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25/2018 | 사순절 새벽기도 3
주님께 귀한 것 드려 Offer A Precious Gift to The Lord
로마서 11:15-18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넌 크리스천의 삶과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성경에 보면 우리 크리스천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데살로니카전서 4:7),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2)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레위기 19:2, 베드로전서 1:1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로마서 12:2)”라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가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다른 무엇보다 먼저 구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넌 크리스천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5)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삶이 거룩해 집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Sovereign Lord has given me his words of wisdom, so that I know how to comfort the weary. Morning by morning he wakens me and opens my understanding to his will.”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지친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지 지혜의 말씀을 주셨다. 주께서 아침마다 나를 깨우시고 나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개역성경에는 ‘understanding’이 ‘명철(明哲)’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뜻입니다.
조금 신학적인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성서 학자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바빌로니아 포로시대라고 합니다. 그 때 포로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이 가장 절망했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을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절망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이사야’라는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서 학자들은 그 때 하나님께서 사용한 사람은 이사야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제 2 이사야’ 혹은 ‘제 3 이사야’라는 말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야는 기원전 약 6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였거든요. 유대 민족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간 것은 이사야가 죽은 지 약 100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침마다 말씀의 지혜를 주셨고, 그는 절망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위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아침마다 (morning by morning)’라는 말씀입니다. 아침 혹은 새벽은 조용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에 좋고, 하나님과 소통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헤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사물을 잘 이해할 수 있는 ‘understanding’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딱 필요한 것들이 바로 ‘wisdom (knowledge) and understanding’ 이 두가지 아닙니까?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때와 장소가 기도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기도 역시 사방이 고요한 새벽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새벽에 하나님 말씀 듣고, 새벽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새벽 시간을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마가복음에 1장에 나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35절)
시편 저자들 (psalmists)이 일제히 ‘아침’ 혹은 ‘새벽’을 주목하는 이유는 아침이 말씀을 묵상하는 데 좋고, 하나님과 기도하기에 좋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오직 주께 기도 드립니다. 아침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시는 줄 압니다.” (시편 88:13) 아침에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말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효과적으로 잘 된다는 뜻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변함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며 즐겁게 노래하겠습니다 (Satisfy us each morning with your unfailing love, so we may sing for joy to the end of our lives).” (시편 90:14) 무슨 말씀인가요? 아침 시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 (unfailing love)’을 느끼고,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30: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합니다. 밤새 울었더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his anger lasts only a moment, but his favor lasts a lifetime! Weeping may last through the night, but joy comes in the morning.”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외에 어디서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밤새 울고, 잠을 못 잤습니다. 하지만 (but)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새벽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새 날과 함께 기쁨을 주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새벽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는 시간입니다. 새벽에 주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새벽에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벽의 유익 (profits)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길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녁 늦게 오랫동안 하는 일보다 이른 아침에 잠깐 하는 일이 더 성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아침이 저녁보다 집중력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침 (새벽)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제 경우를 말한다면, 새벽 기도 시간은 저에게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입니다. 다른 아무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궁금한 말씀들, 난해한 말씀들을 묵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제가 새벽 기도 시간을 통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동안 ‘아침형 인간 (morning person)’이니, ‘저녁형 인간 (evening person)’ 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Google에 들어가서 ‘아침 형 인간’, 혹은 ‘새벽 형 인간’을 찾아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론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고요. 또 어떻게 하면 새벽 형 인간으로 내 삶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지 수많은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밤이 즐거워도 아침과 맞바꾸지 말라.” “저녁에 할 일과 아침에 할 일이 다르다.” “수면시간은 오후 11시부터 오전 5시까지를 원칙으로 하라.”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제 공격은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아침의 1시간은 낮의 3시간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도 아침 형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런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1:15-18 말씀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새벽기도의 유익함을 말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인가?”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땅 속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나무에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뿌리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생각했고, 그 나무의 가지는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가고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뿌리로부터 수액(樹液, sap)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는 ‘접붙임의 원리 (The Principle of grafting)’에 주목했습니다. 바울이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처음 떼 내어 드린 반죽의 일부분이 거룩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고,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로마서 11:16),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뿌리로부터 수액을 공급 받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시나요? 어떤 사람이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얼마를 떼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반죽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조상들이 거룩하니까 그 조상들에게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는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삶의 곳곳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벽 시간은 하루의 첫 시간입니다. 이 첫 시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시간이 모두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 떠서 다른 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자신의 삶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떼어 드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첫 시간, 첫 수확, 첫 아들, 이렇게 ‘첫’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처음 난 것은 ‘firstfruits (첫 열매)’라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의 ‘첫 시간’이 언제 입니까? 잠에서 일어난 새벽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을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시려고, 이 시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unfailing love’를 경험하게 하시려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시간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귀한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그 때가 ‘청년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때’는 여러분의 ‘라이프 스팬 (life span)’에서 가장 귀한 가운데 토막입니다. 이 귀한 때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반죽을 만들어서 제일 먼저 한 부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한 반죽이 되는 것처럼,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사람의 전체 삶이 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솔로몬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한 말입니다. 솔로몬이 왜 ‘청년의 때’를 강조해서 말했을까요? 이 귀한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사람 인생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 되기 때문에 ‘청년의 때’를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십시오. 시간도 하루의 첫 시간을 구별해서 주님께 드리고, 여러분의 삶에서도 가장 귀한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2/24/2018 | 사순절 10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Jesus' Name
요한복음 14:11-14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3-14절)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이 좀 필요한 말씀입니다. 단순히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면, 너희가 기도한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13절에 나오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so that the Son can bring glory to the Father)’ 하는 말씀과 ‘내 이름으로 (in my name)’ 이 두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봤더니 요즘에 ‘라벨갈이’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값싼 중국산이나 동남아시아 옷에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을 바꿔다는 것입니다. 라벨만 바꾸면 단돈 200원, 300원 하는 값싼 중국 옷이 ‘메이드 인 코리아’ 옷으로 둔갑해서 무려 5배로 값이 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사기입니다. 아무리 라벨을 바꿔달아도 그 옷은 한국에서 만든 옷이 아니라 중국에서 만든 값싼 옷입니다.
