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2019 |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고린도 God’s Strategic City, Corinth

사도행전 18:1-11

바울에게 있어서 ‘아테네 (Athens)’ 선교는 아쉬움이 남는 선교였습니다. ‘아테네’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70-399), 플라톤 (Plato, BC 424-348),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 같은 철학자를 배출한 곳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아테네’에 바울이 도착한 것은 서기 50년 경으로 2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아테네’ 시내를 한바퀴 돌아 봅니다. 여기 저기 대리석으로 조각한 신상들이 있고, 그 밑에는 신들의 이름들이 새겨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본 신상 밑에는 ‘Unknown God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내 한 중심에 있는 ‘아레오바고 (Areopagus)’ 광장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스토익 철학자들 (the Stoic philosophers)’과 ‘에피큐리안들 (the Epicureans)’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눈에 비친 ‘아테네’ 사람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테네 사람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같이 보인다.” (사도행전 17:21)
 
여러분 같으면, 이런 ‘아테네’의 분위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아테네’의 분위기에 맞게 매우 ‘intellec¬tual preaching (지적인 설교)’을 했습니다. 철학자들을 의식했는지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는 ‘예수’ 혹은 ‘그리스도’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의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실패라고 볼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바울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선교였습니다.
이렇게 ‘아테네’ 선교를 마치고 다음 선교지로 간 곳이 ‘고린도 (Corinth)’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Achaia)’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로, 교통의 요충지였고, 그 일대에서 가장 번창했던 상업도시였습니다. ‘아테네’와는 약 80-9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고린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프로디테 (Aphrodite, 비너스) 신전’이었습니다. 신상의 높이가 600ft였다고 하니까 그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신전에 1,000명의 신녀(神女)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두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은 1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린도’는 다민족 (multiethnic)이 모여 사는 도시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선교를 하면서 바울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였을 때, 웅변술이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I first came to you, dear brothers and sisters, I didn't use lofty words and impressive wisdom to tell you God's secret plan. For I decided that while I was with you I would forget everything except Jesus Christ, the one who was crucified.” 제가 보기에 이 말씀은 ‘고린도’에서는 ‘아테네’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입니다.
 
어느 선교지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선교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아, 고린도가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도시였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특히 눈에 들어오는 말씀은 9-10절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조용히 있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그러므로 아무도 너를 공격하거나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 내가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략(戰略, strategy)’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용사는 ‘strategic (전략적인)’이란 말입니다. ‘전략적’이라는 말은 꼭 필요하고, 매우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라이프 스팬 (life span)에 대하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전략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My time has not yet come, 요한복음 2:4, 7:6, 7:8, 13:1, 13:3)”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때는 인내하면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는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략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길이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늑대 무리 속으로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Therefore, 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마태복음 10:16) 지혜로울 때가서는 매우 지혜로워야지 절대로 무모한 생각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크리스천은 순결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남을 해치거나 악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도시에서 네가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중단하지 마라. 이 도시에 나의 백성들이 많이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음으로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궁금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가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는 11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도시에 오랫동안 머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이렇게 오래 머문 것은 ‘고린도’ 생활이 좋았거나 ‘고린도’가 매력적인 도시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저께 토요일 새벽 기도 마치고,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분은 전에 우리교회에 잠깐 나오셨는데, 결혼하고는 미국인 남편과 함께 미국교회에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이 그동안 남편과 함께 중국 상해 (Shanghai)에 가서 일 년 동안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상해 생활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 삼 년을 더 있기로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고린도’ 역시 바울에게는 힘든 도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못살게 굴었다는 말씀이 6-7절에 나옵니다. 또 재판장으로 끌고 갔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12절). 견디다 못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6절), 이 도시에 나의 백성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 말씀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히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성취하도록 소원과 능력을 주시며 당신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For God is working in you, giving you the desire and the power to do what pleases him).”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 (desire)과 능력 (power)’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돕지 않으십니다. 그 때는 우리 힘으로, 우리 노력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말씀을 잘 듣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장래 일을 계획할 때 그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1-2절) 이것이 우리 힘으로 하는 일들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계획하십시오.
 
