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4

옥합을 깨뜨린 여자 A Broken Alabaster Jar

마가복음 14:1-9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이 여자가 누구냐 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이 여자의 아름다운 헌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1-2절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음모와 흉계 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 시키신 역사적인 날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을 말합니다. 이 때 누룩 (leaven)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반죽에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면 곧 딱딱하게 굳어서 먹기도 힘들고 맛도 없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면서 과거 조상들의 고난의 삶을 기억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라는 말씀이 상황의 급박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긴박하게 모임을 갖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이 일에 가담했고, 율법학자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 (blasphemy)를 범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도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도 있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만 아니었으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을 체포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다가 혹시라도 유월절 축제에 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戰慄, thrill)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유월절을 결정적인 타이밍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모든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때를 맞춰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이번 유월절을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사람들은 혹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이번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실까요?’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려고 누구든지 예수를 보거든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1:56-57) 과연, 누구의 계획대로 될까요?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고린도전서 1:25) 맞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깥의 상황은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시간에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시몬은 전에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만일 시몬이 그 때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기회가 없을 뻔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드리는 일, 헌신하는 일, 섬기는 일은 절대로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 (누가복음 12:20)’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그 곳에 머물며 사업을 벌여 돈을 벌어 보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안개와 같아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14)

한창 식사가 진행 중일 때, 한 여자가 매우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labaster jar)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이구, 왜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는 거지?” 하면서 향유를 아까워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몇 몇 사람들이 화를 냈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먼저 이의를 제기했고, 다른 제자들도 유다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유다의 계산에 의하면,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적어도 30,000 불 정도 되는 큰 금액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가복음 말씀에서는 이 여자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가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식사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면서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이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So they scolded her harshly).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향유를 부은 이 여자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식사에 초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지금 자신을 만지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at kind of woman is touching him. She's a sinner!" (누가복음 7:39) 이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이 찬송가 가사에도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나와 있지만, 이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향유의 가격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향유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아깝다고 하지 않고 슬쩍 듣기 좋게 포장을 합니다.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이렇게 낭비하지 말고 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속 마음이 들킬까 봐 포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유를 주님께 드린 여자의 신분을 문제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죄인의 신분으로 식사 자리에 갑자기 뛰어든 이 여자에 대한 불쾌감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식사에 예수님을 초대했던 시몬은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예언자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예언자였다면 이 여자가가 누군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을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런 생각 역시 예수님을 놓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씀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깨뜨린 옥합 속에 든 향유가 300데나리온이 나간다는 것을 이 여자가 모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이것입니다. “왜 이 여자는 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을까?” “향유를 부어 드린 대상인 예수님은 과연 누구냐?”

다행히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용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 증거로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였다." (누가복음 7:47)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왜 그 여자가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즉석에서 이 여자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50)”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질문에 질문을 낳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경에 이해가 안 가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 바디매오는 어떻게 알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불렀을까요? 갈릴리의 어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즉시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문제를 속 시원하기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만이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식사 자리에 와 계시다는 얘기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옥합을 집어 들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옥합은 결혼을 앞 둔 여자들이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아 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에게 옥합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가면서 고이 모아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이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여자는 옥합보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삶을 청산할 수만 있다면, 옥합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옥합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이런 결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옥합이 무엇입니까?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그 옥합을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깨뜨릴 것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깨뜨릴 것입니까? 질문을 바꿔 볼까요?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깨뜨렸습니까? 주님은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많이 용서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적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주님은 이 여자를 편들어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6-8절) 유대의 장례 풍속 중에 죽은 사람의 몸에 향유를 발라주는 절차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가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향유 (mixture of myrrh and aloes)’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9).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

예수님은 “이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내 머리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은 나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행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도, 예수님 주변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일이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도 그렇습니다. 더운 날,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찬물 한 잔을 대접한 일, 외로운 사람을 방문한 일,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 일, 주님은 이런 일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 하시면서 “이런 일들이 곧 나에게 한 일이었다 (마태복음 25:40)”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9절) 예수님께서 최고의 찬사를 이 여자에게 보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칭찬과 찬사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은 주님을 위해 나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2/5/2017 | 청지기주일/임명예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 Stewards of the Mysteries of God

