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17/2017 | 대강절 셋째 주일 설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요한복음 3:14-18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때 사랑을 상징하는 핑크색의 촛불을 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들어왔다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은 참된 사랑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시간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전형적인 (typical) 예를 찾아 보기 위해서 그 때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면서 인간성의 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불평과 원망입니다.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왔느냐?” “먹을 것이 없지 않느냐?” “마실 물이 없지 않느냐?” “우리를 이곳에 매장 시킬 셈이냐?” “이 형편없는 음식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런 원망은 곧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자기들을 해방 시켜서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면적으로 부정(否定)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요?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올 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감사함으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 (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사람들은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를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모세는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그것을 쳐다 보는 사람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So Moses made a snake out of bronze and attached it to a pole. Then anyone who was bitten by a snake could look at the bronze snake and be healed!” ‘구리로 만든 뱀’으로부터 무슨 능력이 나왔습니까?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았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낫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나았고,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lifted up’이란 말은 ‘lifted up on the Cross’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 매달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때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을 보고 믿는 사람은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Good News’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렸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inspite of)’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상’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일들이 있습니까? 세상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화제입니다. “도대체 AI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며칠 전 신문에서 ‘AI가 쓴 해리포터 (Harry Potter)’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해리 포터’는 영국 작가 조앤 롤링 (Joanne K. Rowling)이 쓴 판타지 소설입니다. 모두 7편으로 끝이 난 소설입니다. 그런데 AI가 후속편을 썼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인 저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불과 10년 후만 되어도 세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세상으로 발전되어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한 교회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만한 능력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신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는 ‘His one and only Son (NLT, NIV)’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 보면 ‘His only begotten Son (NASB)’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 말로 ‘독자’ 혹은 ‘외아들’이라는 말이 좋겠네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부부를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가정에 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가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 방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7). 그래서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 (mager)에 뉘어야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을 낳은 어머니가 그런 형편이었다면 두고 두고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우리의 생각이 바뀝니다. 아기를 낳았는데, 어디 마땅히 뉘일 곳이 없어서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뉘어 놓은 것이 우리에게는 참 안 됐고,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우리에게는 불행하게 보이는 일도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일들이 됩니다.
아무 것도 사랑할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lifted up on the cross)’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 시키는 ‘화목제물 (ransom)’이 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은 F. M. Lehman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글로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는 별 위에까지, 아래로는 지옥에까지 미치는, 오, 측량할 수 없는 강한 하나님의 사랑! 얼마나 풍성하고 순결한지요!) “Nor could the scroll contain the whole, Tho' stretched from sky to sky.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비록 두루마리를 하늘에서 하늘까지 펼친다고 해도 다 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풍성하고 순결한지요!)
성경을 쓴 저자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에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New Living Translation)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10,000 달란트 빚진 사람의 이야기 (마태복음 18:23-34)’를 아십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자기는 10,000 달란트 (375 tons or 340 metric tons of silver)의 빚을 갚지 않아도 좋다는 은혜 입었으면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약 3개월치 임금에 해당)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집어 넣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내려 왔습니다 (Love came down)!”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시려고, 사랑이 내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Dear friends, since God loved us that much, we surely ought to love each other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한일서 4:10-11)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진리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일서 3:18-19)
요한복음 3:16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증거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축구 (football) 선수 중에 팀 티보우(Tim Tebow)라는 쿼터백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플로리다 대학 축구에서 이미 역전승의 기적을 일으키는 선수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아이패치에 John 3:16이라고 쓰고 경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팀에 입단할 때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티보우는 패싱이 약하고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축구에서는 통했지만, 프로팀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혹평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데려가는 프로팀이 없을 것이라고들 했지만, 2010년에 그는 덴버 브롱코스 (Denver Broncos)에 입단합니다. 프로팀에서는 아이패치에 아무 것도 쓸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John 3:16이라는 숫자를 쓰는 대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티보잉 (Tebowin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냅니다.
