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018 | 사순절 15

겟세마네의 교훈 Lessons in Gethsemane

고린도후서 5:1-9

예루살렘을 여행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 보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이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겟세마네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입니다. 올리브산 자체가 절대 높은 산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720m 정도이고, 올리브산은 이보다 조금 높은 해발 820m 정도입니다.

올리브산에는 말 그대로 올리브 나무가 많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아주 단단하고 강인한 나무입니다. 올리브 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열매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고, 열매를 짜서 나오는 기름은 건강에 좋은 최고 품질의 기름입니다. 그리고, 나무는 아주 단단해서 목공이나 조각품을 만듭니다. 올리브 나무는 똑 바로 자라지 않고 줄기가 뒤틀리면서 자랍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어느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올리브 나무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나무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겟세마네 동산 어딘가에 은밀한 예수님의 기도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늘 그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큰 올리브 나무 근처 어디였는지 모르지요. 제자들은 그 장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그 저녁에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될 수만 있다면 이 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고 (He wen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다 (누가복음 22:39)”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과 조금 떨어져 혼자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북돋워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날 밤이었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예수님의 괴로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He was in such agony of spirit.”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는 매우 근심하며 괴로워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4:33-34)’”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그토록 괴로워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 힘들어 하셨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괴로워하셨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것 (to be separated from God)"이었습니다. 죽음을 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있던 시간은 이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날 수로는 삼 일이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속에 있었던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도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 논리로 무장된 사람들이나,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예수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힘들고 아파하셨던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 때가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속으로 들어 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그 날 밤에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감당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구원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상하지 않았던 문제가 생기고, 고통과 아픔, 실패와 좌절이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도 고난은 예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의 뜻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아픔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당장에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지금 손 놓고 계시는 것 아니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위해서 가장 완벽한 계획을 수행하고 계셔. 나는 지금 그 과정 속에 있는 거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와 십자가를 지시는 모든 과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힘들어 하시더니, 급기야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pro-ject는 착착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for we live by believing and not by seeing).”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간략하게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울 같은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사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사도로 살아서 받은 눈에 보이는 보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 말씀이 “우리가 거하는 땅에 있는 천막집이 무너진다”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천막집이니까 제대로 된 집이 아닙니다. 그것마저 무너집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면 사도의 삶이 그렇게 초라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천막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삶도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놀라운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나님은 그의 신실한 종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집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이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and as a guarantee he has given us his Holy Spirit).” (5절) 예,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보증 (guarantee)’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공식 (formula)과 같은 것입니다. 공식은 답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식을 모르거나, 잘못된 공식을 사용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올바른 공식에 올바로 대입하면 정답이 나옵니다. ‘겟세마네 동산→ 순종→ 하나님의 뜻의 성취’ 이 공식에 대입을 하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 고난과 시련을 대입하고, 다시 거기에 순종을 대입하시면 ‘띵똥땡’ 하고 정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은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을 이깁니다. 예수님도 그런 믿음으로 사셨고, 사도 바울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3/1/2018 | 사순절 14

또 한번의 기회 A Second Chance

요한복음 8:1-11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올리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1-2절)  예수님께서 전 날 성전 뜰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긴장감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밤에 올리브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님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소통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반성해 보면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수님은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언제 왔는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성전 뜰에서 기다리던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이 누군지 정확하게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다. “야, 이건 새로운 교훈이다.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본 적이 없어! 이 분의 말씀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이지?” (마가복음 1:27, 누가복음 4:32) 예수님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People Need The Lord)’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을 무웠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2,000전에도 그렇고, 그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공허함 (emptiness)’의 정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입니다. 이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갈급함을 느낄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 이른 새벽에 성전 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들 속에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먼저 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왁작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들 간음 현장에서 붙잡아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얻기 위해 이렇게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6절) 무슨 뜻입니까? 지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끌고 온 것은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예수님을 trap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plot (음모)을 꾸며 온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음모에 보기 좋게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 바닥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조급하게 계속 묻습니다. “아니, 선생께서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시겠냐고 묻지 않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예수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기다립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7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떠나가고, 마지막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손에 들었던 돌을 놓고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은 이유는 자기들도 이 여자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들 (the religious people)’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겉에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이렇게 착하고, 선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는 온갖 나쁜 일을 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제가 반복해서 잔소리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 됩니다.” “성경 읽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늬만 크리스천이지 자세해 보면 크리스천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째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에 대하여 정죄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예수님은 이 여자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The love Jesus demonstrated at the Cross is unconditional. True love reaches out to the unlovely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이다.”