 ‘고린도’가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임을 알고 ‘고린도’ 사역에 전념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을 도와 주시는지 보십시오. 어떤 ‘소원’을 주셨는지, 어떤 ‘능력’을 주셨는지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에서 뜻하지 않게 같은 직업을 가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Priscilla and Aquila) 부부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부는 바울에게 평생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이 부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 I am thankful to them).” (로마서 16:4) 바울이 말하는 이 일이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부는 바울과 생명을 나누는 동역자가 됩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실라가 고린도 사역에 가담합니다( 5절). 또 한 사람, 하나님께서 ‘아볼로 (Apollos)’라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아볼로’는 어느 날 갑자기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그가 에베소를 거쳐 고린도에 왔습니다. 고린도에 왔다는 것은 ‘아볼로’ 역시 고린도 선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볼로’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고린도 사역은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디모데와 실라, 그리고, ‘아볼로’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I planted the seed in your hearts, and Apollos watered it, but it was God who made it grow).” (고린도전서 3:6)
 
제가 보스턴에 온 것이 1986년이었습니다. 33년 간 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동안 줄 곧 제가 생각했던 것은 보스턴이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라는 것입니다. 보스턴은 1세기의 ‘고린도’와 많이 닮았습니다. ‘고린도’가 그랬던 것처럼, 보스턴에 많은 인종이 섞여 살고, 많은 문화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보스턴은 미국 정신 (The Spirit of America)의 발상지이고, 학문의 도시입니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될 청년들이 보스턴에 모이고 있습니다.
 
이런 보스턴이 하나님께 전략적인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리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더 커집니다. 우리 교회가 단순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보스턴의 청년들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했던 것처럼, 보스턴의 청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면 그저 보스턴에서 공부하면서 가까운 한인교회에 나갔다는 생각 밖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보스턴에 나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한인교회에서 나를 믿음으로 길러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 그림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계획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 (desire)’과 ‘능력 (power)’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목사인 저 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런 생각을 공유해야 합니다.

7/21/2019 |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유럽 대륙으로 건너 간 복음 The Gospel Spread Across To The European Continent