2012년 1월 8일 결승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피츠버그 스틸러스 (Pittsburgh Steelers)와의 경기에서 3쿼터까지 점수가 23:23이었습니다. 티보우는 4 쿼터에서 다시 기적을 일으킵니다. 티보우는 전문가들이 약하다고 지적했던 패싱으로 터치다운을 성공 시킵니다. 그 경기에서 기록한 10개의 패싱 총 길이가 316 야드였습니다. 평균 31.6 야드였습니다. 그날 그 경기 시청률이 31.6%였다고 합니다. 덴버가 승리한 후에 구글에서 도대체 요한복음 3:16에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무려 1억 2 천 번이나 검색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티보우처럼 드라마틱하게 요한복음 3:16 말씀을 세상에 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각자에게 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티보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그 분을 자랑할 것입니다.”
12/10/2017 | 크리스마스 설교 I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 Good New Of Great Joy For All The People
누가복음 2:3-14
머라이어 캐리 (Mariah Carey)가 부른 ‘Jesus Born On This Day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가 생각나는 말씀입니다.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 (오늘 세상에 한 아기가 나셨네)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
Today the glory of God shines everywhere (오늘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비치네)
For all the world (온 세상을 위하여)
Oh Jesus born on this day (오,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
He is our light and salvation (그는 우리의 빛이요 구원이시네)
Oh Jesus born on this day (오,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
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그는 열방의 왕이시네)
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다!)
(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
Behold the Savior is born (보라! 구세주가 태어 나셨다!)
Sing of His love to everyone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라)
Oh Jesus born on this day (오,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
Heavenly child in a manger (하나님의 아들이 말 구유 안에 뉘어 있네)
Oh Jesus born on this day (오,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
He is our Lord and Savior (그는 우리의 구주시요, 구세주이시네)
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 (오늘 우리의 마음이 그를 기뻐하네)
(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
Today the light of His birth (오늘 그의 탄생의 빛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Fills us with hope and brings peace on earth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오네)
Oh Jesus born on this day (오,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
He is our light and salvation (그는 우리의 빛이요, 구원이시네)
Oh Jesus born on this day (오,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
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그는 열방의 왕이시네)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 (오늘 세상에 한 아기가 태어났네)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알다시피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의사로서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행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도 주치의(主治醫) 자격으로 바울과 동행합니다.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바울을 떠날 때도 누가는 끝까지 바울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4:11). 그는 바울과 동행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사도행전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누가는 관심이 가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조사하고, 자료를 찾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쓰려고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 즉 말씀의 종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존귀하신 데오빌로 각하, 저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였으므로, 이 일을 각하께 차례대로 기록하여 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미 배우신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 누가는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에 대하여 저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하게 조사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조사하고 기록한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은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데오빌로 (Theophilus)’라는 사람에게 헌정하는 식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데오빌로’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것과 또 그에게 ‘각하 (most excellent)’라는 말을 붙인 것을 보면 그리스의 최고급 관리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가 왜 베들레헴으로 갔는지, 우리는 누가복음이 아니었으면 그 이유를 모를 뻔했습니다. 누가는 그 이유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아구스도 (Augustus, BC 63-AD 14)’ 황제가 호적 등록을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레뇨 (Quirinius, BC 51-AD 21)’라는 시리아 총독이 이 일을 주관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가문이었던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하러 갔고,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아무 일도 아닌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담겨 있는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 왕을 찾아와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다고 그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을 때, 헤롯 왕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는지 성경을 조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학자들은 구약성경 미가 5:2에 나오는 말씀을 찾아냅니다. 그 말씀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a ruler of Israel)’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예언의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말씀이 곧 메시야의 출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신 것은 곧 미가가 예언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 때 인구조사를 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없었더라면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 칙령이 조금만 더 일찍 내렸더라면 베들레헴에 갔더라도 예수님을 낳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칙령이 조금만 더 늦게 내렸더라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고, 또 사마리아 지방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약 80마일 정도는 걸어야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통 하루에 20마일 정도 걷는다고 생각하면 4일 정도 걷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까지 계산해서, 더 이르지도 않고, 더 늦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으로써 미가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누가가 쓴 글을 보십시오. “이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 아기를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And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her baby to be born).” (6절)
