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6/24/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9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V The Christian Way of Life
베드로전서 4:1-6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다섯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긴 합니다만,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았을 때는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김형석 교수님의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안병욱 (1943-2013)) 교수님의 책과 함께 김형석 (1920-현재) 교수님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한참 인생에 대하여 생각이 많았던 때에 그들이 풀어내는 인생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안병욱 교수님은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숭전대학교, 숭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김형석 교수님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계셨습니다. 지금도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로 계십니다. 지금 연세가 한국 나이로 99세인데, 여전히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백 년을 살아 보니’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김형석 교수님이 어느 회사 신입 사원 교육 시간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대학 시절에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고전을 다섯 권 정도 읽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랬더니,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여러분 중에 인생에 도움이 될 고전을 세 권 정도 읽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회사에서 과장이 될 때까지는 열심히 앞만 보고 일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서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되면 정신적 빈곤을 느끼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의 지도자로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고전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 사람이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한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정신 세계가 빈곤한 사람이 한 회사나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의 경우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뽑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크리스천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해당하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이론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 이원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문제 아닙니까?
베드로전서를 쓴 베드로는, 이미 2,000년 전에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루 하루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 있든지 간에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지금 살기 힘들고 고단한데,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학생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공부하기 바쁜데, 그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나중에 졸업하고 시간이 나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볼께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이 처한 환경을 핑계 대면서 이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반대가 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 일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모스는 기원전 800-75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가 살았던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대단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제적 호황이 나라가 곧 멸망할 사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두 사람이 동행할 수 있겠느냐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다르면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는 방향이 같아야 같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과 같지 않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라고, 나를 도와 달라고, 나를 형통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의 삶을 먼저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이런 말씀 카드가 있습니다. 제목이 ‘You Say.......God Says........’입니다. 중요한 것만 몇 개 말씀 드린다면, “너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것은 아무 가치 없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똑똑하지 않아’ 하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지혜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난 할 수 없어’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두려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외로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겠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성공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내 생각이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과연 이런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 하고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경우에는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힘들지만, 내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둘째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때는 과감하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맞아 떨어질 때, 뭔가 가슴 떨리는 전율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이가 들면 안경을 써도 보고 싶은 물체에 초점이 잘 맞지 않습니다. 어느 안경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 안경은 특수하게 제작되어 있어서, 안경을 쓴 상태에서 눈과 렌즈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TV에서 그 안경을 광고하는데, 렌즈의 거리를 조절하니까 초점이 맞아서 희미하게 보이던 물체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창조하실 때,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갈 때,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초점이 맞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뜻과 초점이 맞는 삶을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을 때 사물이 윤곽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초점이 맞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 (George Müller, 1805-1898, 독일)는 시편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 (시편 68:5)’라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씀을 보는 순간, 뮐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내가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뮐러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순간이야 말로, 뮐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뮐러의 생각이 초점이 맞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뮐러가 살았던 시대는 고아들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고아들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아들은 버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 우리교회가 세워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1863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제가 미국교회 평신도 대표였던 워렌 밀리 (Warren Milly)라는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이 교회를 세운 목적은 하버드 스퀘어와 센트럴 스퀘어에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다른 교회와는 구조가 다릅니다. 