사도행전 16:6-15

바울과 바나바는 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상치 않았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예루살렘 공의회를 준비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던 어느날,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이 심히 다투어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되었다 (Their disagree¬ment was so sharp that they separated, 사도행전 15:39)”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전도여행을 합니다. 바울과 갈라선 바나바의 활약상은 아쉽게도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욱 조심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시리아 (Syria)와 길리기아 (Cilicia)를 거쳐 아시아 (Asia)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막힌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기 때문에 (because the Holy Spirit had prevented them from preaching the word in the province of Asia at that time, 6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시아로 들어가지 못하고 ‘부르기아 (Phrygia)’와 ‘갈라디아 (Galatia)’를 거쳐 ‘무시아 (Mysia)’로 갔다가 북쪽 내륙 ‘비두니아 (Bithynia)’로 가려고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령께서 그 계획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영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but again the Spirit of Jesus did not allow them to go there, 7절)”고 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바울과 실라는 ‘무시아’의 항구도시 ‘드로아 (Troas)’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성경 말씀을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룩하고, 참되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그분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내가 네 앞에 문을 열어 두었으니, 아무도 그 문을 닫지 못할 것이다 (This is the message from the one who is holy and true, the one who has the key of David. What he opens, no one can close; and what he closes, no one can open....I have opened a door for you that no one can close).” (요한계시록 3:7-8)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은 아무도 열 수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성경에 ‘발람의 길 (the footsteps of Balaam, 베드로후서 2:15)’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모압 (Moab)이라는 나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 모압의 왕은 ‘발락 (Balak)’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발락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땅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발람’이라는 신통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발람’에게 백지 수표를 주면서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여차저차해서 결국 ‘발람’은 ‘발락’이 보낸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발람’은 입으로는 “발락 왕이 은과 금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집을 준다 해도, 나는 내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그 민족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시는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민수기 22:18)”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벌써 발락이 제시하는 돈의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발람’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 때 ‘발람’은 나귀를 타고 좁은 담장 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귀의 눈에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들고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귀가 천사의 칼을 피하려고 담장에 바싹 붙는 바람에 타고 있던 ‘발람’의 발에 상처가 났습니다. 화가 난 ‘발람’이 나귀를 때립니다. 나귀가 다시 길을 가는데, 아주 좁은 길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나귀의 눈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귀는 피할 길이 없어 가다 말고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화가 난 ‘발람’이 또 나귀를 때립니다. 그랬더니 나귀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를 때립니까?” 하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 ‘발람’은 “네가 길을 제대로 가지 않으니까 때리는 것이 아니냐?” 나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에게 말합니다. “네가 하는 일이 악하기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온 것이다. 만약 나귀가 비켜서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내 칼에 죽었을 것이다.” (민수기 22:32-33)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발람’이 가는 길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하는 이 황당한 일을 겪으면서 ‘발람’은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막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포기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계속 그 길을 갑니다. 성경은 이것을 ‘발람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 길이 파멸의 길인지 모르고 계속해서 그 길을 갑니다. 이 말씀 속에 ‘발람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길을 막으시는 것은 다른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한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시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얻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저의 삶 속에서도 이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아시아 선교의 문을 막으신 하나님은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바울에게 마케도니아 사람에 대한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9절)”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본 바울은 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럽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저는 성경 속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확신하고는 즉시 마케도니아 (Macedonia)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드로아 (Troas)를 떠나 곧장 사모드라게 (Samothrace)로 갔다가 이튿날, 네압볼리 (Neapolis)로 갔습니다. 다시 네압볼리를 떠나서 로마의 식민지요,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빌립보 (Philippi)로 갔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그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10-12절) 그렇게 꽉 막혀 있던 길이 확 뚫리지 않습니까? 일사천리(一瀉千里)로 길이 열립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미 빌립보 선교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 (The Mission of God)’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Yahweh-Yireh, 창세기 22:14)’이신 하나님은 때가 되어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고 유럽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 머물던 복음이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 ‘빌립보 (Philippi)’에 전해졌습니다. 몇 년 전 터키 성지순례를 하면서 ‘에게 바다 (Aegean Sea)’를 보았습니다. ‘에게 바다’는 해협(海峽, straits)이니까요. 멀리 마케도니아가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좁은 바다입니다. 저희 성지 순례팀은 소형 배를 타고 ‘에게 바다’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그 때 제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바로 이 ‘에게 바다’를 건너서 마케도니아 빌립보로 건너갔겠구나 생각하니까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여러분, 이 글을 한번 보십시오. “A Christian historian said that the ship that carried the Apostle Paul carried the history of the world in it. Arnold Toynbee said in his ‘A Study of History’ that,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한 기독교 역사가는 사도 바울을 태웠던 그 배는 그 배 안에 세계 역사를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작은 목선이 소아시아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을 태웠을 때, 세계의 중심은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Our Daily Bread, 9/11/2011) 토인비의 말은, 복음이 유럽 대륙에 전해 짐으로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 때까지 변방이었던 유럽 땅이 세계의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선교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사적으로 볼 때, 빌립보 선교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내가 원하는 뜻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한 쪽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는 배를 탔을 때,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기도처를 찾았을 때 그곳에 이미 ‘루디아 (Lydia)’라는 한 여자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One of them was Lydia from Thyatira, a merchant of expensive purple cloth, who worshiped God. As she listened to us, the Lord opened her heart, and she accepted what Paul was saying).” (14절)

소름 돋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루디아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자매님은 고향이 어디세요?” “예, 저는 두아디라 사람이예요.” “뭐라고요? 두아디라 출신이라고요?” 여러분, 두아디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소아시아에 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려고 했다가 들어가지 못한 곳에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를 만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든든한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여차여차해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아 선교의 문을 닫으시고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았는데,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다니 말이 됩니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 밖에 없는데, 감옥에 갇히다니, 이런 일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이 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 감옥의 이름 없는 간수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 간수 한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수감되고 고문을 받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집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었다 (16:33)”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많은 고문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된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난과 절망과 아픔과 실패와 기타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석하는 열쇠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온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6:31) 간수와 그 집안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고작 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있었단 말입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신 분입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을 빌립보로 가는 목선을 타게 만들었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에 수많은 유럽 대륙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은 유럽 문명을 일으키고,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7/14/2019 |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예루살렘 회의 The Council Of Jerusalem