누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이 베들레헴 근처 들판에서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도 누가가 성경을 기록한 관점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여자들의 복음이라고요. 맞습니다. 누가복음에 여자들에 대한 말씀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또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누가복음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겸손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6:20)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사람들이라고 축복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겸손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쓰시기 전에 양을 치는 목자로 40년을 훈련 시키십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겸손한 사람으로 훈련 시키신 기간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단순히 윗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40년 동안 겸손의 훈련을 받은 모세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반대로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십니다 (야고보서 4:6, 잠언 3:34)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 그의 음성을 들려 주시고,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He favors the humb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가진 사명 중의 하나는 사람들을 humble하게 신앙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보스턴은 학문의 도시입니다. 보스턴 인근까지 세면 모두 114개 대학이 있다고 합니다.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들입니다. 여기서 공부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교육입니다. 그리고 신앙교육은 곧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겸손하게 성경을 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겸손하게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으로 훈련 받고, 예수님처럼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ransom (화목제물)’으로 드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근처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받은 하나님의 favor는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한 밤 중에 들에서 양을 치던, 마음이 humble한 목자들이 구세주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10-12절)
목자들이 들었던 성탄의 메시지는 요약하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세주’는 ‘세상을 구원할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avior (구원자)’입니다. ‘save (구원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이 말에서 ‘salvation (구원)’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 한 잔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병든 사람은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생명이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는 그 생명을 보호해 주고, 지켜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했을 때,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라는 이름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아세요? “그가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신다 (마태복음 1:21)”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의 막혔던 소통의 길이 열리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께도 돌아오게 되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구세주'입니다.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10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소식입니다. 복음은 누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해져서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먼저 들은 사람들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로마서 8:23)’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의 사명은 우리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들이 열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은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자기 자신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서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한 바울은, 그 빚을 갚기 위하여 로마를 지나 스페인으로 갈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생각하십시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인 나는 어떻게 복음의 빚을 갚을 것인가?” 고민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을 옆의 친구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혼자는 어려워도 여럿이 함께는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습니다. 이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나요? 이제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천군천사들의 노래는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4절)’ 이렇게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이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이 있는 사람들 있습니까? 마음을 크게 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말씀을 받아 들이십시오. 교우 여러분들의 마음에, 가정에, 그리고 우리교회 안에, 그리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12/3/2017 | 대강절 설교 1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To The People Who Sat In The Darkness Of Death
마태복음 4:12-17
‘대강절(待降節)’은 말 그대로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에서 유래되지 않았는가 합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오직 기도에 힘썼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제사장이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누가복음 2:25)’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 또 한 사람이 나오는데, ‘안나’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 (누가복음 2:37)”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다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대강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지런히 교회 절기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 왔던 교회 절기가 우리 믿음생활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교회에서 예전부터 교회절기를 지켜 왔습니다만, 개신교 교회들 (protestant churches)은 그동안 교회 절기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개신교 교회들이 교회 절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어 많은 교회들이 교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특별히 ‘사순절 (Lent)’을 전교인 40일 새벽기도의 기간으로 정하고 의미 있게 지키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영어로, ‘Advent’라고 합니다. ‘출현’ ‘출몰’ ‘나타남’ ‘도래(到來)’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강절에는 ‘대강절 촛불’을 켭니다. 첫 주에는 보라색 초를 켜는데, 이 촛불은 ‘희망 (Hope)의 촛불입니다. 둘째 주 역시 보라색 초를 켜는데, 이 촛불은 ‘평화 (Peace)’의 촛불입니다. 세 번째 주는 핑크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사랑의 촛불’입니다. 네 번째 촛불은 다시 보라색과 흰색 촛불을 켜는데, 이것은 ‘기쁨의 촛불’입니다. 흰색 촛불은 ‘그리스도의 촛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희망의 빛, 평화의 빛, 사랑의 빛, 기쁨의 빛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세상은 희망이 없었고, 평화를 몰랐고, 사랑을 몰랐고, 기쁨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4장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유대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목,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고 기록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이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 9:1-2에 이렇게 나옵니다. “Nevertheless, that time of darkness and despair will not go on forever. The land of Zebulun and Naphtali will be humbled, but there will be a time in the future when Galilee of the Gentiles, which lies along the road that runs between the Jordan and the sea, will be filled with glory. The people who walk in darkness will see a great light. For those who live in a land of deep darkness①, a light will shine. /①Greek version reads a land where death casts its shadow.”