본당에 기둥이 하나도 없고 공간이 넓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가 건축한 교회는 아니지만, 이런 역사를 알고 예배당을 사용하면 더 많은 은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Magazine Street는 ‘Church Street’라고 할 만큼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들이 많았던 이유는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교회마다 교인들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성인들의 회심에 관심이 있었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때 이 교회가 주일학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나의 삶에서 예배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한 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설교 말씀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이 예배의 본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기 쉽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 주님이 ‘영적인 예배 (Spiritual Worship)’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영적인 예배’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1-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 - 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① / ①Or This is your spiritual worship; or This is your reasonable service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내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배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로 끝나면 안 되고, 내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이 예배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나가서 우리 교회 출신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나이가 비교적 어려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저도 얼굴은 익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중에 참석자들 이름을 쓴 리스트를 보고 알았습니다. 이름이 김혜성이었습니다. 지금 아리랑 TV에서 기자 겸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 전 케임브리지 교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전 거기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세상에 나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귀하고, 이보다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6/10/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8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IV The Christian Way of Life
베드로전서 3:8-18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네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고난을 대처하는 법’입니다. 고난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입니다. ‘고난’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말은 ‘시련’ ‘시험’ ‘연단’ ‘환난’ ‘핍박’ 등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any of you’ 입니다. ‘너희 중에 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가 없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고,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길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진실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된다는 말을 그냥 거짓말 안 하고, 착하게 사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때로는 부정도 저지릅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양보하고 쉽게 타협합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삽니다. 마음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富)를 부러워하고, 명예를 부러워합니다. 마음 속에 끊임없이 자리잡고 있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여유 있게, 편안하게, 아무 문제 없이 살까?”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 새벽 기도에서 요한복음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어저께 토요일 새벽 기도에서 읽은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 (Slaves are not greater than their master).” 이 말씀이 요한복음에 두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 13:16, 15:20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도 내가 본을 보여 준 대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고, 또 한 번은 내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은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 믿음생활에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몸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이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한 센텐스를 말하면 여러분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욕을 먹고,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욕을 먹고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른 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만 잘 이해하면, 오늘 고난에 대한 말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베드로가 서기 65년경에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Diaspora Christians)’에게 쓴 편지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로마에 대화재가 난 것은 서기 64년 7월 18입니다. 화재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여러 설들이 있으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이 화재의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렸습니다. 네로 이전에는 로마의 ‘Pax Romana (로마의 평화)’ 정책 덕분에 크리스천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로 이전에 크리스천들이 받았던 핍박은 주로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핍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로 피난을 갔던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다가 나중에는 로마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서기 65년이면, 크리스천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살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도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썼을 당시의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크리스천들 사이에도 핍박을 견디다 못해 배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료 크리스천들을 고발하는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전전긍긍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터키 ‘갑바도기아 (Cappadocia)’에 있는 ‘데린구유 카타콤 (Derinkuyou Catacomb)’에 가 보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지하 5층에 있습니다. 지하가 완전히 좁은 미로(迷路)입니다. 길을 잃으면 찾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미로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급습할 때를 대비해서 돌을 굴려 막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입니다. 그 좁은 미로에 손 때들이 묻어 있습니다.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켰던 당시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말씀은,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알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구약성경 시편 34:12-16 말씀을 인용합니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인생을 즐겁게 살기 원하는 사람은 악한 말과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행동을 그치고 선한 일을 하며, 평화를 찾고 그것을 위해 힘써 일해야 합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만,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멀리하십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그들을 건지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사람 곁에 계시고, 낙심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모든 어려움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게 완전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 때문에 죽을 것이고, 의로운 사람을 미워하는 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 생명의 위기를 느낀 다윗은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목숨을 보존합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진영으로 피신하면 사울의 추격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금방 다윗의 정체가 탄로납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끌려간 다윗은 미친 척하고 연기를 한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합니다. 이 때 쓴 시편이 34편입니다. 이 시편 속에 나를 위기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또 사울 왕에 대한 미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편 어디에도 사울 왕을 미워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공의(公義)의 하나님은 선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며, 그들을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시만, 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다윗은 모든 일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깁니다.
