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2018 | 사순절 새벽기도 6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Ask, Seek, Knock.

마태복음 7:7-11

그동안 여러 번에 걸쳐 기도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기도 시리즈 마지막 설교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이니까 부활 신앙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기도에 대한 책들도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기독교는 기도에 대한 오랜 전통과 역사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전에 살았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기도를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을 읽어 보면, 그 당시의 제사장은 엘리 (Eli)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웠습니다. 엘리에게 어린 남자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키워 달라고 맡긴 아이였습니다. 그 부모가 나이가 많도록 아이가 없었는데, 그 어머니 한나가 “만일 저에게 아이들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고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낳은 아이가 사무엘입니다. 남편과 의논한 한나는 서원 했던 대로 겨우 젖을 뗀 어린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런데 엘리는 ‘아니, 난 너를 부르지 않았다. 가서 자거라” 하면서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 때서야 엘리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아, 다시 너를 부르는 소리가 나면 ‘여호와여, 말씀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여라.”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Samuel did not yet know the LORD because he had never had a message from the LORD before).” (사무엘상 3:7)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엘리 제사장이 죽고, 사무엘의 시대가 열립니다. 사무엘이 백성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만약 내가 기도를 멈춘다면, 그것은 여호와께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이 좋고 옳은 것인가를 가르치겠습니다 (As for me, I will certainly not sin against the LORD by ending my prayers for you. And I will continue to teach you what is good and right).” (사무엘상 12:23)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많은 영감 (inspiration)을 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꾸준히 소통하는 사람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꾸준하게 자신의 삶 속에서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됩니다. 간혹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이비 기도꾼들입니다. 제대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운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운 사람 역시 잘못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말씀이 디모데후서 3:16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기도를 열심히, 포기하지 말고 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씀 속에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씀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난 이제 잠자러 가요!” “God is great, God is good!” 이렇게 기도합니다. 비록 이런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어릴 때부터 기도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라는 컨셉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기도를 계속할 수가 없잖아요? 어른이 되면 당연히 기도하는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엇을 구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무엇을 찾으라고 하셨을까요?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11절) 하나님께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주신하고 하신 ‘좋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if you sinful people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직역하면, “너희 죄인들도 어떻게 하면 너희 자녀들에게 ‘good gifts’를 줄까 하고 생각하는데,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더욱 구하는 사람들에게 ‘good gifts’를 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누가복음 11:13에 보면 거기에 오늘 말씀과 똑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good gifts’라는 말 대신 ‘the Holy Spirit (성령)’이라는 나옵니다.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생각할 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르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I want to know Christ and experience the mighty power that raised him from the dead. I want to suffer with him, sharing in his death).” (빌립보서 3:10) 그리스도를 알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 싶고,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열망이 없는 사람들은 이 열망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 물어 봅니다. “요즘에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 보면 “에,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대답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싶은 실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구하라 (Ask)”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소풍 가면 ‘보물찾기’를 합니다. 선생님들이 보물을 숨깁니다. 그런데, 너무 깊이 숨겨 놓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다니면서 “돌멩이 밑을 잘 봐라!”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라!” 학생들이 너무 엉뚱한 곳을 뒤지고 다니면 “야, 그런데는 없어!” 하면서 힌트를 줍니다. 하나님은 너무 깊이 숨어 계시기 때문에 찾을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읽어 보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발견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정말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오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이 주를 찾아 헤매입니다.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1-2절) ‘pants’라는 말은 명사형으로 쓰면 ‘팬츠 (빤쓰)’라는 뜻으로 사용 되지만, 동사형으로 쓰면 ‘(목이 마르거나 숨이 가빠서) 헐떡인다’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목이 마른 사슴이 물을 먹지 못해 헐떡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애타고 절박한 마음으로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애써 찾는 사람들에게 발견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은 너희에게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예레미야 29:11-14) “Then 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 to me, and I will listen to you.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ek me with all your heart. I will be found by you." 하나님은 ‘with all your heart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to be found’ 발견되시는 하나님입니다.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방황을 합니까? 그 마음 속에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emptiness)’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여자는 왜 아무도 물을 뜨러 오지 않는 12시에 왔을까요?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왜 그 사마리아 여자는 그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했을까요(요한복음 4:15)?” 그 마음 속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emptiness (공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사마리아 여자이 마음 속에 있었던 ‘공허함’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공허함’의 정체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a thirst for God)’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맥스 루카도 (Max Lucado)가 예수님의 ‘주기도문’에 대하여 쓴 책 제목이 ‘A Thirst for God’입니다. 이 목마름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까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속 깊은 곳에 이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마름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목마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 (St. Augustine, 354-430)이 그의 ‘고백록 (Confession)’에서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Thou hast made us for thy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thee (오 주님,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 마음엔 안식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구하라”라는 말씀이 우리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혹은 요청한다,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뜻이 있고, “찾는다”는 말 속에 마음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setting되어 있다는 의미가 있다면,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우리가 보여야 하는 행동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결국은 행동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은 더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입으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입으로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이 그 사람의 삶에서 행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진리와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사순절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 드리면서, 사순절은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는 40일 간의 특별한 기간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세 가지 일을 해 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세 가지는, ‘기도 (Prayer)’와 ‘금식 (Fasting)’과 ‘자선 (Almsgiving)’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도도 알겠고, 금식도 알겠는데, 자선은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이 남을 돕고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에 해야 하는 일 가운데 ‘자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자선’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일종의 ‘메타포 (metaphore)’입니다. 문을 두드려야 문을 열어 주는 것처럼, 구하고 찾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문이 열린다는 희망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잠긴 문이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젊은 사자도 힘이 없고 배가 고플 때가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갖가지 좋은 것들을 모두 얻게 됩니다.” (시편 34:10)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8)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끝으로,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기도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는다고 해도 그 지식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 시키는 ‘life changing knowledge (삶을 변화 시키는 지식)’이 되려면, 실제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지식이 모두 죽은 지식이 됩니다. 히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44:15)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3/17/2018 | 사순절 28

