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021 | 어버이주일/졸업예배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 Those Who Devote Themselves To The Truth

요한복음 17:13-19

오늘은 어버이주일과 졸업예배를 함께 드리는 날입니다. 올해 우리교회 졸업생은 모두 28명입니다. 박사 5명, 석사 6명, 학사 16명, 고등학교 졸업이 1명입니다. 예전에는 졸업생들에게 ‘형설(螢雪)의 공(功)’을 쌓았다고 칭찬했습니다. ‘형’은 반딧불이라는 뜻이고, ‘설’은 눈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반딧불이’를 잡아서 얇은 손수건이나 천에 싸서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으로 책을 읽고, 겨울에 눈이 온 날에는 방문을 열고 희미한 눈빛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칭찬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올해 졸업하신 분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부모를 떠나고 집을 떠나 이곳 보스턴에서 때로는 어렵고, 힘들고, 외로웠을 텐데, 이 어려움을 잘 이기고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오늘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부모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잖아요?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합니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 영국)이 쓴 ‘O Mother O’ Mine(오 나의 어머니)’이라는 시입니다. 키플링은 190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며 소설가입니다. 그가 쓴 단편 소설 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정글북’이 있습니다. 키플링은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과 기도를 찬양했습니다. “I know whose love would follow me still(나는 누구의 사랑이 나를 따라올지 압니다).” “I know whose tears would come down to me(나는 누구의 눈물이 나에게 흘러올지 압니다).” “I know whose prayers would make me whole(나는 누구의 기도가 나를 구원할 지 압니다).”

 

여러분도 그렇지만 저도 부모님의 사랑과 눈물과 기도 덕분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혼자 서재에 앉아 있을 때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제 서재에 몇 장의 부모님 사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비교적 젊으셨을 때 저와 함께 찍은 사진들입니다. 제가 한국 방문했을 때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바로 그 사진들입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한자 말인데요. 공자의 논어 중 한시외전(韓詩外傳) 9권에 나오는 말입니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라는 말입니다. 번역하면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공자가 자기 뜻을 펴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떠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어디선가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皐魚(고어)라는 사람이 그렇게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고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세가지 한(恨)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가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거기서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둘째는, 저의 경륜을 알아주는 군주를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고어의 말이 끝나자 공자는 자기 제자들에게 “이 말을 명심해 두어라. 가이 훈계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날 충격을 받은 공자의 제자 중 열 세명이 부모를 섬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모든 부모들의 한결 같은 소망은 자식들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게 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모들이 바라는 것은 자식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부모들의 소망을 ‘거룩한 소망’으로 승화(昇華)시켜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마태복음 6:33)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너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17장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누리던 기쁨을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3절). 또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15절).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7, 19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기쁨을 가지고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는 마크(표시) 중의 하나가 기쁨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데살로니카전서 5:16). 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악한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일,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 뉴스에도 관심이 있지만 한국 뉴스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 뉴스를 볼 때마다 늘 안타까운 것이 “진실한 사람이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무슨 위치에 적합한 사람을 찾지만 올바른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범죄투성이입니다.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을 막론하고 올바른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은 과거보다 개인의 비리를 찾는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정말 온전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삶을 살게 하려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쳤다고 말씀하십니다(19절). “I give myself as a holy sacrifice for them so they can be made holy by your truth.” 이 말씀이 그런 뜻 아닙니까? 예수님은 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까? 우리를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선뜻 불의한 일에 가담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1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That is why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personality’를 하나님도 가지고 계십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위해 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진리인지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매우 진실하고 깨끗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The heart is more deceitful than all else And is desperately sick; Who can understand it? I, the LORD, search the heart, I test the mind, Even to give to each man according to his ways, According to the results of his deeds.” (예레미야 17:9-10) 사람의 마음은 세상 어떤 것보다 타락해서 고칠 수 없는 중병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마음이 그렇게 타락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두 살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한대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를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청년부 성경공부에서 성경이 ‘정경화(canonization)’ 되는 역사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기록된 많은 문서들을 추려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만들게 된 과정을 ‘정경화’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경(canon)’이라는 말에는 ‘기준(standard)’ ‘근본적인 원칙(a fundamental rule)’ ‘교회의 룰(an ecclesiastical rule)’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크리스천의 삶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성경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내 생각도 아니고, 내 양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됩니다. 크리스천들의 신앙고백 가운데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또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성경은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15-17) 진리를 위해 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은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쓴 편지입니다. 바울 역시 디모데가 시대 조류에 휩싸이지 않고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기적이고, 속이는 사람들은 주변에 차고 넘칩니다. 회사에도, 비즈니스 현장에도 그런 사람들은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왜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을 했습니까? 링컨도 다른 대통령들처럼 무난하게 대통령을 마치고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노예해방을 추진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정규 교육은 받을 수 없었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배운 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성경 말씀이 그의 삶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링컨의 마음에 노예해방에 대한 신념을 심어준 책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책은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1852)’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은 외롭고 힘든 삶을 삽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Silence in the face of evil is itself evil: God will not hold us guiltless. Not to speak is to speak. Not to act is to act(악 앞에서 침묵하는 것 자체가 악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말하는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위협을 당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진실이 왜곡되는 상황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진리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닙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 곁을 지나가면서도 자기 일이 아니니까 그냥 지나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때는 말해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때 최소한 괴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잘 살기를 바라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입니다.