지금 이 편지를 읽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이 편지를 어느 ‘카타콤’에서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사람들이 베드로가 쓴 이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성령의 위로하심이 그 자리에 모은 사람들의 마음을 채웠을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3:16)”라고 기록했을 때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한 때는 신학자들 간에도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대로 말씀을 기록했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그것을 ‘축자영감설 (verbal inspiration)’이라고 합니다. 오늘 날에는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책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하나님의 ‘숨 (breath)’을 불어넣으셨다고 이 말씀을 해석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쓴 편지입니다. 하지만, 그 편지 속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카타콤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누가 대표로 베드로의 편지를 읽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듣는 사람들은 그 말씀 속에서 전해오는 성령의 위로하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성령의 위로하심’으로 그들은 모든 불안과 공포와 염려와 근심을 이기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여러분이 늘 선한 일을 하고자 애쓴다면, 아무도 여러분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마십시오.” (13-14절)
맞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겪는 고난 중에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오히려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쓴 것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난 받는 일이 있습니다. 1세기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런 고난이 있었습니다. 거짓말 한 일도 없고, 남을 해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크리스천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이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 그는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2-23)
문제는 우리에게도 이런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이 고난에 대처해야 합니까?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무죄를 주장해야 합니까? 변호사를 사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야 합니까? 이런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이런 고난을 받으셨으니까 우리도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런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 고난을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갚아 주심 (reward)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1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even if you suffer for doing what is right, God will reward you for it. So don't worry or be afraid of their threats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염려하거나 그들의 위협을 겁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그런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죄인을 대신하여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8절)
문제는, 이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어떻게 이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대속의 고난’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병든 사람의 친구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들 것에 누운 채로 데리고 온 것을 봐서 증세가 아주 심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a paralyzed man’이라고 나옵니다. 이 사람에게 친구가 네 명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중풍병에 걸려 고생하는 친구의 병을 어떻게 하든지 낫게 해 주고 싶어서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말씀을 하고 계셨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집 밖에까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네 친구는 중풍병에 걸린 친구의 병을 낫게 해 주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네 친구는 그 집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친구를 들것에 누인 채로 끈으로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마가복음 2:5, 11)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이 정말 무궁무진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네 친구들의 믿음 속에 사랑과 긍휼과 희생과 섬김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의 마음을 갖는 일은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나의 삶 속에 실천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마음은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나의 마음을 쓰고,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을 절대로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오늘 베드로의 편지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한 형제처럼 사랑하며, 한 마음으로 서로 따뜻이 대하며, 겸손하십시오. 해를 입었다고 도로 보복하지 말며, 욕을 먹었다고 그 사람을 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삶을 축복해 주십시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축복받는 인생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9절)
6/3/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7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II The Christian Way of Life
베드로전서 3:1-7
오늘부터 그 동안 사정 상 중단했던 베드로전서 강해설교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시작하려고 보니, 오늘 본문(本文) 말씀이 남편과 아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미 결혼하신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래에 허즈번드와 와이프가 될 청년들에게도 오늘 말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관습과 인습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2,000년 전에 기록되었고, 구약성경은 약간의 다른 의견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찍 기록된 성경은 B.C. 1,50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중에 일찍 기록된 성경은 적어도 3,5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물론 어떤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성경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해석학적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지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각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달라서 어떤 사람은 이러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저러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나처럼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여러분에게 좋습니다.” 또 이 말씀 뒤에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이제 여러분이 편지에 언급한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에 관해 말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현재 겪고 있는 위기를 생각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대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7:25-26)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결혼한 사람들은 모두 성경 말씀을 어긴 것이 되지 않나요?