십자가의 메시지 The Message of The Cross

마가복음 15:35-39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로마서 5:2에서 바울이 선언한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이전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로마서 3:23). 십자가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잘 읽어 보세요.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아무 한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는 ‘undeserved privilege (감당할 수 없는 특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단지 십자가의 메시지를 듣고 받아 들인 것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종교나 사상은 없습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 (ran-som)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위대한 것은 그 대가를 하나님께서 친히 지불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Yahweh-Yireh, 창세기 22:14)’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2:14).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For God bought you with a high price. So you must honor God with your body)." (고린도전서 6:20)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몸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3) 예전에 살았던 성 프랜시스 (St. Francis, 1181-1226, 이탈리아)는 ‘평화의 기도 (Prayer of Peace)’로 유명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이 기도로 유명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뛰고, 우리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나도 나의 삶을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드리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삶을 도구로 드린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나를 위한 이기적인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림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리고, 탐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살았다 감으로 조금도 인류의 삶을 진전 시키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종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히말라야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느 루트로 정상에 올랐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비유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극수수의 사람이 정상에 올라가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로 아래도 내려가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정상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정상으로 올라가는 종교로 본 것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느 길로 올라가든 정상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다 같다는 주장을 합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어느 수준에 오른 등산가라면 남이 아직 오르지 못한 험난한 루트를 개발하고, 그 루트로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남이 오르지 못한 루트를 통해 정상을 정복하고 쾌감을 느낍니다. 정상에 오는 루트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 주신 루트는 나만 알고 나만 오를 수 있는 험난한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쉽고 편한 루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우리의 ‘몸 값 (ransom)’으로 내 주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이렇게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진리의 전부입니다. 누구나 이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요즘은 물건을 살 때 우편 주문을 많이 합니다. 우편 주문을 할 때 값이 싸다고 덜컥 주문 했다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그냥 15불 이라고 해서 싼 줄 알고 주문 했는데, 몇 가지 물어 보는 것들이 있길래 yes라고 한 두 번 눌렀는데, 마지막 결재할 때 금액은 26불입니다. 이것을 hidden cost라고 하잖아요? 우편 주문을 할 때는 hidden cost가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에는 hidden cost가 없습니다. 쉬운 줄 알고 발을 들여놨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렇게 구원의 길이 어렵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 들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잖아요? 깨어진 관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회복된 관계에는 사람에게 평안 (peace)을 줍니다.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눈에 올바른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로마서 5:1-2)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말씀인가요? 이 말씀에서 복음의 영광의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얼굴이 상상이 됩니다. 그의 얼굴은 복음의 영광의 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 이유가 오늘 읽은 37-38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때, 성전에 있던 휘장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이렇게 선언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좍!"하고 찢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에, 그 지성소 안을 비추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밖으로 새어 나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앞에 구원의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 바로 밑에서 형을 집행하던 장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역사적인 장면의 participant, 아니 목격자가 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exclaimed, ‘This man truly was the Son of God!’” (39절) 감정에 북받친 백부장의 입에서 이 소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구원의 새 길을 즐겁게 걸어가야 합니다.


