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017 | 대강절 설교 1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To The People Who Sat In The Darkness Of Death

마태복음 4:12-17

‘대강절(待降節)’은 말 그대로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에서 유래되지 않았는가 합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오직 기도에 힘썼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제사장이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누가복음 2:25)’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 또 한 사람이 나오는데, ‘안나’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 (누가복음 2:37)”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다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대강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지런히 교회 절기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 왔던 교회 절기가 우리 믿음생활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교회에서 예전부터 교회절기를 지켜 왔습니다만, 개신교 교회들 (protestant churches)은 그동안 교회 절기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개신교 교회들이 교회 절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어 많은 교회들이 교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특별히 ‘사순절 (Lent)’을 전교인 40일 새벽기도의 기간으로 정하고 의미 있게 지키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영어로, ‘Advent’라고 합니다. ‘출현’ ‘출몰’ ‘나타남’ ‘도래(到來)’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강절에는 ‘대강절 촛불’을 켭니다. 첫 주에는 보라색 초를 켜는데, 이 촛불은 ‘희망 (Hope)의 촛불입니다. 둘째 주 역시 보라색 초를 켜는데, 이 촛불은 ‘평화 (Peace)’의 촛불입니다. 세 번째 주는 핑크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사랑의 촛불’입니다. 네 번째 촛불은 다시 보라색과 흰색 촛불을 켜는데, 이것은 ‘기쁨의 촛불’입니다. 흰색 촛불은 ‘그리스도의 촛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희망의 빛, 평화의 빛, 사랑의 빛, 기쁨의 빛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세상은 희망이 없었고, 평화를 몰랐고, 사랑을 몰랐고, 기쁨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4장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유대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목,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고 기록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이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 9:1-2에 이렇게 나옵니다. “Nevertheless, that time of darkness and despair will not go on forever. The land of Zebulun and Naphtali will be humbled, but there will be a time in the future when Galilee of the Gentiles, which lies along the road that runs between the Jordan and the sea, will be filled with glory.  The people who walk in darkness will see a great light. For those who live in a land of deep darkness①, a light will shine. /①Greek version reads a land where death casts its shadow.”

이 말씀에 스불론 (Zebulun), 납달리 (Naphtali), 갈릴리 (Galilee)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도대체 그 곳이 어떤 곳인지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에 스불론와 납달리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입니다. 스블론은 레아 (Leah)가 낳은 아들이고요. 납달리는 빌하 (Bilhah)라는 라헬의 여종이 낳은 둘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라헬 (Rachel)이 낳은 요셉 (Joseph)과 베냐민 (Benjamin)만을 총애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불론과 납달리는 야곱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았던 아들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분배할 때, 스불론과 납달리가 분배 받은 땅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는 남쪽의 유대지방, 중간지대의 사마리아, 북쪽의 갈리리지방 이렇게 세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방마다 분봉왕이 있었잖아요? 스불론과 납달리 후손들이 사는 땅은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인의 땅 (Galilee of the Gentiles or in Galilee where so many Gentiles live, 이사야 9:1, 마태복음 4:15)’으로 불리울만큼 변방(邊方)의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마태가 주목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주된 사역지로 정하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변방의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제일 먼저 들은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큰 빛 (a great light)’을 보는 때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마태는 갈릴리 지역지역에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였습니다. 불과 132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서양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동양의 끝 작은 반도의 나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변방의 땅’이었습니다. 그 때 작성했다는 이런 기도문이 남아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에,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은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들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지만, 저희들이 우리가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기도문을 쓴 사람이 언더우드 (H.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가장 잘한 결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4-15에서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우리 한국 땅에,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한국이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 한국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그 땅이 희망의 땅으로 바뀝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변방입니다. 소외된 지역입니다.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수많은 혁명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5:36-37에 혁명가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드다 (Theudas), 유다 (Judas of Galilee), 이런 사람들은 모두 혁명으로 그들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에게 복음의 큰 빛이 비쳤을 때, 사람들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 (the power of God, 로마서 1:16)’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 (God’s Mighty Weapons, 고린도후서 10:4)’ ‘Divine Power (NIV)’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강력한 복음의 능력 앞에서 어떤 인간의 사상이나 이론들이 힘 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디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If there’s a Goliath in front of you, that means there’s a David inside of you (만약 당신 앞에 골리앗이 있다면, 그것은 곧 당신 안에 다윗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 앞에 서 있던 엄청난 거인 골리앗이 다윗이 던진 돌멩이 하나를 맞고 힘 없이 쓰러졌잖아요? 비유적인 의미에서 다윗은 ‘복음의 능력’을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골리앗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운명의 굴레를 씌우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운명은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의 능력 앞에서는 운명처럼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그 어떤 것들도 무너진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믿는 우리에게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이 주어졌습니다. 어둠의 땅이 빛의 땅으로 바뀌고, 사망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우리 속에 복음의 빛이 비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삶이었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큰 빛 (a great light)’이 비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희망의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정말 지금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바뀌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민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것인지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삶을 모두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아이들의 문제, 심리적인 불안과 갈등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 우리에게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 외에 청년들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암울한 현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공부를 마쳐도 마땅히 일할 곳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금방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우리 밖에 수많은 골리앗들이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장애물들을 모두 치워주십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앞에도 똑 같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것과 없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누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희망이 있는 것과 희망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바울은 희망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희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로마서 8:24-2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were given this hope when we were saved. If we already have something, we don't need to hope for it. But if we look forward to something we don't yet have, we must wait patiently and confidently.”