이제 세금 보고를 해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세금 보고 할 때, 잘못하면 IRS에 불려 가기도 하고, 편지를 받기도 합니다. 저도 몇 년 전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자기 혼자 세금보고를 하다 보니,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는 단순히 계산 착오라고 생각하는지 IRS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간단한 세금 보고를 제외하고 좀 복잡하다 싶은 것은 CPA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런 경우 CPA가 대신 보고한다는 이름과 싸인이 들어갑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틀릴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IRS에서도 믿고 서류처리를 빨리 해 줍니다.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Jesus’ name)’라는 라벨이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옷에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이 붙으면 그 라벨이 한국에서 그 옷을 만들었다는 증명을 합니다. 또 세금 보고서에 CPA의 이름이 들어가면, 그 세금 보고서는 실제로는 나의 수입에 대한 보고서이지만,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IRS에서 그 문제를 CPA와 의논합니다. 세금 보고서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May the Department of Revenue discuss this return with the preparer shown here (팔요하다면 국세청에서 당신의 세금보고를 대신 해준 사람과 의논해도 되겠습니까)?”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 이라는 라벨을 붙이면, 그것은 “이 기도는 내가 기도한 기도이지만 기도의 내용은 이미 예수님과 모두 의논하고 예수님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런 뜻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도, 능력 있는 기도생활을 하려면, 여러분의 기도 내용을 철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인지, 철저하게 기도의 내용을 점검해야 합니다. “예, 이미 점검을 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붙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두 번이나 “다 이루어 주겠다 (13, 14절)”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기도를 점검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기도를 점검하신다면, 제일 먼저 기도의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 아닌 것을 모두 삭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God-centered prayer’입니다.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려면 무엇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 책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성경이 교과서 (textbook) 입니다.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은 교수가 지정해 준 교과서 안 읽고 수업만 들어가는 학생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이기적인 기도, 자기 중심적인 기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싫어하시니까 당연히 그런 기도가 들어 있으면 삭제하시겠지요?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자기 희생이나 포기가 없는 기도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희생이나 포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23)
이상의 세가지 점검이 끝났다면, 우리의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힘으로 걸을 수가 없는 장애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자기들에게 구걸하는 이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3:6) 이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보시다시피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들의 말과 행동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구나!” 그렇지 않고 마치 자기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말과 행동에 ‘자기들의 이름’이라는 라벨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속임수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라는 라벨만 붙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긍휼이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그 사람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 주님이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이 사람을 고쳐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에게 병고침을 선포하겠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말과 행동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통해서 수많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던 것처럼 많은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을 붙이십시오. 기도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라벨만 붙이는 기도를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기도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3-14절)
2/23/2018 | 사순절 9
하나님을 추구함 Pursuing God
마태복음 7:7-11
오늘 말씀은 아마도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구절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도 이 말씀이 유명하니까요. 오늘 말씀에 ‘기도’라는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금방 알아챕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7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기도해야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받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그리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이 기도에 대한 어떤 영감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항상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며칠 전에 했던 똑 같은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는데, 그리고 그것들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시고, 소통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과 관계를 설정하고 싶어하십니다. 얼마나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시면, 우리 생명을 창조하실 때 우리 속에 ‘영원 (eternity)’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놓으셨다 (전도서 3:11)”고 하셨겠습니까?