3/16/2018 | 사순절 27

나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 God’s Amazing Plan For Me

시편 139:1-13

“예수님에게 생의 목적이 있으셨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생의 목적이 있으셨겠지요. 생각해 보면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의 목적’은 그 사람의 삶의 이유와 삶의 의미, 그 사람의 사명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삶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 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말도 되고, 사명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삶의 목적이었을까?” 하는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력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나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Christian’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를 찾아 봤더니, 이런 정의가 있더라고요.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알렉산더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전투에 나아가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행위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도망병을 잡으면 공개적으로 처형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가 도망치다 붙잡혀 알렉산더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보니 파란 눈의 앳된 소년이었는데, 너무 불쌍해 보여 죽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병사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알렉산더가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라고?” 소년 병사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알렉산더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과 똑같았던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화가 나서 세 번째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 놀란 병사가 “알렉산더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자 알렉산더가 달려가서 그 병사의 멱살을 휘어잡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네가 알렉산더라고? 네 이름을 바꾸던지, 네 삶의 태도를 바꿔라!”하고 호령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용기 없는 소년이 자기와 똑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정말 크리스천답게 살지 않으려면, 그냥 이름만 가지고 있을 생각히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생각이면, 크리스천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마가복음 10:45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even’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그 윗절에서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대속물’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속물(代贖物)’이라고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대신 드리는 속죄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ansom’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몸값’ ‘보석금’이라는 뜻입니다. ‘보석금’이라고 할 때 ‘bail’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을 ‘ransom’으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그대신 우리는 풀려나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죄의 노예로부터 풀려나 자유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for many)’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어떤 사람들을 상대하셨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 가시는 곳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도 예수님은 서슴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땅은 유대인들에게는 들어가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도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이틀르 머물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40). 예수님은 지중해 연안 시돈과 두로 지방에도 가셨습니다. 이 지방 역시 유대인들은 들어가기를 꺼리는 이방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딸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한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기 위해 왔는데, 그 중에 시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아무 차별 없이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지혜의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이 그저 아무 뜻 없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예수님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주님 (the Lord)’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ransom for many’라는 말씀 속에 이렇게 인종을 초월해서, 국경을 초월해서, 사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말씀 속에 여러분과 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지만, 그 중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은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ransom’의 의미를 자신의 삶 속에 잘 적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산다면 결국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서 말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고백을 듣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고 난 후에 이런 고백을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습니까? 아쉽지만 그 때는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나의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언제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정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빌립보서 4:7)’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대한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9편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께서 지금까지 나를 살피셨으니 주는 나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이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 (1-6절)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 내가 언제 잠자리에 들어가는 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If I go down to the grave①, you are there.” (8절) / ①Hebrew to Sheol 내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실망에 빠지고,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추적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단 한순간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 엄청난 지식에 완전히 압도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Such knowledge is too wonderful for me, too great for me to understand.” (6절)

또 계속 말씀을 읽어 보시지요. “주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을 지으셨으며,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You made all the delicate, inner parts of my body and knit me together in my mother’s womb).” (13절) 하나님은 나를 속속들이 모두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속품까지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속품을 조립해서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5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I knew you before I formed you in your mother’s womb. Before you were born I set you apart and appointed you as my prophet to the nations (내가 모태에서 너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나는 너를 알았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너를 구별해 세계 만민을 위한 예언자로 선정해 놓았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 전부터 (뱃속에 내가 생긴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은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시나요? 이 사실을 믿고 안 믿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 삶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예레미야 29:11)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선한만큼 나의 삶은 선한 결말을 가져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 속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나를 위해 ‘ramsom (대속물)’로 주신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나를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9)”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삶이 아무 의미 없이 길거리에 나뒹구는 삶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고, 그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습니다. 주저 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삶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3/15/2018 | 사순절 26

하나님의 어린양 The Lamb of God

로마서 3:21-26

오늘 말씀은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새 길'이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이 '새 길'은 이런 길입니다. (1)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되었던 길이다. (2)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온다. (3) 이 구원의 길은 차별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읽고 한가롭게 요점은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별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늘 들어왔던 평범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냈습니다.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로마서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누구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거의 다 갔을 무렵, ‘브디올 (Puteoli)’이라는 곳에 도착을 했는데요. 여기서 바울은 크리스천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초청을 받아 일주일을 그곳에 머물면서 그들과 교제합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합니다. 로마에서도 이미 바울의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두에 환영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크리스천 형제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나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8:15)

