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2019 | 사순절 새벽기도 17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마가복음 5: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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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12

경건생활에 힘쓰자 5 Train Yourselves To Be Godly

로마서 11:13-18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은 맞는데, 새벽에 일어나기가 힘듭니다.” 새벽 잠이 많아서 일어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잠언 24:3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쉬자 (A little sleep, a little slumber, A little folding of the hands to rest).” 똑 같은 말씀이 잠언 6:10에도 있습니다. 다 압니다.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합니다. 지금 직장에 가야합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나지 못합니다. 또 잠언 26: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돌듯이, 게으름뱅이는 침대에서만 뒹군다.” 침대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인간의 약한 모습이 성경에도 이렇게 많이 나와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게으릅니다. 놀기 좋아하고, 잠자기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했는데, 지금도 그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저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새벽 기도를 좋아하시니까 은퇴하시면 기도원이나 하나 차려 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본래 새벽에 잠이 없어서 새벽기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도 가끔은 새벽에 한번 실컷 자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교회는 새벽기도를 강조하고, 새벽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고,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합니까?” “아니, 아무도 새벽기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왜 케임브리지교회는 새벽기도를 강조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니까!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마가복음 11:17)”라고 선언하셨으니까 교회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그들이 모여서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번 말씀을 보세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2:42) 처음 교회가 이 땅에 생겼을 때, 믿는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만찬을 나누면서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가지고 있었던 원래 모습입니다. 말씀과 교제와 기도는 교회의 정체성과 깊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기 싫다고, 우리가 피곤하다고, 우리 형편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의 정체성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나는 새벽이 되기 전에 일어나 도움을 요청하며 울부짖습니다. 나는 나의 소망을 주의 말씀에 두었습니다 (I rise before the dawning of the morning, and cry for help).” (시편 119:147, NKJV) 이 말씀을 좀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는 너무 바쁩니다” 하면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를 일찍 가야해서요.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인데도 전혀 새벽 기도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만이라도 나오라고 했더니, “목사님, 전 토요일에도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합니다” 하면서 새벽 기도회에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새벽 기도에 나오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119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시편 119편이 얼마나 놀라운 시편인지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시편 119편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 다윗이 쓴 시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사미스트 (Psalmist)는 “I rise before the dawning of the morning (나는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야, 이 사람 참 부지런한가 보다. 참 일찍 일어나네”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이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매일 기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나의 하루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우리만 바쁜 것이 아니라,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래서 기도를 못한다고 핑계 대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 하루 스케줄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지만 기도는 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도 시간을 내기 위해서 “I have to rise before the dawning of the morning to pray every day (매일 기도를 하기 위하여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녹녹치 않습니다. 만만하지 않습니다. 치열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비지니스를 하는 것도 회사에 나가 일하는 것도 다 치열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래도 나는 주일에 교회에 나가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식으로 믿음생활 해 왔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이런 식으로 믿음생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하나님께 나는 교회에 나가니까 좀 봐 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입니다. ‘주기도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father who arts in heaven)’ 이렇게 시작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뭐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죄송합니다만, 교회에 나올 필요 없습니다. 아니, 내 힘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 왜 교회에 나옵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니까, 내 힘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치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피곤해서 기도 못한다고 하고, 아침 잠이 많아 일찍 일어날 수 없어서 기도 못한다고, 또 너무 바빠서 기도 못한다고 핑계를 대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을 사미스트를 보세요. 기도는 꼭 해야 하겠으니까, 바쁘다고 기도를 쉴 수는 없으니까, 나의 바쁜 일과 속에서도 기도는 지속적으로 해야 하니까, 그는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하여 그는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He got up before the dawning of the morning to pray).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의 바쁜 스케줄 속에서 기도시간을 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그 사람도 도저히 기도 시간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스케줄 외의 시간에서 기도 시간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the time before the dawning of the morning (아침 동트기 전의 시간)’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이 시간은 학교 수업도 없습니다. 이 시간에는 약속도 잡혀 있지 않습니다. 이 시간은 가계 문도 열기 전입니다. 이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입니다. 시편 119편의 사미스트는 이 시간을 기도 시간으로 떼어 놓았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재미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5)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Very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Jesus got up, left the house and went off to a solitary place, where he prayed.”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도 바쁜 일과 속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내기 위하여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의 지혜를 따라서 그 시간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바쁜 사람들, 기도할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사미스트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저에게는 새벽 기도가 주는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루의 첫 시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도 거룩한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이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쉽게 말씀드린다면 오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은 바울은, 자기 민족의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자기 민족’이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민족이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접붙임 (grafting)’의 원리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참 올리브나무’가 있고, 그 올리브나무에 가지가 있는데, 이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가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잘려 나간 ‘참 올리브나무 가지’는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은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참 올리브나무의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가 접붙임을 받은 것과 같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조금만 교만하면 쉽게 잘려 나갈 수 있습니다. 또 한번 잘려 나간 ‘참 올리브나무 가지’는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다시 원래 자리에 쉽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 민족에 대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유대 민족의 위대한 ‘족장들 (patriarchs)’ 때문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조상들의 믿음과 역사를 이어받은 유대인들을 쉽게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명한 16절 말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 떼 내어 드린 반죽의 일부분이 거룩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고,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한 법입니다.” (16절) 반죽을 만든 사람이 반죽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한 부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나머지 반죽 전체가 거룩한 반죽이 됩니다. 반죽을 떼서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나머지 반죽을 가지고 빵을 만들기도 하고, 과자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 반죽들의 의미가 달라지고, 나머지 반죽의 ‘질 (quality)’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면 하루의 나머지 시간들도 거룩하게 된다. 그 나머지 시간들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해 왔습니다.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로 잘못된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갑니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골로새서 3: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Set your minds on things above, not on earthly things”라고 나와 있습니다. ‘things above’라는 말은 ‘하늘에 속한 것들’ ‘천국에 속한 것들’ 혹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earthly things’는 ‘땅에 속한 것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하는 생각들’ ‘욕심, 걱정, 근심’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모두 내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 빈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things above’를 마음에 채웁니다. 그리고 학교로 가고, 직장으로 가고, 실험실로 달려갑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하루의 시간도 거룩하게 됩니다. 맞지 않습니까? 나머지 시간들이 거룩하게 되면 나의 말과 행동, 나의 생각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이 새벽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인 유익입니다.


3/23/2019 | 사순절 새벽기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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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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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2019 | 사순절 새벽기도 15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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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2019 | 사순절 강해설교 14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마가복음 4: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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