희망이 있는 사람은 현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기다릴 줄 압니다. 단순히 참고 기다리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것을 이깁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은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좌절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희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이 차이가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짙은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주심으로, 희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혹시 지금 이 시간에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조용히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도 견디어 냅니다. 견딜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이깁니다.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이깁니다. 즐거움은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11/26/2017 |

승리의 삶의 근원 The Source of A Blessed Life

데살로니가전서 5:16-18


11/19/2017 | 추수감사절 설교

감사로 얻은 갑절의 기적 A Double Blessing Through Thanksgiving

누가복음 17:11-19


11/12/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6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I The Christian Way To Live

베드로전서 2:18-25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시리즈 설교 두 번째 시간으로 ‘고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 ‘고난’이라는 말이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 여러가지 말로 나와 있습니다. ‘시련’ ‘시험’ ‘핍박’ ‘박해’ 같은 말들이 ‘고난’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로도 ‘suffering’ ‘trials’ ‘trouble’ ‘persecution’ 등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제 머리에는 네 사람이 떠 오릅니다. 욥, 요셉, 다윗,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네 사람입니다. 욥은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대명사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죽고, 그 많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1:21) 욥의 친구들이 찾아 와서 욥을 위로한답시고 오히려 욥에게 상처를 안겨 줍니다. 그 때도 욥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where I am g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come out as pure as gold)!” (욥기 23:10) 욥이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 욥은 그가 받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의 말에 충분히 공감(共感)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을 단련하십니다. 잠언 17: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도가니가 은을, 풀무가 금을 녹이듯,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신다 (Fire tests the purity of silver and gold, but the Lord tests the heart).” 또, 이사야 48:11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I have refined you, but not as silver is refined. Rather, I have refined you in the furnace of suffering.” ‘refine’이라는 말이 ‘불순문을 제거한다’는 뜻이 잖아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불순문이 모두 제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고난의 용광로 (the furnace of suffering)’ 속에 그의 자녀들을 집어 넣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 “아, 하나님께서 내 속에 있는 불순물들을 없애려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칼 메닝거 (Karl Menninger, 1893-1990)라는 탁월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 (psychiatrist)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s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대하는 태도이다).” 내가 받는 ‘고난’ 속에 나를 pure gold로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 태도가 나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요셉이 받은 ‘고난’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위로 열 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그 형들은 모두 야곱의 첫 째 아내인 레아가 낳았습니다. 야곱의 둘째 아내인 라헬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야곱과 그 동생 베냐민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레아와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싸웠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도 나옵니다. 어느 날, 레아의 아들 루우벤이 ‘합환채 (mandrakes)’ 구해다가 어머니에게 줍니다 (창세기 30:14). 이 ‘합환채’라는 것이 마약 성분이 들어 있rh, 성적 흥분제가 들어 있는 식물입니다. 언니 레아가 ‘합환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안 라헬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 손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야곱의 집안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기와 질투, 불화, 이런 것까지도 그의 뜻을 이루는 도구(道具)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의 시기와 질투를 사용하셔서 경쟁적으로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야곱의 열 두 지파(支派)를 완성하시고, 국가의 기초를 만드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열 일곱살의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불행과 고난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들과 아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요셉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집트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요셉은 자기의 고난의 삶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가서야 깨닫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형님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가 50:20) 이 말씀을 읽을 때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다윗의 삶 속에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왕 사울로부터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다윗의 삶은 그가 어린 나이에 전쟁에 나가 있던 형들을 찾아가면서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바뀝니다. 