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2018 | 사순절 새벽기도 5

기도가 주는 영적인 유익 Spiritual Benefits of Prayer

시편 69:13-18, 29-32

여러분, 지금 ‘사순절 (Lent)’ 기간인데요. ‘사순절’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께 우리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기간입니다. 잘 보내고 계시지요? 새벽 기도에 열심히 참여하고 계시는 교우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냥 새벽 기도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라이드로, 미디어로, 아침 식사로 참여하고 계시는 교우들께 감사 드립니다.

무엇이든지 자원해서 드리는 일은 힘들지 않고, 재미 있고, 성과가 있습니다. 공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보스턴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자기 전공분야의 첨단 학문을 배우고, 전공 분야의 지식을 넓혀가면서도, 나의 전문 지식이 직업을 얻고, 나의 생계수단이 되고, 돈을 번다는 단순한 생각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보다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닦은 나의 학문이 조국을 위해서,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해서 공헌할 수 있고, 세상을 좀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지, 왜 교회에 나가는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고 습관적으로 믿음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생활의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더 깊이 알려는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빌립보서 3:7-8)”라고 했는데, 성경책이 내 손 안에 있어야 합니다. J. I. Packer가 쓴 ‘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같은 책이 내 주변에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새벽에 나와야 한다고 야단을 하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만,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쉬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17). “Pray without ceasing”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숨을 계속 쉬어야 하는 것처럼, 기도를 그치면 영적호흡이 당장에 끊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의 설교, 그의 편지에 나오는 말들은 책상에 앉아서 깊이 생각해 본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탁상공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나 편지글들은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의 말씀들을 해석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했던 말들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마태복음 6:13)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temptation’이 너무 많습니다. 조금만 우리의 생각이 나태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면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악한 일에 가담하게 됩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한 일에 가담하지 않는 제일 좋은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계속 기도를 통해서 소통(疏通)하는 것이야 말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2,000년에 제자들이 살던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더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 18:1) NASB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en always ought to pray and not lose heart.” ‘men’이라고 했으니까 “사람은 항상 기도해야 하고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지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 없는 옵션이 아닙니다. 기도는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낙심할 일이 없습니까? 여러분에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없습니까? 우리 주변에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열 두 번도 더 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네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말씀드린 연장선에서 오늘 시편 69편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For the choir director: A psalm of David, to be sung to the tune ‘Lilies.’” 이 시편 69편을 어떻게 노래로 불러야 하는지 합창 지휘자에게 주는 지시 (instruction) 사항입니다. 아마 그 당시에 ‘백합’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시편은 그 노래 곡조에 맞춰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모르니까 맞춰 부를 수가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쉬운성경에는 이 시편은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다윗의 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봐서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은 즐겁고 행복한 때를 노래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시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많은 은혜가 되는 이유입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잖아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한 자격이 없다.” 그렇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들은 다윗이 쓴 시편에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찰력 (insight)을 얻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기도가 주는 영적인 유익’입니다. 저는 오늘 시편 69편에 나와 있는 네 가지 기도가 주는 유익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유익들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유익들을 기도하지 않으면 모두 놓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하면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첫째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줍니다. ‘intimate (친밀한)’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제가 기억하는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노아 (Noah)’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This is the account of Noah and his family.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 (창세기 6:9) 직역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이것은 노아와 노아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흠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가까운)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호의를 기다리면서 주께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주의 크고도 크신 사랑으로 확실한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13절) 여러분, 다윗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도의 말들을 주목해 보세요. “주님의 호의를 기다립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in your unfailing love)’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시오.” “확실한 구원 (sure salvation)을 베풀어 주십시오.” “내게로 가까이 오셔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8절) “내 마음이 괴롭고 몹시 아픕니다.” (29절) 지금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이런 말들은 하나님과 ‘close (intimate) fellowship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쉽게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이런 말 대신 영혼 없는 형식적인 말들이 나옵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만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친밀한 단어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둘째로, 기도의 유익은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회개하게 합니다. 한번 다윗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님은 내 어리석음을 잘 알고 계시니, 내 죄를 주님 앞에서는 감출 수 없습니다.” (5절)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분 앞에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숨겨진 것들을 다 말씀 드리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전문적인 용어로 ‘confession (고백)’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정금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정금은 아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금을 말하잖아요? 지금 한국에 ‘Me Too’이 번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누구에게 말할 수 없어서 가슴에 숨겨두었던 일들을 하나 둘 공개적으로 꺼내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어디까지 어떻게 전개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워낙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다른 일보다 먼저여야 하니까 다른 말은 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냥 이러다가 수그러드는 일이 된다면 아예 처음부터 ‘Me Too’ 운동이 시작되지 말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되고,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 결과가 주목됩니다. 가해자 중에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나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아무리 가해자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결과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살한 사람의 평소 친구들 조차 그 사람의 장례식에 가는 일이 조심스러워서 꺼리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기도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confess’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confess’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해자도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confess’하면서 하나님께서 상처를 싸매 주시는 치유를 경험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 32편은 다윗이 가해자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confess’하는 시편입니다.

