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2018 | 사순절 37

하나님의 마음 The Heart of God

요한복음 3:10-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이야기는 구약성경 민수기 21장에 나와 있습니다.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Kadesh)’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기회가 왔지만, 에돔 (Edom)이라는 나라가 길을 내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에돔하고 싸우지 말고 길을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칠 대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거요? 여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소. 이 형편 없는 음식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독사를 보내 물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하던 사람들이 모세에게 와서 제발 이 뱀들을 없애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급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 보고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가 니고데모가 잘 알아들지 못하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단 구리뱀을 처다보면 다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내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가 올 텐데, 누구든지 나를 쳐다 보는 사람은 다 구원을 얻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쳐다 본다’는 말은 일종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소망을 둔다’ 혹은 ‘믿는다’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요한복음 3:16 말씀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잠깐 묵상해 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죄가 관영한 세상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막힌 세상이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둘째로,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싫어 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30:18, 시편 98:9).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면서도 동시에 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딜레마에 빠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이 충돌한 것입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은 이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요한복음 1:29, 36)”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낸 것은 우리의 죄를 그가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법을 어겼다든지, 윤리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든지 하는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죄를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죄일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혼자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런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죄를 ‘원죄 (the original Sin)’라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기 전에 모두 그런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니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비록 말한 대로 온전히 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지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모두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 전가 (imputation)된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죄인인 우리가 죽는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께서 모두 치르셨습니다.

넷째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값싼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맞습니까?

모세가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런다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두 살아났습니까? 아니잖아요?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 보는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끝내 쳐다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쳐다 보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나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쳐다 보는 사람이, 이 말은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이 열려 있지만, 누구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17절)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10-11) 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함 (actions)’으로 사랑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직접 행함으로 보이셨습니다.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ransom으로 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영감 (inspiration)을 얻어야 합니다.


3/27/2018 | 사순절 36

복음의 능력 The Power of The Gospel

데살로니카전서 2:1-12

오늘 말씀은 비교적 긴 말씀인데요. 하지만,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카 선교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씀입니다. “You know how badly we had been treated at Philippi just before we came to you and how much we suffered there”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카에 가기 전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We had been badly treated’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참 안 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빌립보서 루디아를 얻었고, 간수 가족을 얻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의 seed들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간수 가족을 얻기 위해서 바울과 실라에게 고난 받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요셉의 고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 개인적으로 보면 고난 받은 일들이 참 안 됐지만, 결과적으로는 요셉의 고난이 자기 가족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카 선교에서도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데살로니카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는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3주 에 걸쳐 유대인들과 성경을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 중에 바울과 실라의 전도를 받아 상당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리스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왔고,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 중에 바울과 실라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법을 어겨가며 예수라 하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다 (사도행전 17:7)”고 하면서 관가에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야손 (Jason)’이라는 좋은 사람을 만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데살로니카의 크리스천들은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전도를 못하게 된 것을 알고 바울 일행을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이런 배경이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3-12절 말씀은 바울이 자기의 심정을 공개한 말씀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1) 우리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악한 생각도 품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3절). (2)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검증을 받았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4절). (3) 자신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다고 합니다 (4절). (4) 자신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거나, 돈을 바라거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5절). (5)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권위를 사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6절). (6) 전도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합니다. (9절). (7) 자신이 흠없이 거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10절) (8) 자신이 전한 교훈은 사람들을 높여 주고, 위로하는 것들이었으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친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합니다. (12절)

