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6/16/2019 |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Of Nazareth
사도행전 3:1-10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강림’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마지막 날’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서기 33년 어느 날, 오후 3시쯤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문이 여러 개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을 제일 많이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 앞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걷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날마다 그 시간에 이 사람을 메고 와서 그 자리에 앉혀 놓았던 것입니다. 마치 물건처럼, 저녁에는 누군가가 이 사람을 메고 가서 어디에 들여 놓았을 것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한 것이라도 그 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평범한 것이 비범한 것이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개입 (God’s intervention)’이라고 합니다.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平凡)한 (ordinary)’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개입해 들어오시면 ‘비범(非凡)한 (extraordinary)’ 것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범한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해 들어오시기를 열심이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그 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이 사람이 손을 벌리며 돈을 좀 달라고 구걸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눈 여겨 보면서,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Peter and John looked at him intently, and Peter said ‘Look at us’”라고 나와 있습니다. ‘intently’라는 말은 ‘강렬하게, 뚫어지게,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여’라는 뜻입니다. 위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 왜 그 날 그 시간에 두 사람은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이 사람을 그런 눈을 바라 봤을까요? 아니, 그보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 시간에 어디에 있고,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만 기도하러 왔을까요? 바쁜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피치 못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그 시간에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가다가 이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이 일이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고, 별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작고 사소한 일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보시오!”라는 두 사도의 단호한 말에 이 사람은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The lame man looked at them eagerly, expecting some money., 5절)”저는 이 순간이 바로 이 불쌍한 사람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6절) “I don't have any silver or gold for you. But I'll give you what I hav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get up and walk!” (New Living Translation)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껑충껑충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 기적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God’s intention and purpose)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서기 33년 어느 날 오후 3시에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그 때 일어났던 이 기적은 우연히 어쩌다가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한 권 가지고 갔습니다. 그 책이 톰 라이트 (Tom Wright)가 쓴 “톰 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답하다 (Simply Jesus)”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소름이 끼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톰 라이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유대인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의 문 (Ths Seep Gate)’ 바로 옆에 있는 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성전 바로 앞에 있는 연못입니다. 여기에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성전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전이 할 수 없고,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다고, 버젓이 성전 앞에서, 공개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intentionally) 38년된 병자들 고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적 역시 ‘아름다운 문’ 앞에서, 바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삽시간에 이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사도들은 이 소문을 듣고 모여 온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이 이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3:16) 이 사람에게 일어난 이 기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로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난 이 기적에 대한 소문은, 편협한 유대교에 대한 소문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은 말씀을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의 입장에서 말해 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시간부터 우리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절망도,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불행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의미가 달라집니다. 걷지 못했던 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로마서 8:28)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불행한 이야기도 전혀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기적이 처음으로 예수님 없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기적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후에 처음으로 이 기적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10:8)”라고 말씀하셨고, 여러 차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한복음 20:21-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이 성령강림절 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곧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 (요한복음 14: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인 되리라 (사도행전 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는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능력이 오늘 나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만 이런 능력이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어느 한 곳에도 예수님께서 개인적인 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내 속에 있는 능력을 드러내라고 하는 요구를 사탄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만일 그날 베드로와 요한이 사적(私的)인 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려고 했더라면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 없다 (6절)”고 선언하였습니다.
오후 3시에 무심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이라면 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면서 봤던 ‘아름다운 문’ 옆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일어나 걸은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로 인해 크게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When they realized he was the lame beggar they had seen so often at the Beautiful Gate, they were absolutely astounded!” (10절) ‘astound’라는 말은 놀라움으로 완전히 압도 당했다는 뜻입니다.