적절한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결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겨 놓았던 부끄러운 일들을 ‘confess’함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정금 같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삶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기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 역시 우리를 정결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고난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셋째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하나님을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provider (공급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신기하게도 시편 69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수소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흐뭇하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30-31절) 우리가 그 과정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 시편이 처음에는 어두운 기도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기도가 찬양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기도한 것들을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가 처한 상황을 이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들을 들어 주시고 공급해 주시는 ‘provider’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provider’라는 사실을 다른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성숙한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이런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리 믿음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인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 보겠습니다. “겸손한 자가 이러한 일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3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humble will see their God at work and be glad. Let all who seek God’s help be encouraged.” 여기서 ‘the humble (겸손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고난 받는 사람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마음이 낮아지잖아요?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시편 69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 속에 자기와 동일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자기와 똑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합니다. 나를 도와 주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도와 주실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기도가 자기 안에서 머물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 시킵니다.


3/10/2018 | 사순절 22

십자가의 싸인 The Sign Of The Cross

마가복음 10:35-45

오늘 말씀 제목은 ‘십자가의 싸인’입니다. 제가 어떤 문서를 작성하고 마지막에 싸인을 하면 그 문서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은 제가 작성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십자가라는 싸인이 들어가면, 그 일은 십자가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십자가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십자가는 그렇게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두명이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군지 성경에 ‘강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강도라고 한 것은 그 사람들의 잔인함이나 폭력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강도가 아니라 로마 정부를 뒤엎으려는 혁명을 시도 했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대신 풀려난 ‘바라바’도 ‘혁명가 (revolu¬tion¬ary)'였습니다. 로마는 다른 웬만한 일들은 유대인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로마는 일체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에 대항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을 매달아 죽이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이 끔찍한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몬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구레네 (Cyrene)’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지중해 연안의 ‘리비아 (Libya)’에 속한 곳입니다. 전통적으로 화가들은 구레네 시몬의 얼굴을 검게 그려 왔습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이니까 흑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몬이 완전히 리비아 사람이라기보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유월절에 시몬이 예루살렘에 왔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21에는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시간 상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기 어렵지만, 비록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 때의 그 경험이 시몬의 삶을 변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 (로마서 16:13)라고 할만큼 사도 바울의 사역에도 깊이 참여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십자가의 싸인들이 나타나야 할까요? 첫째로, 십자가의 싸인은 우리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나타납니다. 원래 십자가라는 것이 약한 것이잖아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죽는 일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내가 약할 때 그 때 나는 강합니다)” 우리에게 절망되고 낙심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의 싸인이라고 합니다. 이 십자가의 싸인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힘이 없을 때가 약한 때가 아니라, 내 힘이 강해서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교만한 생각이 들 때, 그 때가 가장 위험하고 약한 때입니다. 반대로, 내가 무력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히려 내가 강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약함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싸인은 우리의 구원 받은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죄에 대해서 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이 이끄는대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납니다.