여러분, 오늘 말씀에 열거된 말씀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게 전도자의 자질과, 사명과 전도자의 삶과 성도들에 대한 예의에 대한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크리스천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 한번 요약해 볼까요? 한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탁월합니다. 탁월하다고 하는 것은 그 메시지의 중요성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둘째로, 복음은 내용이 쉽고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이렇게 고백했잖아요? “Oh, how great are God's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 How impossible it is for us to understand his decisions and his ways!” (로마서 11:33)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매우 쉽고 간단합니다. 어린 아이들도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복음은 효력이 확실합니다. 어디서는 working하지만, 어디서는 working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는 working하는데, 누구에게는 working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자리, 어느 장소에서도, 누구에게나 working합니다. 요한복음 1:12이 그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넷째로, 복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충분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다른 또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 하나로 충분합니다.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어떤 위기 속에 있든지, 무슨 문제가 있든지, 복음은 그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모자람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이 이렇게 탁월하고, 쉽고, 확실하고, 충분한 것은 알겠는데, 그 복음의 능력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데살로니카전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이 거짓말을 합니다. 사기를 칩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의 생활이 건전하지 않아서 비난을 받습니다. 아니, 복음을 들은 사람이 왜 그렇게 삽니까? 복음을 듣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 사람 스스로 복음에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증명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삶이 예사롭지 않지 않습니까? 사도로서 쓸 데 없는 권위를 행사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대하는 것에 예의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전한 교훈은 건전하고 창조적입니다. 사도들은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곧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들의 이런 생각과 삶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는데,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억지로 그렇게 한다면 위선자들이 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지속적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 그의 삶이 변화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변화된 마음, 생각, 말과 행동, 변화된 가치관을 밖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능력에 대한 증명이 없습니다.


3/26/2018 | 사순절 35

우리의 큰 구원 Our Great Salvation

누가복음 7:44-48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 됩니다. 그리고 사순절도 이번 토요일로 끝이 납니다. 처음부터 출석하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번 사순절에 부어주신 은혜가 많은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곤 했지만, 여전히 저에게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미스터리입니다. 미스터리라는 말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머리로도 이해 가 안 되고,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감정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평생 가도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던 것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과 예수님의 인격과 삶 전체를 통해서,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속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지금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다. 또한 지금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다.” (누가복음 10: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when they were alone, he turned to the disciples and said, "Blessed are the eyes that see what you have seen. I tell you, many prophets and kings longed to see what you see, but they didn't see it. And they longed to hear what you hear, but they didn't hear it."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예언자들도, 왕들도 그렇게 보고 싶어 했고 듣고 싶어했지만,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미처 잘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예언자들도, 왕들도,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왕이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었던 솔로몬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언자들이, 솔로몬 같은 지혜가 많았던 왕이 그렇게 듣고 싶어 했고, 보고 싶어했던 것들을 지금 우리는 매일 듣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누가복음 말씀을 보실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살던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향유병을 들고 그 집에 갔습니다. 이 여자는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성경에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을 일을 했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 대로 이 여자는 몸을 파는 prostitute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누가 말릴 겨들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 시몬은 이 광경을 보면서 매우 불쾌했을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집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어떤 집인데, 너 같은 여자가 들어 와?” 하면서 매우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 예수라는 사람이 예언자라면 저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저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예언자가 아닌 것이 틀림 없어! ”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셨는지 예수님께서 시몬을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하지만)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 그것은 이 여자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 (47절) “A person who is forgiven little shows only little love, a person who is forgiven much loves much.”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5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빚을 갚을 길이 없었는데, 주인이 두 사람 모두 빚을 탕감해 줬다면, 누가 더 주인을 사랑했겠느냐?” 이 질문에 시몬은 “그야, 500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이 더 주인을 사랑했겠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대로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적게 탕감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주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적게 용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얼마나 형편 없는 삶을 살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알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큰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니, 이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가사를 쓴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John Newton 목사는 한 때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유럽 시장에 파는 노예선의 선원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자리까지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전해 주는 책 한 권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그 책 이름이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1380-1471, 독일)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입니다. John Newton이 그의 고백을 담은 찬송시를 들어 보십시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자신을 구원한 것은 ‘the precious blood of Jesus’라고 고백하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그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가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조상이 물려 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8)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포인트는,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엄청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들이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죄의 값으로 지불 하고서야 용서 받을 수 있을 만큼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보통 제물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내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 아는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 (디모데전서 1:15)’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실을 안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완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일대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5:23). 이 말은 그가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더 넓은 곳으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는 그의 복음에 대한 열망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큰 죄를 용서하셨다는 깨달음이 있는 자리가 곧 크리스천의 삶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감사의 자리이고, 사명의 자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 받았는지를 깨달은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 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찬송가 151장)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어서 내 몸을 바쳐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2:6-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 위에 있는 그분의 보좌 곁에 우리를 앉혀 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God made us alive together with Christ, and made us sit together in the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 so that in the ages to come He might show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 in His kindness toward us in Christ Je-sus).” (NKJV)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넘치는 부요함 (풍성함)’ 아닙니까? 어떤 성경에서는 ‘exceeding’이라는 말 대신 ‘surpass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튼 영어의 표현이 참 구체적이고 디테일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를 보여 주시려고 하시는데요. ‘in the ages to com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오고 오는 세대에’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시려고 하는데, 얼마나 그 은혜가 얼마나 부요한 지, 제대로 보여 주려면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보여 줘도 다 못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십자가 위에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넘치도록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하나님의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를 갚을 수 없습니다.