이 말씀에 스불론 (Zebulun), 납달리 (Naphtali), 갈릴리 (Galilee)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도대체 그 곳이 어떤 곳인지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에 스불론와 납달리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입니다. 스블론은 레아 (Leah)가 낳은 아들이고요. 납달리는 빌하 (Bilhah)라는 라헬의 여종이 낳은 둘째 아들입니다. 야곱은 라헬 (Rachel)이 낳은 요셉 (Joseph)과 베냐민 (Benjamin)만을 총애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불론과 납달리는 야곱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았던 아들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분배할 때, 스불론과 납달리가 분배 받은 땅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는 남쪽의 유대지방, 중간지대의 사마리아, 북쪽의 갈리리지방 이렇게 세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방마다 분봉왕이 있었잖아요? 스불론과 납달리 후손들이 사는 땅은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인의 땅 (Galilee of the Gentiles or in Galilee where so many Gentiles live, 이사야 9:1, 마태복음 4:15)’으로 불리울만큼 변방(邊方)의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마태가 주목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주된 사역지로 정하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변방의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제일 먼저 들은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큰 빛 (a great light)’을 보는 때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마태는 갈릴리 지역지역에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였습니다. 불과 132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서양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동양의 끝 작은 반도의 나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변방의 땅’이었습니다. 그 때 작성했다는 이런 기도문이 남아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에,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은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들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지만, 저희들이 우리가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기도문을 쓴 사람이 언더우드 (H.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가장 잘한 결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4-15에서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우리 한국 땅에,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한국이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 한국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그 땅이 희망의 땅으로 바뀝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변방입니다. 소외된 지역입니다.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수많은 혁명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5:36-37에 혁명가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드다 (Theudas), 유다 (Judas of Galilee), 이런 사람들은 모두 혁명으로 그들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에게 복음의 큰 빛이 비쳤을 때, 사람들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 (the power of God, 로마서 1:16)’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 (God’s Mighty Weapons, 고린도후서 10:4)’ ‘Divine Power (NIV)’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강력한 복음의 능력 앞에서 어떤 인간의 사상이나 이론들이 힘 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디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If there’s a Goliath in front of you, that means there’s a David inside of you (만약 당신 앞에 골리앗이 있다면, 그것은 곧 당신 안에 다윗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 앞에 서 있던 엄청난 거인 골리앗이 다윗이 던진 돌멩이 하나를 맞고 힘 없이 쓰러졌잖아요? 비유적인 의미에서 다윗은 ‘복음의 능력’을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골리앗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운명의 굴레를 씌우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운명은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의 능력 앞에서는 운명처럼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그 어떤 것들도 무너진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믿는 우리에게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이 주어졌습니다. 어둠의 땅이 빛의 땅으로 바뀌고, 사망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우리 속에 복음의 빛이 비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삶이었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큰 빛 (a great light)’이 비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희망의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정말 지금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바뀌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민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것인지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삶을 모두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아이들의 문제, 심리적인 불안과 갈등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 우리에게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 외에 청년들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암울한 현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공부를 마쳐도 마땅히 일할 곳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금방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우리 밖에 수많은 골리앗들이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장애물들을 모두 치워주십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앞에도 똑 같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것과 없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누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희망이 있는 것과 희망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바울은 희망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희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로마서 8:24-2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were given this hope when we were saved. If we already have something, we don't need to hope for it. But if we look forward to something we don't yet have, we must wait patiently and confidently.”
희망이 있는 사람은 현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기다릴 줄 압니다. 단순히 참고 기다리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것을 이깁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은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좌절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희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이 차이가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짙은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주심으로, 희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혹시 지금 이 시간에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조용히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도 견디어 냅니다. 견딜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이깁니다.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이깁니다. 즐거움은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