고린도전서 4:1-4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4:1-4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 눈에 들어 오는 다섯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를 말할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이고요. 넷째는, ‘관리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충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다섯 개의 키워드와 함께 오늘 말씀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배경을 모르면 오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 입니다. 그가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고린도라는 곳은 지금의 그리스 영토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입니다. 예전에는 도시가 해안을 끼고 발달했습니다. 바다를 끼고 있어야 교통이 편하고, 무역이 편하기 때문에 고대에 발달한 도시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바다를 낀 해안 도시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했는데요. 고린도는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렸던 곳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하나님의 선교의 전략도시로 꼽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린도 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 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이 있다.” (사도행전 18:10) 그래서 바울 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린도교회가 잘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 고린도교회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고린도교회 안에 파벌이 생겼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바울을 따르는 바울파, 아볼로를 따르는 아볼로파, 게바 (베드로)를 따라는 게바파,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파, 이렇게 네 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

그 중에 가장 강력한 파가 아볼로 파였습니다. 아볼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았고, 성경에 능통했습니다.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18:24-25에 나오는데요.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아볼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A Jew named Apollos, an eloquent speaker who knew the Scriptures well, had arrived in Ephesus from Alexandria in Egypt. He had been taught the way of the Lord, and he taught others about Jesus with an enthusiastic spirit and with accuracy (아볼로라는 말에 유창하고 성경을 잘 아는 한 유대인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에 왔습니다. 그는 주님의 도를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열정적이고,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이런 아볼로가 고린도에 와서 전도하자, 고린도교회 안에 아볼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베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최대의 라이벌이 생긴 셈입니다. 라이벌 생기면 자연히 둘 사이에 경쟁심이 생기고, 시기심이 생깁니다. 목사님들끼리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 끼리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청년부 안에서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없나요? 있을지도 몰라요. 라이벌 관계는 어디서나 생길 수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아볼로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을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하지 않았더라면, 사도행전의 기록이 달라지고, 초대교회의 역사가 달라졌을 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바울은 정말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훌륭한 인격자이고, 훌륭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바울이 아볼로와의 라이벌 의식을 어떻게 이겼는지, 그 말씀이 고린도전서 3:5-7에 나옵니다. “도대체 아볼로가 무엇 이고 바울이 무엇입니까? 나나 아볼로나 여러분을 믿도록 하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중요합니다 (After all, who is Apollos? Who is Paul? We are only God's servants through whom you believed the Good News. Each of us did the work the Lord gave us. I planted the seed in your hearts, and Apollos watered it, but it was God who made it grow. It's not important who does the planting, or who does the watering. What's important is that God makes the seed grow).”

이런 배경을 알고, 오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땅히’라는 말은 ‘ought to’ 당연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생각해야지 그 이상으로 생각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들 (servants)’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아볼로도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우리를 그 이상으로 보지 말아 주십시오.” 이런 말입니다.

오늘 임명 받는 여러분은 이런 말씀 안에서 여러분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일꾼들입니다. 여러분을 일꾼으로 부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여기 ‘일꾼’으로 번역된 희랍 어 원문은 ‘둘로스 (δοῦλος)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slave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꾼’으로, ‘둘로스’로, ‘서번트’로, ‘슬레이브 (노예)’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섬기는 일을 하면서 칭찬이나 명예나, 대가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By God's grace and mighty power, I have been given the privilege of serving him by spreading this Good News (하나님의 은혜와 무한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는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를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3:7)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서번트로 부름을 받은 것이 특권 맞습니까? 이 말씀이 우리 가슴을 울리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서번트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찬송가 282장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이 찬송가는 샬롯 엘리엇 (Char-lotte Elliot, 1789-1871)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어렸을 때 그녀는 밝고 명랑한 성격 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온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고, 식구들과는 대화도 끊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 말랑 (Henri Malan)이라는 엘리엇의 오빠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엘리엇, 누구든지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어려움을 주신 단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이긴 사람을 사용하신 단다. 지금 네 모습 그대로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거야.”