삽시간에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I always pray with joy being confident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carry it on to completion until the day of Christ Jesus (나는 늘 기쁨으로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마지막 그 날까지 그 모든 선한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1:6)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 (a good work)’을 시작하셨고, 그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 (calling)’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소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소명’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과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왜 내 안에 능력이 없다고 단언합니까? 내 안에 ‘착한 일’을 계속해서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필요한 때에 하나님을 우리를 능력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6/9/2019 | 성령강림절
예언과 환상과 꿈 Prophecy, Vision And Dreams
사도행전 2:14-21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 (power)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혹은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이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사도행전 1:14에 나옵니다. 그 앞에 나오는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6/2/2019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Stop Doubting And Believe
요한복음 20:19-29
제가 이런 말을 길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앞이나 뒤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에 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회의론자 (skepticist)’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거기에 네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라는 사람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도마가 지금은 “난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한번만 확인되면 금방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도마는 그 자리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My Lord and my God)!”이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에게서 ‘un~’자가 떨어져 나가고, ‘~less’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5/26/2019 | 야외예배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This Is My Father's World
시편 8편
오늘은 전체적으로 햇볕이 나고, 낮 최고 기온이 84도나 된다고 합니다. 좀 더운 날씨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비가 오지 않고 춥지 않은 날도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린 장언한지요?” 그랬습니다, 똑 같은 말씀이 마지막 절에도 나옵니다. “O LORD, our Lord,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Your glory is higher than the heavens.” 직역하면, “오 주님 주님의 위엄 있는 이름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주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습니다” 이렇게 되겠네요. 예전 개역성경에는 이 말씀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야외예배 때 부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찬송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저께 우연히 이 찬송을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찬송의 3절 가사가 의외의 가사인 것입니다. 이 찬송은 Maltbie Davenport Babcock (1858-1901, 미국)이라는 분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사람은 뉴욕 Lockport의 목사였습니다. 이 목사님에 대한 기사를 찾아 봤더니, 아주 탁월한 설교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설교는 교회 내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하이킹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Lockport 근처의 깎아 지른 듯한 절벽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절벽 위에 올라가서 보면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는데, 숲도 보이고, 농장들도 보이고 과수원도 보이고, 저 멀리 호수도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시적 영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자주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나는 나의 아버지의 세상을 보러 간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찬양시의 제목이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나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세상입니다)”입니다.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내 아버지의 세상,
Oh, let me never forget
나는 결코 잊지 않겠네
That though the wrong seems oft so strong.
종종 악이 너무나 강하게 보일지라도
God is the ruler yet
하나님이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This is my father's world; Why should my heart be sad?
이곳이 내 아버지의 세상인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할까?
The Lord is king, let the heavens ring; God reigns, let the earth be glad
주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니, 하늘은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니 땅은 즐거워하라.
Babcock 목사님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이렇게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을까?” Babcock 목사님은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비록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악이 만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통치하고 계신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The battle is not done yet). 그러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8편 말씀의 은혜를 잠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8편 속에도 뭔가 우리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썼다고 합니다. 이 시편은 “지휘자를 따라 기쁜 곡조로 부른 노래”라고 나와 있고 “To be accompanied by a stringed instrument”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본래 수금 연주의 천재였습니다. 수금은 작은 사이즈의 하프(harp)와 같은 악기입니다. 사울에게 다윗을 처음 소개할 때 다윗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수금 을 연주하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수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며 말도 잘하고 잘 생겼습니다. 게다가 여호와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16:18) 이렇게 해서 다윗이 사울에게 발탁되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이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참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1, 9절)?”라고 했습니다. 누가 꾸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연은 아름다울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품 속에 그 작가의 혼이 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신성 (神性)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 있다 (로마서 1:20)”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을 한번 둘러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잎이 돋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억지로 꾸미거나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4-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지요?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우셨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들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t you made man a little lower than Elohim.” ‘Elohim (엘로힘)’이란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엘로힘’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도나이 (주님)’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무심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야!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래?”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세요. 다윗이 이 시편을 쓰면서 발견한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워 주신 존재입니다 (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You gave them charge of everything you made (6절)”라고 했습니다. ‘챠지 (charge)’라는 말은 돌본다,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계속해서 아름답게 돌보라는 책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겸손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생명 복제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잘 모르지만 복제산업이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로 개에 대한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내보다는 해외로부터 많은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그렇게 복제해서 태어난 개들이 원래 개와 똑 같이 생기긴 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행동이 좀 이상하고, 힘이 없고, 병에 잘 걸리고 일찍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참 잘 되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과학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할 때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참 두렵습니다. 인간이 자기 본분인 겸손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을 돌보는 ‘charger (챠져)’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때 인간이 사는 세상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