5/2/2021 |

부활절이 지나고(4) After Jesus’ Resurrection

누가복음 24:28-35

오늘 말씀은 유명한 ‘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에게 보이셨고, 여자들에게 보이셨고, 게바에게 보이셨고,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오 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보이셨고,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4-8).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나타내 보이셨다고 감격합니다. 아마도 이런 감격이 바울로 하여금 사도로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한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예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just as the Scriptures said)’ 혹은 ‘성경 대로’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수차례 이 말이 등장합니다. 

하바드 법대를 창립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사이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 1783- 1853, 미국, lawyer and jurist)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강력한 기독교 변증론자(Christian Apologist)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A person who rejects Christ may choose to say that I do not accept it, he may not choose to say there is not enough evidence(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결코 충분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Either the men of Galilee were men of superlative wisdom, and extensive knowledge and experience, and of deeper skill in the arts of deception than any and all others, before them or after them, or they have truly stated astonishing things which they saw and heard(갈릴리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최고의 지혜와 지식과 경험, 그리고 속임수의 전문가들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보고 들은 놀라운 것들을 정직하게 진술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물론 12제자 중에 속했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바로 며칠 전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Cleopas)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17절)’이 역력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터벅터벅 ‘엠마오’가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걸어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과 함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두 사람의 눈이 가리워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16절)”라고 썼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절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요. 하지만,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But God kept them from recognizing him(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워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보다 극적으로(dramatically)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록 해서 이 두 사람을 부활의 증인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이 그림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1832-1883)가 그린 ‘The Walk to Emmaus(엠마오로 가는 길)’라는 제목의 그림(목판화)입니다. 저 멀리 그들의 목적지인 엠마오가 보입니다. 예수님은 뭔가 열심히 말씀을 하시고,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장면입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귀스타브 도레는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도레는 15살 때 이미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책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한창 유명했을 때는,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모두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을 하나씩 집에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고흐나 피카소 같은 화가들도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를 정작 유명하게 만든 것은 241점의 삽화를 그려 넣어 만든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성경’이었습니다. 영화 ‘십계(1962)’의 제작자는 도레의 그림를 참고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도레의 판화 성경은 유명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헨리크 샌케비치 (Henryk Sienkiewicz, 1846-1916, 폴란드)가 쓴 ‘쿼바디스 (Quovadis)’라는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샌케비치는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51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다시 2001년에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어 나왔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때 당황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성경에는 없는, 외경(外經, Apocrypha) ‘베드로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로 가고 있었을까요? 이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찌 예루살렘을 떠난 제자들이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한 다른 제자들도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여자들의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과 함께 동행하시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답답하십니다. 어찌 두 분은 예언자들의 글을 믿지 않으십니까?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25-26절)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들을 들어 가면서 예수님에 관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은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해서 그린 것입니다.