엘리엇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웬 일인지 그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 모습 이대로 나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엘리엇은 수없이 이 말을 반복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가슴에 밀려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Just as I am without one plea, But that Thy blood was shed for me, And that Thou bidd'st me come to Thee, O Lamb of God, I come! I come!” 이것이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찬송시가 되었습니다. 이 찬송시에 윌리엄 브래드베리 (William Bradbury, 1816-1868)가 곡을 붙였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도 이 찬송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서번트가 됩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쿵 저러쿵 아무 이유대지 않고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자라는 것입니다. 여기 ‘관리자’라는 말은 ‘steward’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비밀 (the mystery of God)’이라는 말은 무슨 뜻 입니까? 마치 하나님께 무슨 감추어 놓았던 비밀이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 비밀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의 말과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에게도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지요. “God did not reveal it to previous generations, but now by his Spirit he has revealed it to his holy apostles. And this is God's plan: Both Gentiles and Jews who believe the Good News share equally in the riches inherited by God's children. Both are part of the same body, and both enjoy the promise of blessings because they belong to Christ Jesus (하나님께서는 지난 세대들에게는 이것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도들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즉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속된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에베소서 3:5-6)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한다는 성경해석의 원리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1에 나오는 ‘하나님의 비밀’을 에베소서 3:5-6 말씀이 해석해 줍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내용입니다. 너무나 많이 들었던 내용이기 때문에 이젠 이런 말씀을 들어도 큰 감동이 없습니다. 설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뭔가 더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파고, 더 깊이 연구를 해도, 더 이상 나올 하나님의 비밀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서 관리하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서 관리한다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We are servants of Christ, not his masters. We are guides into God’s most sublime secrets, not security guards posted to protect them. The requirements for a good guide are reliability and accurate knowledge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지 그리스도의 주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비밀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안내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아닙니다. 훌륭한 안내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함과 그가 가지고 있는 정확한 지식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입니까? 오늘 임명 받는 사람들입니까? 다시 한번 묻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입니까? 모든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은 무엇보다 신실(信實)해야 합니다. 신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 사람에게 하나님의 비밀에 대하여 물어보면 잘 설명을 해 줄 것 같다!” 이런 믿음이 ‘reliability’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즉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설명할 때는 정확해야 합니다. 여기에 단 한 군데라도 애매한 곳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accurate knowledge’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비밀’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 faithful, sensible servant is one to whom the master can give the responsibility of managing his other household servants and feeding them. If the master returns and finds that the servant has done a good job, there will be a reward. I tell you the truth, the master will put that servant in charge of all he owns (믿음직스럽고 주인의 마음에 드는 서번트에게 주인은 자기 집안의 다른 일꾼들을 관리하고, 먹이는 책임을 준다. 만약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서번트가 맡은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에게 큰 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진실을 말한다. 그 주인은 그 서번트에게 그의 모든 소유를 맡길 것이다.).” (누가복음 12:42-44)

‘reliability (신실함)’ ‘accurate knowledge (정확한 지식)’ ‘faithfulness (성실함 혹은 충실함)’ ‘sensibility (주인의 마음을 잘 읽는 민감함)’ 이런 것들이 주님의 서번트에게 요구되는 것들입니다. 해병대 출신들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합니다. 한번 주님의 서번트가 된 사람은 영원한 주님의 서번트입니다. 서번트에게 주는 상 (reward)은 일찍 은퇴해서 놀고 먹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신실한 서번트에게 그의 모든 소유를 맡길 것이라고 하잖아요? 더 큰 책임을 맡는 것이 서번트 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눌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서번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자비한 책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뿌리지도 않고 거두어 들이겠다는 식으로 그의 서번트들을 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의 서번트들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서번트였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 의 서번트로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을 세우신 것은,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1-12) 나의 연약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감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7). 질그릇이 깨져야 그 안에 있는 보화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1/29/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5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영성 (II) The Lessons Learned from The Spirituality of Jesus