솔로몬이 그의 생애 말년에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온갖 부귀와 영화를 다 가졌지만,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생각한 끝에 발견했습니다. 이 공허함의 정체는 하나님과 단절될 소통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의 풍성하심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9-11절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너희 중에서 누가 돌을 주겠느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누가 뱀을 주겠느냐? 비록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에게는 ‘아들 (9절)’이라는 말과 ‘좋은 것 (11절)’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좋은 것’이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what is good’ ‘good thing’ ‘good gifts’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이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나쁜 일을 하는 아빠도 있습니다. 그런 아빠도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어느 아버지가 돌을 주는 아버지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잘 몰라서 돌을 달라고 해도 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의 자녀들이 잘 몰라서 뱀을 달라고 해도 생선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맞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종 예레미야에게 똑 같은 말씀을 주시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려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y are plans for good and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future and a hope. In those days when you pray, I will listen. If you look for me wholeheartedly, you will find me. I will be found by you).”(예레미야 29:11-14)
예레미야가 살았던 시대는 국가의 운명이 암울한 때였습니다. 그는 끝내 조국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In those days when you pray, I will listen (그 때는 너희가 기도할 때 내가 들을 것이다)”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지금 유다 왕국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잠깐 그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겠지만, 결국에는 그의 백성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너희가 다시 나를 찾을 것이고, 나를 찾는 사람은 모두 내가 만나 주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더 말하지 않아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알아 듣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알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열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으면 정말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함 (The Pursuit of God)’이란 책인데, A. W. Tozer (1897-1963, 미국)가 쓴 책입니다. 기독교 고전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 (desire)이 있다. 그러나, 우리만 이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갈망은 하나님을 어떤 것보다 더 높이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려는 갈망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세상의 어떤 보화보다 더 소중 하게 여기신 다.”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라. 당신의 마음이 갈망하는 만큼 높이 날아 올라가라 (Refuse to be average. Let your heart soar as high as it will.”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하는 데드라인이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영혼은 평안해 지고, 우리의 신경은 긴장을 풀게 된다.” 모두 Tozer가 쓴 책에 나오는 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좋은 일은 하나님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복되고, 이것처럼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특별하게 합니다.
A. W. Tozer는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을 찾고자 하시는 갈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나의 계획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을 열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십시오. 구하는 사람은 받게 되고,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A. W. Tozer가 말한대로 결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되는 ‘평범한 사람들 (average people)’이 되지 마십시오.
2/22/2018 | 사순절 8
기도는 배워야 한다 Learning To Pray
요한복음 17:1-26
오늘 요한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 세가지 직책이 있다고 합니다. 왕으로서의 직책, 예언자로서의 직책,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직책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는 전 인류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한반 다시 들어 보십시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겠지만, 이 사람들은 계속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저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11, 20-21절)
“예수님의 기도가 참 크다, 예수님께서 큰 뜻을 품고 기도하셔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서 우리의 기도는 자기 문제 해결에 급급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기도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기 마련힙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생활이 쌓여지고, 우리의 기도가 성숙해지면, 자연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중보기도에 눈을 뜨게 되고, 온 세상을 품고 기도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몇 주 전에 설교 시간에 소개했던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Uchimura Kanzō, 1861-1930) 목사님 자꾸 생각납니다.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매사추세츠 애머스트에 있는 Amhurst College 재학 중에 그는 이런 마음을 품고 기도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의 비석에 이 글이 새겨 있다고 합니다. 큰 나무에 새가 깃들듯이,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재들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함석헌 선생, 김교신 선생 등 한국교계에 영향을 끼친 큰 인물들이 나왔습니다. 특이하게도 우치무라 간조 목사님은 조선의 청년들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조국와 세계를 섬길 큰 인물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인물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를 해 봤자 결국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성공의 도구로 쓸 사람이 아니라, 조국과 세계를 섬길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여러분 중에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뜻을 품고 공부하고 큰 뜻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전체가 대화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말씀 전체가 예수님과 하나님이 간에 나눈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 드립니다만, 기도에 눈을 뜨고, 성숙한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화식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런 기도입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 누가 옆에서 이 기도를 들었더라면, 마치 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 계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친구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친한 친구 만나서 얘기하는데 무슨 격식이 필요한가요? 약속 장소로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마음에 부담이 가나요? 그렇게 부담이 간다면 정말 친한 친구는 아닙니다. 친한 친구는 만나도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담 없이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걱정, 나의 고민, 나의 관심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긴장해서 억양이 높아지고, 경직될 필요 없습니다. 멋있는 말을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미리 사전에 각본을 짤 필요도 없습니다.