사도행전 15:1-6

오늘 설교 제목을 ‘예루살렘 회의’라고 했습니다만, 영어로는 ‘Council’입니다. ‘협의회’ 혹은 ‘공의회’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설교 제목에는 생소한 ‘공의회’라는 말 대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회의’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교회가 교리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어떤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론을 벌이고 입장을 결정하는 것을 ‘공회의’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시기를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다시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가 대략 AD 49-50년경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아르메니안 구역 (The Armenian Quarter)’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크리스천 지역 (The Christian Quarter)’, ‘유대인 구역 (The Jewish Quarter)’ ‘무슬림 구역 (The Muslim Quarter)’ 이렇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거든요?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된 후, 예루살렘 성지를 찾아 나선 첫 순례자들 중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 (Armenia)는 일찍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예루살렘에 관심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팔에 그 연도를 문신으로 새기고 평생 기념일로 삼을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유대 땅에 머물면서 수도원 공동체를 만든 것이, 오늘날 아르메니아인들이 예루살렘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최대 성지로 여기는 곳이 있는데, 바로 아르메니안 구역에 있는 ‘성 야고보 교회’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던 곳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중요한 문제는, 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중요한가, ‘예루살렘 공의회’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공의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비가 많이 내려 물줄기가 생겼습니다. 그 물줄기가 흘러가다가 장애물을 만납니다. 장애물을 만나면 물줄기의 방향이 이쪽으로 바뀔 수도 있고, 저쪽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 물줄기의 방향을 결정한 곳이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 공의회’ 결정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유럽으로,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북 아메리카로, 남 아메리카로 복음의 강물이 흐르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문제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 공의회’는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회의였습니다. 이 말은 그 회의에서 다루었던 문제가 비단 안디옥 교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1장에 키프로스와 구레네 사람들이 이방인들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일찍이 해외에 나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디이스포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코스모폴리탄적인 마음 (cosmopolitan mind)’이라고 지난 설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은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주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손길 (the hand of the Lord)’이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안디옥 교회의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믿어왔던 유대교적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교회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조사관을 파견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조사관으로 파견된 사람이 ‘바나바 (Barnab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세요.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And many people were brought to the Lord).” (사도행전 11:24) 바나바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나바가 본 안디옥 교회 현상은 전혀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현상을 심각하게 보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와 달리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교회에 내리고 있다고 보고서를 썼습니다. 만일 그 때 조사관으로 파견된 사람이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른 식으로 안디옥 교회 현상을 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사이에,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를 파송 하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선교사 파송된 사람은 그 교회 조사관으로 온 바나바와 바나바가 데려 온 사울이었습니다. 이 둘이 선교사로 나가 각 도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 우리가 말하는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 (The First Missionary Journey of Paul)’입니다. 바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Cyprus)를 거쳐서 터키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전도여행이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공의회’는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충돌로 말미암아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린 회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전도여행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에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은 ‘제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대한 문제가 터졌습니다. 유대에서 온 형제들 몇 사람이 “모세가 가르친 풍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15:1)”라고 교인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들과 바나바와 사울 사이에 격렬한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aul and Barna¬bas disagreed with them, arguing vehemently. Finally, the church decided to send Paul and Barnabas to Jerusalem, accompanied by some local believers, to talk to the apostles and elders about this question.” (15:2) 이렇게 안디옥 교회의 요청으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예루살렘 공의회’를 준비하시고, 결론에 이르기까지 회의를 직접 운영하신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말이 잘 이해가 안 되고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심해서 읽어보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 (그리스인들)이 들어 온 것은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동안 예루살렘 교회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바리새인 출신 신자들 중에 “이방인이 교회로 들어 온 경우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15:5)”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세 사람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야고보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베드로의 마음을 이미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방인 고넬료 (Cornelius, who was a captain of the Italian Regiment)의 집을 방문한 베드로의 말이 압권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유대인이 이방 사람을 사귀거나 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유대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28, 34)
 
회의 석상에서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성경에는 ‘많은 토론 (a long discussion, 15:7)’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discussion’ ‘debate’ ‘dispute’이라는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보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찌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모두 질 수 없었던 짐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십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We believe that we are all saved the same way by the undeserved grace of the Lord Jesus).” (15:8-11)
 
