째 주일

그러면, 내 양을 먹여라 Then Feed My Lambs

요한복음 21:12-19

오늘은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The Fifth Sunday of Easter)입니다. 부활절은 지나간 이벤트가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제자들의 삶 속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이해하는 분도 계시고,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6:7, 14, 14:26)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 보혜사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조금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존재 양식 (mod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일곱 제자들을 만나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이 갈릴리 바다인 것으로 보아 일곱 제자는 어부 출신들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고 하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굳이 짐작해 본다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정말 누구인지 익명(匿名, anonymous)으로 남겨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예수님께 드렸는데,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24:42-43).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보았을 때는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면서 유령이라는 의심이 풀어졌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면서 그분이 주님이신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21:1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ne of the disciples dared to ask him, ‘Who are you?’ They knew it was the Lord.”
 
요한복음에도 그렇고, 누가복음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런 주장에 대하여 쐐기를 박았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식사를 하셨다니까요. 예수님이 영 (유령)이시라면 어떻게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다는 성경 말씀이 별 것 아닌 사소한 말씀처럼 보이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올바른 교리를 만드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셨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 (Simon)이었습니다. 시몬은 동생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요한복음 1:40)고 하지요? 예수님은 시몬을 처음 봤을 때 마치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이제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요한복음 1:42)”고 하셨습니다. ‘게바 (Cephas)’는 아람어로 반석 (rock)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 (Πέτρος)’ 역시 반석 (rock)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피터 (Peter)’이고, 한국어로는 ‘베드로’입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태복음 16:16)”이런 신앙고백을 했을 때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존재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 확실히 베드로는 중요한 비중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베드로를 시험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바보가 아닙니다. 베드로 한 사람을 시험에 빠지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베드로 곁을 떠나지 않고 베드로를 시험에 빠지도록 끊임없이 유혹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22:31-32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를 마치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네가 돌아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여라.”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like wheat. But I have pleaded in prayer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should not fail. So when you have repented and turned to me again, strengthen your brothers.”
 
베드로 (시몬) 한 사람을 놓고 엄청난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베드로를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베드로가 믿음을 져버리지 않도록 계속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의 시험에 넘어갈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반드시 다시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 이 사람이 형제 자매를 ‘strengthen (강하게 세우는)’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 영적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까요? 사탄이 승리할까요? 예수님이 승리할까요?
 
예수님께서 예측하신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한 심부름 하는 소녀가 (a servant girl) 베드로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이 말에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또 한 소녀가 “이 사람은 분명히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예요” 라고 베드로를 보고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니까요!”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공관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피해 옮겨 다닙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히 너는 그 사람과 한 패야. 네 말씨를 보니 틀림 없어!”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맹세코 그 사람을 모릅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베드로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베드로를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탄의 계획이 성공하는 순간입니다.
 
Eugène Burnard (1850-1921)라는 사람이 그린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표정을 그린 것입니다. 이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다시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큰 소리 치면서 “저는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I am ready to die for you., 요한복음 13:38)”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Even if everyone else deserts you, I will never desert you., 마태복음 26:33)!” 하고큰 소리쳤던 베드로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께 큰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15절)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난도, 정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베드로에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몇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냥 베드로라고 부르거나 시몬이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시몬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아버지 이름을 부른 것은 시몬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깨우쳐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나는 너의 인간적인 연약함 (human weakness)을 잘 알고 있다. 너 또한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강철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결코 넘어지지 않고 실수 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손을 붙잡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실수하고 또 실수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신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베드로 속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지, 여전히 지금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 이상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명감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사명감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6:14절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Do everything in love (NIV, NLT)”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 (NASB, NKJV)” 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사랑이 동기 (motivation)가 되어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차가운 의무감으로, 내가 맡은 일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모든 일은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바리새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난 얼굴로 돌아다닙니다. 사역도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랑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는 봉사와 섬김과 헌신 속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신속하게 사랑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이 드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럴 것이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확인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질문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예,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15, 16, 17절)”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여라!” “내 양을 돌보아라!” “내 양을 먹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네가 돌이긴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회개한 후에 형제를 굳게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누가 승리하였습니까? 베드로를 넘어뜨린 사탄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한번 넘어졌다고, 한번 실수했다고, 한번 관계가 깨졌다고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님께 대한 사랑이 남아 있는 이상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