셋째로, 십자가의 싸인은 희생과 섬김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2-44)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도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진정으로 높은 사람들이 된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진리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진리가 옳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생명을 내 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김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았던 엘리자베스 쉐핑 (Eliz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말 이름은 서서평입니다. 독일 사람입니다. 1912년, 서서평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조선) 왔을 때, 조선은 아직 개화 되지 않은 동방의 미개한 나라였습니다. 서서평은 한국인이 아니면서도 가장 한국인처럼 살았습니다. 한국인들과 똑 같은 옷을 입었고, 똑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된장과 고추장을 담아서 먹을 정 도였습니다. 서서평은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934년, 서서평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죽었습니다. 자신의 시신은 의학용으로 기부했다고 합니다. 장례식에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운구행렬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가 쓰던 방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가진 것까지 모두 조선 사람들에게 주고 떠난 것입니다. 그녀의 방 벽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s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최근에 ‘천천히 평온하게! (Slowly And Peacefully)’라는 서서평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많은 감동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싸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싸인은 (1) 우리의 약한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2)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변화의 삶을 통해서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납니다. (3) 우리의 삶에서 이기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자기를 ‘대속물’로 내 주신 예수님이 모습이 보일 때,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성취됩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의 싸인을 찾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무효로 만드는 일입니다.


3/9/2018 | 사순절 21

영원한 생명의 메시지 The Message Of Eter

고린도전서 15:50-58

오늘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을 이기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저에게는 존경하는 은사가 한 분 계십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학장으로 계셨던 윤성범 교수님이십니다. 그 교수님이 저의 결혼식 주례를 서 주셨습니다. 그 때 강당에 히터가 없어서 몹시 추울 때였는데, 결혼식 바로 며칠 전에 강당에 히터를 설치했습니다. 제 결혼식에 대한 교수님의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결혼식 꼭 1주년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교수님의 장례식에 갔었습니다. 오래 전 일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는데, 그 때 장례식에서 제자였던 변선환 교수님이 바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읽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으시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강당을 울려 퍼졌습니다. 지금도 그 때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이 찌르는 것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55-57절) 전 그 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이렇게 강력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크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요? 성경에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내일 죽을 텐데 먹고 마시자 (고린도전서 15:32)”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오직 현재의 삶만 있을 뿐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은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8절)

Rick Warren 목사가 쓴 책 ‘The purpose Driven Life (목적이 이끄는 삶)’이 그런 목적으로 쓰여진 책 아닙니까? 그 책에 5개의 목적이 나옵니다. 이 목적은 크리스천 뿐만 아니라 크게 보면 모든 인간에 주어진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 되었다 (We were planned for God’s pleasure). (2)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창조되었다. (4)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빚어졌다. (5) 우리는 선교를 위해 지음 받았다. 이 다섯 가지가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되고, 이 다섯 가지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영원한 삶에 대한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힘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영원한 삶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를 위한 영원한 집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간단한 질문 하나 드릴까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궁금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무슨 성경을 읽으면 좋을까요?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31)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들이 있을 곳이 많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한 장소를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한 장소를 마련한 뒤에,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요한복음 14:1-3) 번역 성경에 따라서 “내 아버지 집에 너희 있을 곳이 많이 있다”는 말씀이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mansions”라고 나와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mansions (큰 집)’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그런 것이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어저께 잠깐 ‘CoCo’ 라 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 화를 봤습니다. 어떤 평론 가가 그랬더라고요. “죽음 후의 삶이 이렇게 아름 답다면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예, 죽음 후의 삶이 아름답게 그려 진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죽음 후의 삶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운 천국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지옥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하는 토마스 에디슨 (Thomas Edison, 1847-1931, 미국)은 발명왕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어머니 영향을 받은 Christians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운명하면서 둘러선 사람들에게 “저기 보이는 저 곳은 참 아름답습니다 (It's very beautiful over there)!”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지옥의 삶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합니까? 지옥에서 고생하는 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나사로를 저의 형제와 가족들에게 보내서 이곳이 얼마나 끔찍한 지 이곳의 삶을 좀 알려 주게 해 주십시오.” (27-28절)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주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곳이 준비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내가 이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장례식에서 이 찬송가가 많이 위로가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저의 어머니 장례식 때도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가 222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입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 주시기를 바라네 (1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간 데마다 보호하며 양식 주시기를 바라네 (2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위태한 일 면케 하고 품어 주시기를 바라네 (3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사망 권세 이기도록 지켜 주시기를 바라네 (4절) (후렴)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가 되시고, 그를 믿는 사람들은 ‘부활의 열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잠시 헤어진 사람들은 주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22장의 영어 제목이 ‘Till We Meet Again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더욱 ‘하나님의 일’에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요한복음 9:4)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장차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모두 주님께 직접 말씀 드려야 합니다 (로마서 14:12, 베드로전서 4:5).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날을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삶의 유혹이 있을 때도 그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Will God approve of this (하나님께서 이 일을 승락하실까)?