베드로가 말을 마쳤을 때 회의장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15:12). ‘조용하다’는 것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말로 ‘암묵적 (暗默的)인 찬성’이라고 합니다. 말은 안 하지만, 찬성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바나바와 사울이 전도여행 중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서 일하신 체험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정리를 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인데, 언제부터인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 요한과 함께 ‘기둥 같은 사람 (who were reputed to be pillars, 갈라디아서 2:9)’으로 인정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방인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려고 그들을 찾아오신 이야기를 베드로가 잘 말해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성경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 형제들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고,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을 먹지 말 것,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 것,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 것을 권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5:19-20)
 
AD 50년에 열렸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때 만약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하고 유대인의 풍습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더라면,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데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 공의회’의 물줄기를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사용하셨고, 바나바와 사울을 사용하셨고, 야고보를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것처럼 로마 군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일이 정말 하기 싫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줄 그 당시에는 몰랐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Steve Jobs)가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연설문이 생각납니다. 최고의 연설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점들이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찌 연결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뒤돌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연관성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작은 점들이 어떻게든지 미래에 연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잡스가 말하는 ‘점들 (dots)’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의미 없는 일들일 수도 있고, 하기 싫은 일들일 수도 있습니다. 절망과 실패의 경험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그 당시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고, 나의 미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면 이 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준비 시키시는 것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일에 반드시 사용된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7/7/2019 |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

건강한 교회의 모델 A Model For the Healthy Church

사도행전 11:19-26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날처럼 ‘교회’에 대한 개념이 혼란스러운 때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교회’를 뜻하는 희랍어는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우리교회에 적용한다면, ‘케임브리지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서 35 Magazine Street, Cambridge, Massachusetts에 있는 건물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려도 오늘날 교회들이 본래의 목적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날의 교회들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4:1-6) 이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같은 주님, 같은 믿음, 같은 세례, 같은 하나님,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 하나의 목적과 방향과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치 교회마다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교회마다 가는 방향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것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런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먼저 말씀 드리면서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교회’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안디옥교회’가 건강한 교회의 모델이 어떤 것인지 그 모델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Antioch)’이라는 곳은 지금의 시리아 (Syria)에 있는 ‘안디옥’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비시디아 (Pisidia)’라는 지역에도 ‘안디옥’이라는 곳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을 구별하기 위하여 ‘시리아 안디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제가 안디옥교회에 대한 성경 말씀을 정리해 본 결과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안디옥교회는 ‘디아스포라 (diaspora)’ 교회였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이후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박해를 피해서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피신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교회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교회를 흩을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흩어지는 시점이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만일 스데반의 순교가 없었고, 교회에 대한 박해가 없었더라면 교회는 흩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기도에 힘썼을 것입니다. 물건들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사도행전 2:47), 구원 받는 사람은 점점 불어났을 것입니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들의 모임 장소는 ‘성전 뜰’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뜰 (the temple courts)’에서 날마다 모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46).
 
그러던, 어느 날,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화가 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이것이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크리스천들은 시리아로,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로 피난을 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확신처럼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God is in control!”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control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 (the people of God)’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My Father is always at his work to this very day, and I, too, am working, NIV.” (요한복음 5:17)
 
이방인의 나라, 시리아의 안디옥에 이렇게 해서 교회가 생겼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세워진 데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1978년에 이곳 케임브리지에 생긴 데에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교회들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은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충실하도록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둘째로, 안디옥교회는 ‘Cosmopolitan Church’였습니다. ‘cosmopolitan’이라는 말이 ‘우주적인’ ‘세계적인’이라는 뜻이 잖아요? ‘cosmopolitan’이라고 하면 ‘우주적인, 세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명사형으로도 사용합니다. 안디옥에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디옥의 사람들은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리아로 피난 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오직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키프로스 (Cyprus)와 구레네 출신 사람 (Cyrene)이 있었는데, 이들은 안디옥에 이르러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19-21절)
 