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해석의 단서(端緖)가 나와 있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위기를 생각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대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7:26) “결혼한 뒤에는 이 세상에서 겪는 환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7:28)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결혼 생활에 골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The time that remains is very short. So from now on, those with wives should not focus only on their marriage).” (7:29) “세상 일에 마음을 쓰지 말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십시오.” (7:32-34) 여기 ‘위기’ ‘환난’이런 말들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을 때, 교회는 ‘위기’와 ‘환난’의 때를 맞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것이 대략 55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보다도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이 때 바울을 위시해서, 그 당시 교회에 흐르고 있었던 것은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론 (Imminent Eschatology)’이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는데, 결혼이니 뭐니 하면서 마음을 쓰지 말고 다시 오실 주님께 온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지내라고 한 것은, ‘임박한 종말론’이 팽배해 있던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한시적(限時的)인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고 느낀 점은 여전히 베드로의 편지 속에 남성 중심의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 둘 중 누가 더 dominant한 위치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며,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9)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시대의 관습과 인습을 타파한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역시 그 시대의 제약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아내들은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십시오.” (에베소서 5:22)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됨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5:23) 이런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록 남편들에게 아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완전히 뛰어 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말씀도 그렇습니다. 아주 혁명적인 말씀이 나오는가 하면, 군데군데 여전히 남성 중심의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든지,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고, 남편의 권위에 순종했다는 표현들입니다. 바로 이런 점들을 보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역사적인 시대의 산물(産物)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쓴 편지는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아내들의 온전한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들이 그런 아내의 행동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아내의 행동이 남편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아내의 온전한 행동이란, 화려한 옷이나 보석으로 겉모습을 치장하려고 하지 않고,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을 가지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했던 믿음의 여자들을 보면 모두 보이는 외모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어찌 아내에게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왜 아내들만 온전한 행동을 해야 하지요? 남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남편들에게도 똑 같이 요구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아내들만 온전한 행동으로 남편을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들도 온전한 행동으로 아내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들은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 (authority)에 순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했던 예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들고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 (master)’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모두 사라의 본을 받아서 사라의 후손들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instance, Sarah obeyed her husband, Abraham, and called him her master. You are her daughters when you do what is right without fear of what your husbands might do (예를 든다면, 사라는 그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면 순종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남편들이 행하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올바로 행한다면 여러분은 사라의 딸들이 되는 것입니다).” (6절)
아내들이 남편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 역시 오늘 우리의 관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직장에서도, ‘권위’라는 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권위적인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인기가 없습니다. 리더십에도 ‘권위적인 리더십 (authoritative leadership’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 대신 ‘섬김의 리더십 (servant leadership)’이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섬기는 섬김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는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베드로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시대에 맞도록 해석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체적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same way, you husbands must give honor to your wives. Treat your wife with understanding as you live together (마찬가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아내들과 함께 살아갈 때, 아내들을 이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7절)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 번역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편들에게 아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들도 남편에 대한 지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결혼(結婚)이 무엇인지, 결혼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결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결혼에 대한 최초의 성경 말씀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그를 도울 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이 잠든 사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에게서 꺼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아담에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말했습니다. ‘아,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므로,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보여주는 것은, 결혼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나에게 맞는 ‘도울 짝 (a helper suitable for him)’을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도울 짝’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동역자’입니다. 결혼해서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라고 ‘동역자’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임의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마태복음 19:6) 적어도 우리 크리스천 남편과 아내는 우리의 결혼 속에 이런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들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에 대하여,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서로 지식이 없습니다. 결혼한 남성의 심리는 어떤 것인지, 또 결혼한 여성의 심리는 어떤 것인지, 책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남편들은 아내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어떤 심리적인 변화가 겪는지, 또 몸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끝으로, 베드로는 아내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연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하십시오. 그리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7절) 여러분, 1세기에 살았던 베드로가 아내에 대하여 ‘honor’ ‘respect’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베드로는 아내에 대하여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he may be weaker than you are, but she is your equal partner in God's gift of new life (아내가 당신보다 육체적으로 약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내는 새생명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당신과 똑 같은 권리를 가진 파트너입니다).”
가정의 행복, 결혼생활의 행복은 우리의 ‘영성 (spirituality)’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결혼생활이 행복하면 기도의 채널이 뚫린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이 말씀이 맞습니다. 어쩌다가 아내와 불화가 있고, 말다툼이 있고 하면, 주일을 맞이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고, 입에서 설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불문율(不文律)을 정했습니다. 주일이 되기 전에 서로 화해하고 마음을 풀기로요.