3/7/2018 | 사순절 19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The Abundant Grace Of God

에베소서 1:3-6

오늘 말씀은 비교적 간단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축복 (spiritual blessings)’을 내려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Jesus)’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영적인 축복 (every spiritual blessing)’을 선물로 주신다고 합니다. ‘영적인 축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 축복이 ‘물질적인 축복’ 혹은 “세상적인 축복 (worldly blessings)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영적인 축복 (spiritual blessing)’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을 혼동합니다. 그냥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적인 축복’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화목한 가정’을 생각하거나, ‘자녀들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기껏해야 ‘마음의 평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은 그 이상의 축복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축복’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신 축복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니까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벌써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이면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도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계획은 이렇게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이 말씀이 NASB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you are A CHOSEN RAC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FOR [God's] OWN POSSESSION, that you may proclaim the excellencies of Him who has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marvelous light; for you once were NOT A PEOPLE, but now you are THE PEOPLE OF GOD; you had NOT RE-CEIVED MERCY, but now you have RECEIVED MERCY.”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씀입니까?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역사가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서 살다보면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그 나라 사람들과 동화되어 살기 쉽습니다. 이런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택한 민족으로, 고귀한 제사장직을 가진 사람들로, 우리를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상기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탁월하심 (the excellen-cies of God)’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잘 읽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 되고, 고귀한 제자장직을 갖게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참 하나님은 탁월하신 분이구나!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서 흠이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NASB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o be holy and blameless in His sight (하나님께서 보실 때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in His sight’라는 높은 도덕적인, 윤리적인 기준 (standard)을 제시합니다. 단순히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나는 잘 살고 있어!” “나보다 선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렇게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in His sight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가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높은 도덕적인, 윤리적인 기준에 맞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무턱대고 우리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또한 그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5절) 이 말씀은 NASB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love he predestined us to be adopted as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in accordance with his pleasure and will.” ‘predestined’라는 말은 그렇게 운명을 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adoption)’가 되도록 운명을 지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양자’가 무엇입니까? 그 집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는 그 집 아들이 아니었고, 그 집 딸이 아니었는데, 그 집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꽤 절차가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아원에서 양자를 데리고 오려면 그 동안 그 아이를 기른 양육비를 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양자로 데리고 오려면 경제적인 부담이 꽤 된다고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부담 외에 과연 그 집이 이 아이를 기를 수 있는 가정인지 까다롭게 심사를 거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로 들어갈 때도 그런 심사과정이 있을까요? 심사 과정이 있습니다.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삶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입니다. 이 조건만 갖춰지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양자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을 말한 다음,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6절)”고 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glorious grace)’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서 오늘 말씀이 끝이 납니다.

하지만, 바울이 쓴 로마서 말씀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영적인 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8:17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놀라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의 상속자입니다 (We are his heirs. In fact, together with Christ we are heirs of God's glory).”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로마서 8:29).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보니, 하나님께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양자가 된 우리는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8:15)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가 생기고, 형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서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양자가 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가족이 누구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이다.” (마태복음 12:48-50) 예수님은 벌써 누구든지 그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외로울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믿음의 공동체를 주시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영적인 축복은,
(1)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축복이다.
(2)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3)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 (양자)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5) 하나님의 양자가 되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의 상속자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6) 하나님의 양자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7) 하나님의 양자가 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이 되는 축복을 받는다.
(8) “나의 가족이 누구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이다.” (마태복음 12:48-50)