그 전쟁터에서 다윗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이기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는 이런 드라마틱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다윗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다윗은 단숨에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게 된 이유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해서 뒤를 쫓는 사울을 피해서 다윗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별 짓을 다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침을 흘리면서 미친 척도 해야 했고, 때로는 적장(敵將)에게 투항하여 목숨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다윗은 수많은 시를 씁니다. 때로는 자기의 원수를 원망하는 시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기의 비참한 상황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이런 다윗의 시 속에 하나님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보시지요. 다윗에게 사울이 없었더라면,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지 않았더라면, 다윗과 사울이 불편한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그래도 다윗은 시를 썼을까요? 만일 그랬더라면 오늘 우리가 가진 성경에 시편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시편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은 그 많은 메시야의 비밀을 성경 어디에 숨겨 놓으셨을까요?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2장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2:21)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비록 고난을 받게 된다고 해도 여러분은 선한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신앙의 박해를 피해서 소아시아 지방에 피신해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과 동족(同族)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족으로부터 받는 핍박이 아니라,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example’로 삼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24절) 이 말씀은 이사야 53:4-5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By His wounds, we are healed!”라는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 오스트리아)가 쓴 시 중에 ‘엄숙한 시간 (Solemn Hour)’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지금 까닭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 /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지금 까닭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다. /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걷고 있다. 지금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 지금 까닭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제가 릴케의 시에 대하여 조예(造詣)가 없습니다만, 릴케가 이 시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시의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이것을 단순히 ‘이기적인 삶’이라고 비난할 수 없는 시대의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직하게 읽는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을 바라 보게 된다고요. 자기 중심적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으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By His wounds, we are healed!”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받고, 그리스도께서 채찍질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example’입니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으시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으시지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우리가 따라 걸을 수 있도록 큰 발자국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으신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1세기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단련을 받아, 하나님을 믿는 정금 같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참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똑 같이 고난의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지금 시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아무 이유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욥도 그랬고, 요셉도 처음에는 자기가 고난 받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님도 이유 없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 속에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의 목자 (the Shepherd of souls)’가 되셨습니다.

고난은 설교자인 저에게도 모두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제가 고난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제 삶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깨우치고,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고난에 대하여 발견한 것들, 그리고 고난에 대해 읽어 왔던 성경 말씀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쓴 글을 읽었습니다. “Be patient. God isn’t finished with you yet (인내하라. 참고 기다리라. 하나님은 아직 당신을 통해 하시려고 하는 일을 끝내지 않으셨다).” 이 말 끝에 Philippinas 1:6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은 성경을 찾아 봤더니, 그런 말씀은 없고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빌립보서 1:6 말씀을 읽다가 그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그렇게 쓴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두고 계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진행형입니다. 자신의 삶이 실망된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고 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Don’t be ashamed of your story. It will inspire others.”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 author unknown이라고 되어 있네요. 지금 나의 이야기가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11/5/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5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 The Christian Way To Live