히브리서 5:6-10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두 번째 설교 시간입니다. 영어 단어에 ‘solitud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잠깐 하던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에 ‘solitude’ 영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35-38 같은 말씀이 대표적인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자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의 특징은 ‘솔리튜드’가 주는 benefit에 머물지 않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인가가 없는 사막이나 동굴을 많이 찾았습니다.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솔리튜드’가 주는 benefit를 즐기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솔리튜드 영성’을 즐깁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 순례하면서 요르단에 있는 수도원도 방문했습니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데저트 (사막)입니다. 사방에 모래와 돌들이 널려 있습니다. 석회암들이 많아서 동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주의해서 보면 그 동굴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그런 동굴에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솔리튜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솔리튜드 영성’이 주는 이점(利點)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까 읽어 드린 마가복음 1:35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fore daybreak the next morning, Jesus got up and went out to an isolated place to pray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an isolated place’로 가셨습니다.” NIV, NKJV 성경에는 ‘a solitary place’라고 나와 있고, 'a lonely place (NASB)’ ‘a deserted place (Phillips)’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소통(疏通)하기 위해서, 그런 장소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솔리튜드’는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사역의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있은 후에 난리가 났습니다.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왕 (king)으로 만들려고 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큰 문제였던 시대에,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로 만든 떡 다섯 개를 가지고 5,000명이 실컷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서 몰래 제자들도 떼 놓고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 6:15) “He departed again to the mountain by Himself alone.” (NKJV) 예수님은 산에서 혼자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방향을 확정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은, 사역의 방향을 확정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사역의 힘을 얻고,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은 영적으로 새롭게 재창조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다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 오십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마가복음 1:38)”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솔리튜드 영성’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영성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삶의 유혹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혹’은 temptation을 말합니다. 우리 말로 ‘시험’이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요,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이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12:2). 예수님께서 언제 유혹을 받으셨는지,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어떤 것이었는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혹을 이기셨는지,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유혹을 받으셨습니까? 영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입니다. 요단강에 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 (마태복음 3:17) 이 일이 있은 후에 사탄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성경 많이 읽으면, 봉사 열심히 하면 뭔가 일이 잘 되고, 뭔가 나에게 큰 힘이 생긴 것 같 같은 착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혹은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영적으로 뭔가 전과는 다른 수준에 도달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찾아 옵니다. 예수님도 그랬다니까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곧 유혹을 받는 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대처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고, 사탄에게 경배하라는 세 가지 유혹 아니었습니까? 이 세 가지 유혹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원하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사역을 하라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에게 찾아 오는 유혹도 그런 것입니다. 인생을 쉽게, 즐기면서 살라는 것 아닙니까? 너 혼자 바르게 살겠다고 요란을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 혼자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칙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넓은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좁은 길로 가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8:3)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6:16)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6:13) 여러분, 이 말씀 읽으면서 무슨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까? 성경을 조금만 주의해서 읽는 사람이라면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에 대처했던 말씀이 모두 신명이 6장, 신명기 8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쉐마 (Shema)’라고 말하는 말씀입니다. ‘쉐마’라는 말은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그러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런 뜻입니다. 신명기 6:5에 ‘쉐마 이스라엘’이란 말이 나옵니다. 신명기 6장, 7장, 8장은 이스라엘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교육의 핵심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 내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렸을 때부터 쉐마 교육을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외에 이 세상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통해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인 순간에 유혹을 이기는 힘이 되었습니다. 시편 107: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He sent His word and healed them, And delivered them from their destructions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파멸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해서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혹을 이길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집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제시하는 가치관이 나의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후서 3:15-17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그대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성경은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혹을 받는 것은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유혹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는 영성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8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예수님은 그가 받으신 고난의 일들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가장 빛나는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6절) “While Jesus was here on earth, he offered prayers and pleadings.”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저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 (while Jesus was here on earth)’ 이 말씀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In the days of His flesh (NASB, 그가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 이렇게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오늘 우리와 똑 같은 삶을 사셨을 때’ 이런 뜻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이 어떻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니까 ‘기도’ ‘도움’ ‘죽음’ ‘부르짖으며’ ‘눈물’ ‘응답’ ‘고난’ 이런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실존(實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문제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입니다. 아무도 이런 문제들로부터 면제된 사람이 없습니다. 이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결단하고,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럴 때 잘 아프지요? 목이 뻣뻣하는 증상도 많이 나타나고요. 소화도 잘 안 되고 그러지요? 잠은 많이 오고요. 예수님도 우리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랬을까요?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8) 예수님도 우리처럼 마음이 괴롭고, 제자들의 support가 필요했습니다. 힘들 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면 힘이 되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우리처럼 예수님께도 힘든 일이 많았을까요? 많았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예수님에게 적대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모두 예수님께 감정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 사회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부담이 많이 되셨겠습니까? 어디를 가든지 이런 사람들로부터 감시를 받고, 질시도 받고, 모함도 받고, 오해도 받았습니다.