3/6/2018 | 사순절 18

우리의 궁극적인 확신 Our Ultimate Assurance

요한복음 20:19-29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이 부활했음을 보여 증명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결국 일주일 뒤에 다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느냐 하면, 19절에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Sunday evening the disciples were meeting behind locked door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ish leaders”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다 같이 모여 유대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일요일 저녁’이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주일 저녁 (that Sunday evening)’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근거 없은 루머였는지를 확인하려고 피나는 확인 작업을 했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 저자들의 부활에 대한 진지한 확인 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성 (the historicity of Jesus’ resurrection)’이 확인된 것입니다. 루머를 진실로 믿고 그 위에 우리 믿음을 세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또 확인되지 않은 몇 몇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그 위에 우리 믿음을 세울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은 진실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역사성’은 반드시 증명 되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베드로는 직접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사건 현장에 아무 증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매의 눈을 가진 형사입니다. 그 형사가 다시 한번 현장을 찾아 갑니다. 뭐라도 단서가 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현장을 살펴 봅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머리 핀 하나를 발견합니다. 결국 그것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그런 이야기 많잖아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아간 베드로는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발견했을까요? 예.발견했습니다. 요한복음 20:6-7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개역개정) 개역성경에는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이렇게 번역되었던 구절입니다. NASB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beheld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and the face-cloth, which had been on Hi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rolled-up’이라는 말은 ‘rolled and folded in the shape of a tube (튜브 모양으로 둥글게 말아 개켜져 있음)’ ‘Objects have been folded or wrapped into a cylindrical shape (그 물건이 원통형 모양으로 둥글게 감겨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중요한 말씀인지 아십니까? 여자들의 말을 듣고 빈 무덤을 찾아간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무덤에 먼저 도착한 요한은 몸을 굽혀 고운 베가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지만,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고운 베가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천은 고운 베와 겹쳐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동그랗게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모양 그대로 놓여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몸만 빠져 나가고, 머리를 감쌌던 천은 동그란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요한에게 “여기 좀 와서 보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 때서야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와 이 광경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 때 베드로와 자신이 함께 목격했던 광경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반대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몸은 그대로 있고, 영만 부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 안에서 목격했던 그 광경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몸은 무덤 안에 있어야 했으니까요.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고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한다는 이야기들이 돌고 있었습니다. 마태가 이 소문의 진상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 28:11-15).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과연 머리를 쌌던 천이 그렇게 동그랗게 둥근 모양을 유지한 채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도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해변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같이 식사를 했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1:12) 같이 식사를 했던 제자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분은 예수님이 분명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영지주의자들 (Gnostics)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지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이 아니라 실제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 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고,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부활의 역사성’을 생생하게 그들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들의 결과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반드시 가야만 하며, 거기서 장로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고난을 받아 결국엔 죽임을 당하지만 삼 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태복음 16:21) “인자가 많은 고통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고, 삼 일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8:31) 그런데, ‘부활의 역사성’을 찾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말씀들이 사실로 판명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역사성’을 확인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가진 분’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할 때 예수님은 ‘성경대로 (according to the Scriptures, 고린도전서 15:3-4)’ 부활하셨다고 설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Scriptures는 지금의 구약성경을 말합니다만, 예수님께서 평소에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에 대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는 교제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1-4)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다. (우리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2절)

(2)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2절).

(3)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3절).

여러분, 우리는 지금 초대교회 사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있습니다. 그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 시켰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매우 중요한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사도들이 확인한 ‘부활의 역사성’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이 증명됨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신뢰성이 생겼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몇 몇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믿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은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데?”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들이 오늘 우리가 그 위에 서서 살아가야 할 확실하고 견고한 base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약속들이 진실하고, 그 약속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사도들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치열하다’는 말을 쓰는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지우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영적인 부활로 축소 시킴으로써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려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믿음을 계승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보세요. 사도신경에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고백이 나오잖아요? “나는 전능하시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며......” 이 고백을 하기까지 사도들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도들의 믿음을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