어떤 사람이 이런 제목의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하필이면 시리아 안디옥을 피난처로 선택했을까?” 매우 흥미 있는 제목입니다. 그 글의 내용 중에 안디옥은 ‘cosmopolitan city’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당시 인구는 300,000-500,000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에 생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처음에는 그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에 키프로스 출신 유대인과 구레네 출신 유대인이 들어 옴으로써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 해외 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스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청년들이 출석하여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들이 보스턴에서 생활하는 것은 좋은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청년들에게 주시는 보이지 않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국을 떠나 이 보스턴에 와서 공부함으로써 세계를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cosmopolitan world’를 보고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곳의 교수들이나 학자들이 얼마나 마음이 열려 있습니까? 다른 분야나 다른 이론에 대하여 서로 배우는 열린 마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공부하는 청년들은 이 마음을 배워서 열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셋째로, 안디옥교회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체성이 확립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1:26). 자기들끼리 “야, 우리들 이름을 정하자” 이래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안디옥에 생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게 이름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 이름이 ‘크리스천 (Christians)’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깔보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이름이 그런 이름이라는 어떤 증거도 성경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47)”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디옥교회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았다면, 안디옥교회 사람들 역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부끄러운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나, 이름만 좋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선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교회 밖에서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 말씀을 나의 삶을 통해서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넷째로, 안디옥교회는 베푸는 교회였습니다. 한번은 ‘세계에 (in the entire Roman world)’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글라우디오 (Claudius, AD 41-54까지 재위)가 황제가 되었을 때 흉년들이 들었다고 했으니까 서기 41년에 흉년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로마 제국 전체가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그 때, 안디옥교회도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예루살렘교회를 돕기로 결정하고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헌금을 전달합니다. 한번은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려고, 기쁜 마음으로 구제 헌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헌금은 했지만,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영적인 복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로마서 15: 25-27)
우리가 드리는 헌금 속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빚을 갚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헌금이 교회를 통해서 모아져서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고, 장학금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ReNEW Conference를 위해 사용될 수도 있고, 선교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자기들이 영적인 빚을 지고 있는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전달했습니다. 교회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런 생각이 교회를 교회 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온 교회가 기도하고 금식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열심이 기도하는 중에 안디옥교회 교인에게 일치된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때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이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안디옥에 1년 동안 머물면서 교인들을 가르쳤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1:26). 그런데, 안디옥교회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두 사람을 더 이상 이 교회에 있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다른 곳으로 보내서 그 곳 사람들도 복음을 듣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2).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도 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위에서 제가 이런 문제를 제기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 안디옥을 선택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을 선택한 것은 안디옥이 ‘코스모폴리탄 도시 (cosmopolitan city)’였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의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가 안디옥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볼 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조사관이 파견되어 이 현상을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안디옥교회가 폐쇄적인 도시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더라면 아마도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절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교회들이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성경이 제시하는 좋은 교회, 진정한 교회, 건강한 교회의 모델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안디옥교회를 거울 삼아 오늘 우리교회를 돌아보면서 “우리교회는 건강한 교회인가?”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으면 함께 기도하고 지혜를 모아서 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6/30/2019 |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사울의 회심 Saul's Conversion

사도행전 9:1-9, 15-16

‘성령강림절’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경 (사도행전)을 찾아 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유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앞으로의 설교계획은 이렇습니다. (1)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 (사도행전 2장) (2) ‘아름다운 문’ 앞에서 일어난 사건 (사도행전 3장) (3) 신앙공동체의 출현 (사도행전 4장) (4) 사울의 회심 (사도행전 9장) (5)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 11장) (6) 예루살렘 회의 (사도행전 15장) (7) 유럽으로 건너간 복음 (사도행전 16장) (8)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고린도 (사도행전 18장)  (9) 복음의 변증론자
 