아시지요? 성경에 모세를 칭찬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만,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a man speaks with his friend (하나님께서는 친구에게 말씀하시듯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1) 분명히 모세도 하나님을 그렇게 친근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친근하게 친구처럼 그렇게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데이빗 리빙스톤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교사이며 동시에 탐험가였습니다. 아프리카가 이 사람에게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가 죽은 것이 알려졌을 때 아프리카가 그를 위해서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침대 모퉁이에 기도하는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앞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의자에 마치 누가 앉아 있었던 것처럼, 리빙스톤은 의자에 앉아 있는 분에게 뭔가 얘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남김 없이 다 완수했다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자기 제자들을 지켜 달라는 내용입니다. 특히 자기 제자들에게 고난이 닥칠텐데, 고난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시고, 세상의 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의 제자들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분열되는 것은, 우리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분열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말 우리가,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 그런지 2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것은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2/21/2018 | 사순절 7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 Christ-centered Prayer
역대하 20:1-12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날은 “기도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가?”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제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를 하라” 이런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Christ-centered prayer’입니다. 혹은 ‘God-centered prayer’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드러나 있느냐,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크게 드러나 있느냐에 따라서 ‘God-centered prayer’가 되기도 하고 ‘Problem-centered prayer (문제 중심의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도에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이 크게 드러나 있고 문제는 작게 드러나 있으면 ‘Christ-centered, or God-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에 우리의 문제가 크게 드러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 있지 않으면 그 기도는 ‘problem-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힘써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도는 아니지만 ‘God-centered pray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의심의 여지 없이 ‘God-centered prayer’입니다. 연습 삼아 하나만 더 해 볼까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바울의 이 고백은 분명한 ‘Christ-centered prayer’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problem-centered prayer’가 아니라 ‘Christ or God cen-tered prayer’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금방 알아 듣습니다. “기도라고 해서 다 같은 기도가 아니구나! 앞으로 기도할 때 ‘God-centered or Christ-centered prayer’를 해야 하겠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Christ-centered or God-centered prayer’가 무엇인지 알아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역대하 20:1-12 말씀에 나오는 사람은 유대의 왕이었던 여호사밧이라는 사람입니다. 여호사밧은 35살에 왕이 되어 25 년 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열왕기상 22:42) 이 사람은 유대의 왕 중에 몇 안 되는 훌륭한 왕으로 평가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여호사밧에 대하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올바른 일을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에 그 조상 다윗처럼 살았습니다.” (역대하 17:3, 열왕기상 22:43) 여호사밧과 동시대 사람으로 북왕국의 아합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마온 사람과 함께 연합군을 편성해서 여호사밧에게 전쟁을 걸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사밧이 전쟁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연합군은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의 긴박했던 순간이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큰 군대가 사해 건너편에서 지금 왕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써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와 있습니다.” (2절) 이 소식을 들은 여호사밧은 두려웠습니다. 사람이 두려울 때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의 경우에는 위기의 순간에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칠 때 그 집이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 아니면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 하는 것이 드러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25, 27)
여호사밧은 어떤 행동을 보였습니까? “Jehoshaphat was terrified by this news and begged the LORD for guidance. He also ordered everyone in Judah to begin fasting. So people from all the towns of Judah came to Jerusalem to seek the LORD's help.” 야, 멋있지요? 여호사밧이 보인 이 행동이 저와 여러분이 보여야 할 행동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도 여호사밧처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하고, 위기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잖아요? 이럴 때 저와 여러분이 보여야 할 행동이 ‘God-centered action (하나님 중심의 행동)’입니다.
백성들을 모아 놓고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여호와께서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세계 모든 민족의 나라들을 다스리십니다. 주께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도 주 앞에 설 수 없습니다 (O LORD, God of our ancestors, you alone are the God who is in heaven. You are ruler of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You are powerful and mighty; no one can stand against you)!” 우리가 이 여호사밧의 기도를 이 새벽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여호사밧의 기도를 들으니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 적들이 연합군을 만들어서 쳐들어 오고 있는데, 지금 가슴이 뛰고, 숨이 차 오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지금 여호사밧의 기도를 듣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 누구도 감히 설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연합군이 쳐들어 오고 있지만, 그 연합군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God-centered prayer’입니다. 이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연합군의 침략이 아니잖아요?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입니다. “하나님,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연합군이 쳐 들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가까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린 다 죽습니다.” 이런 기도가 ‘problem-centered prayer’입니다. 두 기도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이고, 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기도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드 기도가 엄청나게 다른 기도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저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십시오.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이 큰 군대를 당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십시오. “O our God, won't you stop them? We are powerless against this mighty army that is about to attack us. We do not know what to do, but we are looking to you for help."
이 여호사밧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 군대가 아무리 크다 해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이 전쟁은 너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 너희는 이 전쟁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그저 너희의 장소에서 굳게 서 있기만 하여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역대하 20:15-17)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기도의 내용을 한번 바꿔 보세요. 기도할 때 기도의 초점을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문제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보세요. ‘problem-centered prayer’에서 ‘God-centered, or Christ-centered prayer’로 기도의 초점을 바꿔 보세요. 기도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