베드로전서 2:13-17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계속해서 저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비난 받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좋다고 칭찬을 받는데, 세상에 나가서는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이 그런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교회 돈을 잘못 사용하고,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문제에 연루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서도 교회에 돌아와서는 사탄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고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한 사람들은 ‘표절 (plagiarism)’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 잘 압니다. 자신의 학위 논문을 자신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썼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이고, 수치스러운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를 보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도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비행이 일간 신문에 게재될 때마다 얼마나 교회가 비난을 받겠습니까? 저는 목사들이 모이는 한 모임에 갔다가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들이 모여서 한다는 말이 지금 한국에서 정부와 언론이 작심하고 개신교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천주교나 불교가 잘못한 기사는 신문에 싣지 않고 교회가 잘못한 일만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가 잘못했으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목사들이 더욱 조심을 해야 하는데,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들은 낯선 나라, 낯선 문화권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삶을 사는지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을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 하고 다른 습관과 행동들을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베드로전서 2:12 말씀이 바로 그런 상황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선한 행동’이라는 말은 ‘good deeds (착한 행동, NIV, NASB, NKJV)’ 혹은 ‘honorable behavior (칭찬 받을만한 행동, NLT)’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 속에서도 ‘good deeds’를 계속하고, ‘honorable behavior’를 계속하면 결국 비난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비난을 하지 않게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New Living Trnanslation으로 성경을 읽다가 에베소서 2:10 말씀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아, 이 말씀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 ‘masterpiece’라고 합니다. ‘masterpiece’는 한 작가의 대표작을 말합니다. 헨델의 masterpiece는 오라토리오 ‘메시야 (Messiah)’입니다. 르네상스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masterpiece는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입니다. 미켈란젤로의 masterpiece는 시스티나 성당 (Aedicula Sixtina)의 천정에 그린 ‘최후의 심판’입니다. 1508-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게 한 ‘다윗 상’ 등입니다. ‘다윗 상’는 3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masterpiece’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공들여 창조하셨으니까 ‘masterpiece’라는 말을 썼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에베소서 말씀을 잘 보면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masterpiece’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는,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쓴 두 번째 편지에 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죄에 물든 옛 생활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But those who fail to develop in this way are shortsighted or blind, forgetting that they have been cleansed from their old sins).” (베드로후서 1:5-9)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크리스천의 선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크리스천의 삶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삶입니다. 17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십시오 (Respect everyone, and love y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Fear God, and respect the king).” 또 13-14절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께 복종하십시오. 또한 왕이 보낸 관리에게도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잘못된 사람을 벌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크리스천의 삶 맞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불의에 항거하고, 복종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 그런 구절이 한 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행간(行間)을 잘 읽어 보면 아무 조건 없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잘 사용할 때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14절).

성경 어디에도 폭력을 정당화 한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 하게도 이 사람은 ‘열심당 (the zealot)’ 출신입니다 (누가복음 6:15). 우리 개념으로 하면 과격한 애국 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은 폭력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인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열심당 출신의 시몬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행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열 두 제자의 명단에 이름만 나올 뿐, 별 다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동행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 가져왔던 자신의 신념이 옳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성경에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Mahatma)’로 칭송을 받는 간디 (Manilal Gandhi, 1869-1948)가 성경에서 배운 것은 ‘비폭력 무저항’이었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 (1999년 4월 18일 자)는 지난 1천 년 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습니다. 간디에게서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은 결국 흑인들이 차별 받고 있는 사회를 개선하고,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 시키는데 공헌했습니다.

영화 ‘Amazing Grace’로 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을 폐지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 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정치인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21살의 나이에 하원 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1787년에 처음으로 의회에 노예무역폐지법을 제출합니다. 그 때는 18세기 영국은 수입의 1/3을 노예 무역으로 벌어 들였다고 합니다. 의회는 그가 제출한 법안을 보기 좋게 부결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만나 설득해 갑니다. 그리고 지지자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1807년에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이 폐지 됩니다. 무려 20년만에 그가 의회에 제출한 법안이 통과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성경에 나와 있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한번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 역사는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은 사랑으로 악을 이긴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6: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Do everything in love.” (NIV)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 (NASB) “Do everything with love.” (NLT) 크리스천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시작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진행해야 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2:20-21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인데, 여러분들은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에 숯불을 쌓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악으로 악을 이긴 경험이 더 많습니까?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기독교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국교로 공인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 이전까지 그렇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로마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가 되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콘스탄틴 황제 바로 직전의 황제가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us, 284-305) 황제였습니다. 이 때가 가장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때입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아예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합니다. 이 때는 로마가 내부에서부터 분열되어 통치 기반이 제일 허약했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306-337) 황제는 분열된 로마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기독교를 공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때는 로마의 궁중에까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극심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결국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선한 행동으로 험담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15절), 선으로 악을 이기며,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악을 행하는 구실로 삼지는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생활하십시오 (For you are free, yet you are God's slaves, so don't use your freedom as an excuse to do evil).” 크리스천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지만, 하나님께 얽매인 ‘God’s slaves’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악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배경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로마서 12:19).

오늘 말씀에 비추어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말고 꾸준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2,000년 전에,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제시했던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그곳에 살아가면서 이 삶의 방식대로 살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옳고,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으로 이기고,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