3/25/2018 | 종려주일 설교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

베드로전서 2:21-25

전 주에 우리 교회 성가대에서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가 참 좋은 찬양입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드디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네
그것은 나의 마음 모두를 주께 드리는 일 속에 있네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속에서
나의 삶을 모두 오직 주님께만 드리리, 오직 주님께만 드리리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한 적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모욕을 당해도 욕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당신 두고 봅시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다고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꼭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화목제물 (ransom)’이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두 강도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흠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개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를 기준으로 해서 천 년, 아니 천 오 백 년이 넘는 제사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도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BC 1,000년 혹은 BC 1,500년경이면 우리나라의 고조선 시대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유대나라의 역사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그들은 이미 문자가 있었고, ‘여호와’라는 유일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의 역사가 바로 그 때의 역사입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그 제사 중에 ‘화목 제사’가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때 제물로 드리는 것이 ‘흠 없는 어린 양’ 입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벽한 ‘the sinless and spotless Lamb of God (죄가 없으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베드로전서 1:19)’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는 유대인들의 제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전한 화목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은 그만큼 값진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에 써서 보냈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예루살렘에서 크리스천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조국을 떠나 주로 소아시아 지방에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가 편지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 구원이 값진 구원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 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이 있으라 (마가복음 11:9)!”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직 사람을 한번도 태워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합니다. 왜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발견합니다. 혹시 여러분, 로마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을 읽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언한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 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길로 들어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1-22)

새롭게 열린 구원의 길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언한 길이라고 하잖아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신 구원의 길에, footnote가 달린 것입니다. 학생들이 논문을 쓸 때, 자기 주장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이렇다는 주장을 할 때 아무 근거 없이 그런 주장을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대야 합니다. 그것이 footnote 아닙니까? 우리 말로는 ‘관주(貫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누가 다 큰 사람이 나귀 새끼를 타겠습니까? 아주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스가랴 9:9’ 이라는 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스가랴 (Zechariah)는 기원전 약 500년 경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언한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500년 전에 기록한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구원의 새 길은 이렇게 예언자들이 증언한 길입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 (The Passion Week)’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한 주간을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에 보면 “그는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으나,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털을 깎이는 양과 같이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야 53:7)” 고 했는데, 정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심문을 하던 총독 빌라도가 이상하게 여길만큼 예수님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14).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만 자기를 변호하면 더 편해 질 수도 있고, 재판이 유리하게 돌아갈 수도 있는데,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복음서 여기 저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은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사형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 (wine drugged with myrrh)를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형이 집행 되는 과정에서도 한번 더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사형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려는 인간적인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5:23)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 어떤 것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 고통을 몸소 다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왜 (Why)?”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1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example’을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요. “A Christian is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받아 들이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우리도 예수님이 남기신 발자국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세상에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기술적으로는 더 발전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나빠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말씀대로 살기를 거절한다면 더 이상 인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디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어디 내가 같이 시간을 보내줘야 할 사람은 없는가?” “내가 얘기를 들어줘야 할 외로운 사람은 없는가?” “어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는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없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에게 희망이 생긴다니까요.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죽을 우리 몸에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 있지만 예수님을 위해 항상 몸을 죽음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활동하지만,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 “Through suffering, our bodies continue to share in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seen in our bodies. Yes, we live under constant danger of death because we serve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will be evident in our dying bodies. So we live in the face of death, but this has resulted in eternal life for you.”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이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당신은 정말 예수님 같이 살고 있네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살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So we live in the face of death, but this has resulted in eternal life for you”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살아가는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 살면 돼!”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정말 우리교회에 나오는 청년들 중에 이 말씀처럼 살겠다는 청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 청년들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고급 인력들입니다. 어디서나 리더십을 가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들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요. 이 사람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이 말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라는 말입니다), 의 (the righteousness)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 속에 들어가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We Are The Reason’ 이 노래 가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우리의 삶에 이런 가슴 벅찬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 죽겠다는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살 이유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목자를 찾아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목자를 잃어 버린 양처럼 이리 저리 방황하지 않고, 영혼의 목자에게 인생의 닻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방황하는 분들 있나요? 어디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인생의 한 과정으로 방황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황은 창조적인 방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방황이라면 끝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우리의 영혼들이 영혼의 목자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방황을 계속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합니다 (We have this hope as an anchor for the soul, firm and secure).” 배가 항구에 들어와 닻을 내리면 파도가 쳐도, 바람이 불어도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닻을 내려야 떠내려 가지 않습니다. 우리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 분,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할 분입니다. 그 분에게 닻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이 ‘frim and secure (견고하고 안전)’해 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있는가?” 하고 질문해 보십시오.