오늘 읽은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회심’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을 돌이켜 먹음’ ‘과거의 생활을 뉘우치고 신앙에 눈을 뜸’이란 뜻입니다. 한자로는, ‘回心’이라고 씁니다. ‘돌아올 회자’와 ‘마음 심자’입니다. 마음을 고쳐 먹고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바꾼다’는 뜻입니다, 성격이나 형태나, 기능이 바뀌는 것입니다. 또 죄인이었던 사람이 의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거나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종교를 바꾸거나, 정치적인 신념이 바뀌거나 관점이 바뀌거나 할 때 ‘convers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자신의 종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불신하거나 반대했던 사람이 아주 열성적으로, 아주 호의적으로 바뀌었을 때도 ‘convers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사울의 ‘회심’은 맨 마지막 정의가 맞을 것 같습니다. 사울이 회심했을 당시 ‘기독교’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울은 처음에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 (Stephen)’이라는 사람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에서입니다. 사울은 “저런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사도행전 8:1)”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ul was one of the witnesses, and he agreed completely with the killing of Stephen. A great wave of persecution began that day, sweeping over the church in Jerusalem; and all the believers except the apostles were scattered through the regions of Judea and Samaria (증인 중 한 사람인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완전히 동의했습니다. 그날 예루살렘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들을 빼고는 모든 신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울이 ‘다마스커스 (Damascus)’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는 ‘시리아 (Syria)’의 수도입니다. 그의 손에는 대제사장의 편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옆에는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에 거의 다 갔을 무렵에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사울에게 비쳤습니다. 깜짝 놀란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사울은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4-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울만 이런 소리를 들었지, 같이 가던 수행원들은 무슨 소리인지는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고 ‘다마스커스’로 들어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완벽한 드라마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마스커스’에 미리 ‘아나니아 (Ananias)’라는 사람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아나니아’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묵고 있는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가 기도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손을 얹어서 그의 시력이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충실한 제자 ‘아나니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그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그가 이곳에 올 때 대제사장으로부터 신자들을 잡아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9:13-14)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사도행전 9:15-1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 for 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o kings, as well as to the people of Israel. And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세상에 이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문제입니다. 그가 ‘내 이름 때문에’, ‘내 이름을 위하여’ 반드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I will show you how much you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과정은 ‘꽃 길’이 아닙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여러분 중에 괜히 느낌으로,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먼저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목사직, 교회에서 받는 장로직, 권사직, 집사직을 수행하는데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 받는 일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We must suffer for the sake of Christ (우리는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왜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을 선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은 그 때 사울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대충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유대교의 구원과 무엇이 다른가? 복음은 그리스 철학과 어떻게 다르며, 그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 (Gnosticism)’같은 사상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사울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사울은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5). 그의 고백처럼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고, 그 누구보다도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4) 이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덕분에 사울은 누구보다도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교의 오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기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울이 쓴 로마서 3:21-22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도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옵니다. 이 의는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이 말씀 속에 율법과 복음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입니다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이 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가말리엘 (Gamaliel)’이라는 탁월한 율법학자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요즘도 그렇겠습니다만, 스승 밑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사상과 학문하는 방법까지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울이 ‘가말리엘’은 밑에서 공부한 것은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유대인입니다.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 (Tarsus of Cilicia)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그 밑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대로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오늘,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2:3) 성경을 읽어보면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산헤드린 (San-hed¬rin)’의 위원으로 모든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해서도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34-39)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울이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하면서 이런 스승의 사상과 태도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예수님의 사상과 메시지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I was so zealous that I harshly persecuted the church. And as for righteousness, I obeyed the law without fault).” (빌립보서 3:6) 사울 자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만, 그 열심이 지식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2) 유대교 신자로서 사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가졌던 열심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열심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을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 (그러나, 나는 나의 삶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나의 유일한 삶의 목적은 주 예수께서 나에게 주신 과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 과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4, New International Version) 주님이 주신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목적이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 열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회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배신자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는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명의 자객들이 바울을 제거하는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사도행전 23:12-15). 교회 측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는 사울의 회심을 의심했습니다. 신자들이 볼 때, 사울은 워낙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 (Barnabas)’라는 신실한 사람이 사울을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교회는 사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열정적인 사람, 동시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1세기에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때에, 그리스의 철학과 타 종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화 속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요? 교회의 메시지가 힘을 잃어가고,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감소되어 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 아닐까요? 복음을 잘 아는 사람, 마음이 열려 있는 관용의 사람, 그리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 하나님은 분명히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 살펴 볼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왜 저는 안 되겠습니까? 저를 이 일에 사용하여 주십시오. 저를 이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훈련시켜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