이런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7절)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나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다” 이렇게 믿고 기도하셨습니다. 8절에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다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고난, suffering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로 기도하신 것은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다시 8절 말씀을 읽어 보세요.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배웠습니다).”

어떻습니까?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장 빛나는 영성이고,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영성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는 유치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배고프면 배부르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어려움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고, 아프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고난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성을 배운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성이 주님의 영성의 수준까지 올라 오기를 원하십니다. 


1/22/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4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영성 (I) The Lessons Learned from The Spirituality of Jesus

요한복음 4:30-34, 6:38-40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상생활은 매우 분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5-6시경)에 갈릴리 바닷가로 가심, 거기서 그물을 깁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을 제자로 삼음, 오전 10시 경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으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치심.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를 고치심. 오후 2시경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치심.  오후 5시경 병 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 온 동네가 예수님께 나온 것 같았음.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심. (예수님은 그날 저녁 11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드심) 새벽 4시경 자리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심. 아침 6시경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가심.

예수님의 이런 일과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30-33살)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바쁜 일과를 모두 소화하셨을까?” “이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주어졌을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영성 (spirituality)은 어떤 영성이었을까?” 이런 흥미 있는 질문들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는 예수님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요즘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영성’이란 말은 예수님의 ‘영적인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pirituality’라고 합니다. 이 말은 ‘spiritual’이라는 말에 ‘-ity’라는 접미사가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spirituality’라고 하면, 그 사람의 영적인 성품의 수준, 영적인 성품의 질이라고 할까요?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생각, 삶 전체에 미치는 영적인 성품의 정도를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의 영성이 그 정도인 것을 알겠다!” “이 사람이 이렇게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영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영성’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지배할 때, 그 사람의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영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example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영성을 계발하셨구나!” “예수님의 영성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이런 것이구나!” “예수님의 영성을 이렇게 내 삶에 적용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영성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성’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영성’은 예수님의 가정을 통해서 성장했고, 꽃을 피웠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가정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남자 아이를 낳으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그 아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요셉은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2:24).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린양을 드렸을 텐데, 요셉은 가난했기 때문에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비록 요셉과 마리아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지만, 이 부부는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가문에 속한 ‘의로운 사람 (a righteous man, 마태복음 1:19)’이었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a man of integr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레위 가문의 품행이 바르고, 매우 순종적인 여자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전형적인 유대인 가정으로, 유대교의 율법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때는 마침 유월절이라는 큰 명절이었습니다. 성경에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에도 유월절 관습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2:41-42)”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유대교의 관습을 충실하게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살 때라고 한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아마도 ‘바 미쯔바 (Bar mitzvah)’라는 일종의 성인식을 받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바 미쯔바’는 보통 13살에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2살에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토라 (Torah)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면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고 있는 ‘innate spirituality (본래부터 타고난 영성)’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성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통해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무엘의 ‘영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기도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온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디모데의 ‘영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물론 그의 멘토였던 바울을 만나면서부터 ‘영성’이 급성장한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을 잘 읽어 보면 디모데에게도 ‘innate spirituality’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의 타고난 ‘영성’은 경건한 어머니 유니게 (Eunice)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5).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공부 잘 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인가요?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자라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있습니까? 크리스천 부모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영성’이 뛰어난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가정이 신앙적으로 바른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성경 해석은 틀에 박힌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한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창의적인 해석 (creative interpretation)’이라고 할까요?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특별했습니다. “이것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이다.” (마가복음 1:27)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32, 마태복음 7:29)