3/24/2018 | 사순절 34

십자가 후에 After The Cross

요한복음 14:16-19

성령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금방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요한복음 16:7)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됩니까?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지 않으면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고 ‘보혜사’께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보혜사 (16절)’라는 말입니다. 본래 ‘보혜사’라는 말은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하는데요. ‘곁으로 부르다’ ‘도움을 청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번역하다 보니까 ‘Advocate (대변자)’ ‘Comforter (위로자)’ ‘Encourager (격려자)’ ‘Counselor (상담자)’ 등 여러가지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6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쉽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자기는 하나님께로 가지만, 내가 너희를 버려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18절)”고 하시잖아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지만, 사실은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혹은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 (17절).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2:10).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때로는 대변자로, 때로는 위로자로, 격려자로, 상담자로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을 잘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깨달으면, 우리는 믿음생활을 바른 길을 따라 잘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 ‘보혜사’의 인도를 잘 받으면 우리는 진리의 길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일 많이 하는 오해는 성령을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영어에서 성령을 말한 때는 언제나 ‘He’라고 남성 명사로 표현합니다. 절대로 ‘it’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는 명사에 성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παράκλητος’는 남성 명사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대명사로 표현하려면 ‘그분’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격이 있으시다는 말은 성령께서 감정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면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지 않으면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방법은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니까 우리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영이시니까 우리의 영의 채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성령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입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꽉 차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내 속에 성령이 꽉 차 있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부흥사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아멘, 아멘”합니다.

성경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셨다.” (누가복음 4:1)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기를” (사도행전 4:8)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사도행전 6:3)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사도행전 11:24)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은 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꽉 찬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이미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3 말씀을 쉽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즉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그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이미 내 안에 온전하게 들어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지배하셨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해 지배하신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셨으면 우리는 그것을 ‘성령 충만한 삶 (The Spirit Filled Life)’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작은 차이라고 생각 되시나요?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생활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많이 넘어집니다. 사탄이 그런 사람을 공격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그런 때에 전혀 working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내가 구원 받았을 때 그때부터 이미 성령은 내 안에 계셨어요. 조금 계시고 많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많이 지배하느냐, 적게 지배하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은 제자들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완전히 지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잘 이해한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 생활에서 승리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서 working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양의 많고 적음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서부터 성령에 대한 오해가 시작됩니다. 성령은 처음부터 우리 안에 온전히 계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유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소유하는지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소유하시면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보세요.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신다고 생각하면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 일을 하다가 시험에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주 시험에 걸려 넘어집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성령께서 일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일하는 것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즉 ‘십자가의 죽음 후에’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아 가십시오. 잘못 배운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배운 지식이라야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working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대변자가 되시고,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격려자가 되시고, 상담자가 되시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