결혼생활이 행복하면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그렇습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하지 않으면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대해 주지 않고, 무시하고, 무관심하면 결과적으로 서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는 상대에 대한 지식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honor’와 ‘respect’로 자존감을 높여 나가야 합니다.
5/27/2018 | 야외예배 설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He Will Certainly Care For You.
마태복음 6:25-34
오늘 야외예배를 맞이해서 싱그러운 대자연 속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기분이 새로운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자연 속에 들어오면 기분이 설레고 상쾌해 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①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② 나무들로부터 몸에 좋은 기운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③ 자연 속에 들어 옴으로 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④ 그냥 기분이 좋으면 됐지 이유는 알아서 뭘 하나? ⑤ 정말 어려운 문제다. 여러분이 동의하든 안 하든 저의 대답은 ③번입니다. 한번 주변을 돌아 보십시오. 풀 한 포기, 이름 모를 들꽃, 그리고, 나무 한 그루까지, 5월을 맞이해서 제각기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고요. “왜 저 나무는 저기 서 있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구만!” 이런 것이 없습니다. 어느 때는 죽은 나무도 있고, 넘어져 있는 나무도 있는데, 그런 것까지도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립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딱 두가지입니다. 공중에 날아 다니는 새, 들에 피어 있는 백합 한 송이. 들풀 한포기, 누가복음에는 까마귀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복음 12:24)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도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들일까 보냐! 얼마나 더 소중하게 여기시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지금 막 졸업식들이 끝났습니다만, 서부에 있는 어느 학교는 아직도 졸업식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왜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희생해 가시면서도 여러분을 후원하고 기르시는 것입니까?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아무도 안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니까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고, 손 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양주동 선생이 가사를 쓰고, 이흥렬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부모는 왜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시는 것입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딸들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adoption)”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8:15). “You received God's Spirit when he adopted you as his own children. Now you call him, ‘Abba,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이런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의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 (identity)’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아닙니까? 미국에서는 드라이버스 라이선스가 증명서 (Identification Card)입니다. 드라이버스 라이선스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해 주는 증명서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증명서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확실한 증명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원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차여차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우리가 양자가 되었다는 (We were adopted as God’s children) 말씀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의 중요성을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운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돌보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를 위해서 아까운 것이 없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주셨는데, 무엇인들 아깝다 하시겠습니까 (Since he did not spare even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 won't he also give us everything else)?” (로마서 8:32)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베드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큽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 (유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지중해 연안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했잖아요? 이 사람들을 우리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Diaspora Christians)’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유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베드로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겼을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낯선 외국 땅으로 피난 가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무엇보다도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충고한 내용들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의 편지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얼마나 염려하는 일들이 많고, 걱정하는 일들이 많았겠습니까? 언제 로마 군인들이 들이닥칠 지 알 수 없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그들은 하루 하루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했던 위로와 충고의 말씀은 “Give all your worries and cares to God, for he cares about you”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도, 걱정도, 불안도, 모두 맡기세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베드로의 이 말이 베드로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두 주님에게 배운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25-26, 30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He will certainly care for you)!” “아니, 하늘에 날아다니는 까마귀도,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너희는 나의 제자들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를 얼마나 더 잘 보살피시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Why do you have so little faith)!”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너무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불확실성 (the age of uncertainty)’이 우리에게 더 많은 걱정과 불안을 안겨 주는 것 같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미래도 불확실합니다. 단순히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어둡습니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감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때에 청년들은 다원주의 사상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왜 교회를 꼭 나가야 하는지, 왜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왜 꼭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설적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확실한 것을 붙잡는 것 아닌가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일 아닙니까? 그래서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는 성경의 메시지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에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23-25)
이 ‘불활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앞으로 오는 시대에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야외예배를 맞아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그렇듯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삼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care) 계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gentiles)’이나 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