예수님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안식일 법’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규정에 얽매여 철저하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최고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2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지동설(heliocentrism)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 (Copernican Revolution)'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율법에 대한 이런 해석이 가능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어떻게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었던 것은,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다는 성경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안식일이라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6:9). 이것이 예수님의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하고 생각해 질문하는 것이 그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씀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영성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 말씀에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4:30-34)”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 (the will of God)’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Mission Impossible (불가능한 사명)’이었습니다.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말씀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8절) 그러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길래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요한복음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 보면 그 ‘하나님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생을 얻는 것 (요한복음 6:40)”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영성’ ‘spirituality’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흘러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그것이 느껴집니다. 반대로, ‘영성’이 얕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한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해석 능력이 탁월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판에 박히지 않고, 틀에 얽매이지 말씀을 전하셨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기도생활을 통해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交際, fellowship)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에 전념하셨던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기도만 한다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성’은 어떤 것입니까? 그 사람들의 ‘영성’이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삶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는 그의 ‘영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nourishment comes from doing the will of God, who sent me, and from finishing his work.”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my nourishment’라고 했으니까요. ‘nourishment’는 음식도 될 수 있고, 나에게 힘을 공급(供給)해 주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생명을 유지 시켜 주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 뜻을 완수하는 것이 나에게는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공급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영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런 ‘영성’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사야 58:6-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바라는 금식은 너희가 부당하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 주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며, 억눌림 당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고,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이다. 너희 음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을 너희 집에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에게 너희 옷을 주고, 기꺼이 너희 친척을 돕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금식(禁食, fasting)은 ‘영성’을 드러내는 전통적인 한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영성’은 단순히 밥을 먹지 않는 극기훈련이 아닙니다. 금식을 통해서 길러진 ‘영성’은 세상으로,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The Word became human and made his home among us (요한복음 1:14)”라고 고백했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몸 속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spirituality of incarnation (인카네이션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기도로 끝나지 않고, 설교로 끝나지 않고, 금식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읽기 역시 ‘영성’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성경읽기를 통해서 길러진 ‘영성’은 밖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이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영성’입니다.


1/15/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3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It Is Not What We Learned About Jesus.

에베소서 4:17-24

오늘은 “새해에는 이렇게 산다” 설교 시리즈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제일 눈에 들어 오는 말씀은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It is no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Jesus).”

예수님에 관해 배운 것 하고 행동하는 것 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배웠으면 당연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마태복음 7:2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s, just as you can identify a tree by its fruit, so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actions.” “맞습니다. 그 나무가 맺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뜻이지요?