둘째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회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1절)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도 예수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누가복음 19:9-10)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도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잘 믿고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잘못된 삶과 단절하고, 하나님의 ‘의의 도구 (instrument of righteousness) (로마서 6:13)’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으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또 한번의 기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올바로 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미 이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가 헛되지 않도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2/28/2018 | 사순절 13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고린도후서 7:8-12

오늘 요절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godly sorrow)’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슬픔 (worldly sorrow)’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 슬픔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슬픔은 ‘세상의 슬픔’인데요. 무슨 슬픔일까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슬픔, 억울한 일을 당한 슬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슬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슬픔, 이런 슬픔들이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영적인 죽음 (spiritual death)’을 가져 온다고 했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읽은 한 토막만 떼서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왜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오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교회들은 거의 모두 바울이 세운 교회들입니다. 교회들마다 그 교들의 독특한 역사가 있고,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선교 전략지역으로 여기고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아무 예외적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본 이유는 환상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For I am with you, and no one will attack and harm you, for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사도행전 18:10)”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선교 방식에 있어서도 고린도 선교는 특별했습니다. 바울은 ‘tent-making mission (천막제조 선교)’이라는 독특한 선교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바울의 선교방식을 따르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즉 선교지에서 직업을 가지고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벌어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기서 평생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 I am thankful to them (그들 부부는 나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을 감수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들 부부에게 감사합니다).” (로마서 16:3)

이상이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대충 요약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용 면에 있어서 고린도 선교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8-9 상반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로 인하여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편지로 인해 잠깐이나마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알고는 나 자신도 후회를 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라니요? 그것이 무슨 편지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편지가 고린도전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보낸 또 하나의 편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눈물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편지입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A. D. 56년 경에 디도를 통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한 실랄한 책망과 충고,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그 편지를 보내 놓고 매우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강하게 편지를 쓰지 않았나?” “혹시라도 이 편지가 문제가 되어서 오히려 교회 문제가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내 편지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편지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을 돌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졌던 슬픔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

오늘 우리에게는 잘못한 것을 무조건 덮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냥 덮어 주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용서가 어떤 용서인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무조건 눈 감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덮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내셨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그 죄를 자기의 아들에게 전가 (imputation) 시켰겠습니까?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를 꺼내는 것은, 그 공동체 속한 모두에게 큰 아픔을 줍니다.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꺼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문제가 더 심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초기 단계에서 빨리 수술을 했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을, 수술할 시기를 놓쳐버려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힘든 치료 과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술을 해야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7:10에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to experience leads us away from sin and results in salvation. There’s no regret for that kind of sorrow.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우리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어제 한국 뉴스를 봤더니 또 한 사람이 자신이 연극인이라고 하면서 실명으로 TV 인터뷰에 나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실명으로 나를 밝히지 않으면 상대방이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하기 때문에 여자인 제가 실명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의 문제를 자꾸 말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드러내서 회개해야 할 문제인데, 그냥 덮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가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선자 (hypo¬crites)’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를 덮지 말고 입을 열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그런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자신에 대하여 진진한 반성이 없었지 않습니까? 한번도 입을 열어 진지하게 회개의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11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진지해졌을 뿐만 아니라 성의를 갖게 되었으며, 내가 지적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열심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의 도움을 바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서 죄지은 사람을 처벌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현대어성경)


2/27/2018 | 사순절 12

죄를 용서 받는 회개 A Call To REpentance

누가복음 24:44-4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모세의 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에 관해 쓰여진 모든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44절) 여기 ‘모세의 법’ ‘예언서’ ‘시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성경에 없었으니까, ‘모세의 법’ ‘예언서’ ‘시편’ 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모세의 법’은 흔히 오경이라고 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5권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삼 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회개가 전파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고난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일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ou are witnesses of all these things). 내가 미리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대로 되는지 되지 않는지 지켜 보고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절은 46-47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가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를 전파해야 합니까?
성경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크고 작은 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Me Too’ 운동을 보십시오. 법복을 입은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생각도 못할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예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인들도 똑 같은 일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행한 일들이 그동안 숨겨져 있다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23). 정말 문자 그대로 죽을 죄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어금니 아빠’라는 흉악범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미국 체조팀의 팀 닥터로 있는 래리 나사르 (Larry Nassar, 54세)라는 사람이 수십년 간 156명의 선수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것이 드러나서. 판사는 이 사람에게 175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판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수 없습니다!” 저도 뉴스에게 그 장면을 봤는데, 섬칫 하더라고요.