이 크리스천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50% 이상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나머지는 ‘Non-Jewish people’ 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바울이 보낸 편지를 읽었을 것입니다. 유대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를 을 읽으면서 바울이 제시한 구원의 ‘새 길’에 대한 말씀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니? 율법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예수님 때문에 열렸다고?” “아니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예수님 여셨다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바울을 환영하러 이렇게 부두까지 나온 것을 보면, 바울의 편지를 충격적으로 받아 들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Non-Jewish people’에게도 바울의 편지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길이 너무 쉽게 열리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로마의 크리스천 형제 자매들에게 대하여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지만, 어떻게 그 미스터리가 다 풀리겠습니까? 이 정도로 남겨 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3-25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내어 주셨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의로우심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소통의 채널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죄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을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주로 양을 드렸습니다. 양의 온순하고 순결한 모습이 제물로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제물을 고를 때는 신중하게 골랐습니다. 어린양 중에서 흠이 없는 양을 골랐습니다. 털에 다른 색이 들어 있지 않는 순백이어야 하고, 몸 어디에도 defect 된 부분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어린양을 제물로 골라서 제사장에게 가져 갑니다. 그리고, 두 팔로 양을 꽉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죄가 양에게 ‘전가 (im-putation)’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직접 칼로 양을 양을 죽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이렇게 해서 속죄 제사를 마칩니다. 천년 넘게 지켜 온 유대교의 속죄 의식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해마다 똑같은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황소나 염소나 양의 피로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의식이 그들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더 이상 죄의식을 느끼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다시 제물을 드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4)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몸을 드리신 제사를 통해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단 한 번의 제사로 그는 깨끗하게 된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We have been made holy through the sacrifice of the body of Jesus Christ once for all).” (히브리서 10:10, 14)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요한복음 1:29, 36)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면 한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 제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 드리는 어린양과 다릅니다. 그 양은 자기 죄를 용서 받고 싶어서 자기가 선택해서 제사장에게 가져 간 양입니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용서 받는 유대교의 속죄의식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런 의식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물로 선택하신 어린양입니다. 이 제물이면 우리의 죄가 영원히 용서 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속죄 제물입니다. 제물은 제물인데, 어린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제물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준비한 양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서 양에게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전가되는 것입니다. 칼로 양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가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베드로는 이 피를 ‘보혈(寶血)’이라고, ‘The precious blood of Jesus’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1:18-19에 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조상이 물려 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베드로는 그 자신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속죄 의식에 너무나 익숙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한마디 말로 자신이 믿어왔던 유대교의 속죄 시스템을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조상이 물려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구원의 새 시스템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대가로 지불한’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은 금이나 은과 같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구원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그렇게 귀한 자리입니다. 결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눈에 올바른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로마서 5:1-2) 


3/14/2018 | 사순절 25

놀라운 십자가 The Wonderful Cross!

로마서 5:1-8

오늘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 말씀을 통해서 알아 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셨습니다.” (8절)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바울은 또 5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whom he has given us).”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지 2,000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도 그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 이 사랑을 쏟아 붓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고 배웠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며,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For the LORD is right-eous, he loves justice; upright men will see his face).” (시편 11:7)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어떤 때는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기뻐하신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삶이 방자해 집니다. 방자한 사람은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무례하고 건방진 사람이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요한일서 4:8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또 요한복음 3:16 말씀도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하나님의 인자하심, 또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긍휼하심 등은 모두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나와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거든요.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혀 온 여자에게 사람들은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죄 없는 사람이 있거든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손에 들었던 돌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요한복음 8:1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이 두가지 성품을 모두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듯 우리도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일을 눈감아 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불의한 일 앞에서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불의한 일을 눈 앞에 보면서도 그런 일에 개입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해야 하는 일은 무슨 일인데요? 교회 모여서 찬송하는 일입니까? 교회 모여서 기도하는 일입니까? 어디서 그렇게 배웠습니까?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비쳐야 제 할 일을 하는 것 아닌가요? 여러분들은 절대로 불의한 일을 보고 눈을 감거나 피해 지나가면 안 됩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습니다. 그 옆에서 이 사고를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차 주인이 서로 필요한 information을 주고 받습니다. 서로 헤어지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다가 옵니다. “내가 이 현장을 봤는데, 저 차가 잘못했다. 필요하다면 내가 증인이 되어 주겠다”고 하면서 이름과 연락처를 줍니다. 좀 오래된 일입니다만, 제가 경험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증인이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아요? 그냥 지나쳐 집으로 와 버리면 편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일을 보고 못 본 척하거나, 귀찮다고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거든요? 정의의 칼만 휘두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잖아요?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 이런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십자가 위에서 정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이 perfect harmony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아시나요? 정의의 하나님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잖아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죽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잖아요? 그 덕분에 우리에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과 relationship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당시 사람들,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안달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그 때 광경이 잘 나와 있습니다. “Pilate asked them, ‘Then what should I do with this man you call the king of the Jews?’ They shouted back, ‘Crucify him!’ ‘Why?’ Pilate demanded. ‘What crime has he committed?’ But the mob roared even louder, ‘Crucify him!’” (마가복음 15:12-14) 이렇게 해서 이들이 원했던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를 거둔 것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유대인이 되었든지 그리스인이 되었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이겼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벽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죄를 심판해야만 하는 정의의 하나님과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사랑의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The Wonderful Cross!” “놀라운 십자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