열심히 성경공부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배웁니다. 그런데, 왜 배운 대로 ‘생각하고’ 배운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삶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습니까? 왜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마치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과 행동이 다른 이 심각한 문제가 어제 오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도 있었던 문제가 지금도 똑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보 겉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Be who God wants you to be, not what others want to see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라. 결코 사람들이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라).”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선자 (hypocrites)’라고 하셨습니다. 속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척하는 것입니다. 원래 ‘히포크리트’라는 말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참 재미 있습니다.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나 탤런트들이 드라마를 찍는 중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와 현실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야, 저 사람 멋지다!” “와, 저렇게 마음이 예쁘구나!” 이렇게 드라마 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드라마에 나왔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을 알고 상대방에게 실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지 모의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14)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 헤롯 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3:6)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형편 없다는 문제였고, 나중에 제기한 문제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굉장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나, 나중에 제기했던 문제가 문제의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해 배운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배운 살지 않으면서 교회 생활을 계속하다가 보면 위선자들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17절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은 그 ‘생각’과 ‘행동’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 (the life God gives)’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8절). 다른 성경에는 ‘the life of God (NIV)’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간단하고 분명하게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말씀을 읽고 받아 들이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But to all who believed him and accepted him,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요한복음 1:12)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이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핵심을 붙잡지 않고 다른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붙잡고 있습니까?

영어 단어에 ‘religio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종교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핵심을 붙잡지 않고 다른 것들을 붙잡으면 ‘종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겉모습이나 형식을 좇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ey will act religious, but they will reject the power that could make them godly (그들은 종교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들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을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디모데후서 3:5)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장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renew’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Throw off your old sinful nature and your former way of life (22절)”이라고 나와 있네요. 또, “Put on your new nature, created to be like God (24절)”이라고 나와 있네요. 그리고,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23절)”라고 나와 있네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위선자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 대하여 배운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으면 됩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목사의 아이들이라도 애들과 놀다가 싸울 수도 있는데, 교회의 어른들이 “넌 목사의 아들이, 그러면 되니?” “넌 목사의 딸이 그러면 되니?” 하고 야단을 칩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말들을 들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회 전도사님 딸이 저와 같은 반이었습니다. 이 아이 집 가출했습니다. 가출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 Re-NEW에서, 주일학교를 인도하는 전도사님이 “너희들 중에 아빠가 목사인 아이들 있으면 나와라’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몇 몇 아이들이 나왔답니다. 전도사님이 아이들을 붙잡고 “나도 목사 아들이야!” 하면서 같이 펑펑 울었답니다. 한 목사님이 우연히 아이들 ReNEW에 갔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목사님 아들이 달려 와서 자기가 상처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막 울더랍니다. 난감해진 목사님이 이 아이를 강사실에 데리고 와서 컵라면을 하나 먹이면서 “봐라, 네가 목사의 아들이니까 이런 방에도 들어 올 수 있고, 컵라면도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랬더니, 이 아이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습니다.

목사의 아들이 갖는 베네핏은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아이들 수준에서는 컵라면 하나 먹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무 베네핏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야단 맞고 상처만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베네핏이 얼마나 큰 지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엄청 나서 일일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권세’라는 말이 ‘privilege’이 잖아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하게 누리는 권리’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mortal man’이라고 하잖아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보다 더 큰 특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살아야 합니까 (19절)? 욕망에 빠져 타락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22절)? 예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합니까 (22절)? 아니면, 그 생각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까 (17절)?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생각과 행동 (thoughts and attitudes)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23-24절)” 라고 권면했습니다.

헨리 나누엔 (Henri Nouwen, 1932- 1996)이 1977년에 『The Living Reminder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 ‘Service and Prayer in Memory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출판한 봉사와 기도)’ 라는 부제 (subtitle)를 붙였습니다. 이 책은 사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입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한다면, 첫째로, 사역자들은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질병들도 고쳐 주시고, 마음의 상처들도 고쳐 주셨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상처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9). 십 팔 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던 한 불행한 여자를 향하여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16).

이렇게, 모든 사역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교회 일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역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낫게 해 주는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역자들은 ‘Sustain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같이 사람들을 세워주고, 사람들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 금방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해 왔다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누가복음 22:3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그를 세워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역자들은 ‘Guid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말씀해 주시고, 천국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심으로,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그 길을 인도해 줘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의 목적을 세우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생의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Guiding Reminder’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모두 ‘The Living Reminder of Jesu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말은 단순히 사역자들을 위한 말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living reminder’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로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마태복음 19:26) 이 모든 일의 첫 걸음은, 내가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크리스천의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