이런 것은 극단적인 예들이지만, 오늘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3:9).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 죄를 다 치르지 않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길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고 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해야 합니까? 이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길을 전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열린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의 회개를 전파해야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목격한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나의 증인들인 너희가 세상에 나가서 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를 전파하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특징은 쉽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쉬운 복음을 어렵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없습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편지에 나오는 말씀만 해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참 아이로닉한 일입니다. 로마서 말씀 같은 것은 얼마나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까? 설교자들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성경 말씀보다 목사들의 설교가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좋게 말해서 ‘지적인 설교 (intellectual sermon)’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말이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설교를 왜 ‘지적인 설교’라고 칭찬합니까? 또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설교를 지적인 설교라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보세요.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용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12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런데, 꼭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예, 꼭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 (door)’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순서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회개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깜짝 놀란 요한은 이렇게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주님께서 저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It should be done, for we must carry out all that God requires①." So John agreed to baptize him. / ①Or for we must fulfill all righteousness.” (마태복음 3:15)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보내서 먼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의 사역이 끝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회개는 복음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요한은 그 문을 여는 사역을 감당했고, 예수님은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교회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름 으로’ 죄를 용서 받은 회개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로들 여러분의 ‘Personal Savior’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 전에 여러분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말은 나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 사방이 고요한 시간에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여러분은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나에게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죄사함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생활 했던 햇수가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여러분의 ‘Personal Savior’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나는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 들입니다. 아멘.”


2/26/2018 | 사순절 1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The Supreme Moment in History

골로새서 2:11-15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Look!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요한복음 1:29, 36)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쉽게 이해합니다. 명절 때마다 어린 양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들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물로 드릴 양을 고를 때 깨끗하고 순결하고 아무 흠이 없는 어린 양을 골랐습니다. 그 어린 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 자신들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The Lamb of Go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take away (없애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신 ‘어린 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시는 분들은 금방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14에 나오는 ‘여호와이레 (Yahweh-Yireh)’라는 말이지요? ‘여호와이레’란 말의 뜻은 “The Lord will provide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위해서 이삭 대신 하나님께 드릴 어린 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제물로 쓸 어린 양을 준비하셨는데, 그 제물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실 때, 이 때야 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역사는 ‘그 순간 (the moment)’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의 (God’s righteousness)’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가 우리를 지배했던 역사가 끝이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나님과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라는 장매물이 제거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의 의미를 로마서 6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 (as instruments of evil)’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1-13)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미를 ‘new circumcision (새로운 할례)’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new circumcision’에 반대되는 말은 ‘old circumcision (옛날의 할례)’입니다. ‘옛날의 할례’는 유대인들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다!” 이런 표시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런 식으로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던 ‘old circumcision’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you came to Christ, you were "circumcised," but not by a physical procedure. Christ performed a spiritual circumcision- the cutting away of your sinful nature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식의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잘라내시는 영적인 할례를 행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씀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다 보니까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4-15절 말씀을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진 기록 (증서)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기록 (증서) 속에 우리가 율법을 어기고 따르지 않은 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기록 (중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아 깨끗이 없애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권과 능력을 꺾으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심으로, 십자가를 통한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You were dead because of your sins and because your sinful nature was not yet cut away. Then God made you alive with Christ, for he forgave all our sins. He canceled the record of the charges against us and took it away by nailing it to the cross. In this way, he disarmed the spiritual rulers and authorities. He shamed them publicly by his victory over them on the cross.”

약 20년 전에 유건호하는 청년부 학생이 있었습니다. MIT에서 박사 과정에 있던 학생이었는데요. 나름 성경공부의 배경이 탄탄한 학생이었습니다. 한번은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유건호하는 학생이 지금 읽은 골로새서 2:14-15 말씀을 자기가 배운대로, 자기가 이해한대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이 말씀을 그 청년에게 배웠습니다. 그 학생이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라는 장애물 (barrier)이 없어지고, 이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intimate fellowship)’를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내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랬더하면,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