이미 날이 많이 저물었습니다. 두 사람의 권유로 예수님은 인근 여관에 이들과 같이 묵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과 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ddenly,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at that moment he disappeared!” (31절)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네델란드)가 그린 ‘The Supper at Emmaus(엠마오에서의 저녁 식사)’라는 그림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늘 그렇듯이 이 그림에서도 빛과 어두움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부부가 식탁에 잔을 내려 놓고 있는 것을 보아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기 전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빵을 쥐고 빵을 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 반쪽은 빛으로, 반쪽은 그늘져 있습니다. 앞에 앉아 떡을 떼시는 분이 점점 예수님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인 것 같습니다. 왼쪽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제자는 뒷모습만 보입니다. 나머지 한 제자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식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한 경험이 두 제자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두 사람의 고향이 바로 코 앞인데, 두 사람은 그 밤으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ithin the hour they were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33절) 한 시간이 못되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얘기를 주고받습니다. “길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지 않았습니까?”(32절) 슬픔과 절망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두 사람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만져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빌 게이더(William James Gaith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본래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는데요. 작사, 작곡에 재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주님을 영접한 후에 영어 교사를 그만두고 찬양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모두 6번(1973, 1975, 1991, 1999, 2001, 2008)의 Grammy Award를 받습니다.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쓴 대표 곡 중에 우리가 많이 부르는 ‘살아 계신 주(Because He Lives)’가 있습니다. 이 곡 외에도 800여곡 이상의 찬양곡을 썼는데요. 그 중에 1964년에 쓴 ‘He Touched Me(그가 나를 만지셨네)’라는 찬양 곡이 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이 곡을 부르면서 이 곡은 대중들에게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 곡으로 1972년에 Grammy Award Artist 상을 받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한 때 교회에서 찬양대원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빌 게이더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당신의 꿈이 산산조각 났을 때, 희망이 다 사라졌을 때, 아무 데도 갈 곳 없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께 달려가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은 나의 계획보다 더 크고 위대하십니다!”

험한 나그네 세상 길 나의 맘이 곤할 때/사랑스런 주의 손길 오 나의 맘을 두드리네
주 붙드네 오 날 붙드네 넘치는 기쁨 내 맘에/근심 걱정 나 없겠네 날 언제나 붙드네
(Oh, He touched me He touched me And all the joy that floods my soul
Something happened and now I know He touched me and made me whole)

험한 나그네 세상 길 나의 맘이 곤할 때/사랑스런 주의 손길 오 나의 맘을 두드리네
주 붙드네 오 날 붙드네 넘치는 기쁨 내 맘에/근심 걱정 나 없겠네 날 언제나 붙드네

여러분,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슬픔과 절망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꿔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슬픔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절망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인생의 끝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은혜이지만, 나와 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사는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제가 ‘동행(同行)’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늘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모스 3:3에 있는 말씀인데요.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두 사람이 방향에 대한 동의가 없이 어떻게 같이 걸을 수가 있겠느냐)?”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목적과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으면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창세기 6:9)”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노아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교제’에 있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그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 어떤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인생의 끝에서 극적으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4/25/2021 |

부활절이 지나고(3) After Jesus’ Resurrection

요한복음 20:24-29

여러분, 지난 주 설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적어도 약 20년 간 ‘구전(口傳)’으로 전해졌다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구전이 아니라 여러 개의 구전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아리랑’에 대한 역사를 찾아봤습니다. “우리 민족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은 처음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출발하여 산길과 강줄기를 따라 메나리조의 노래로 형성, 확산되어 오는 과정에서 각 시대마다 기능과 성격을 달리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 전국적으로 다양하며, 중국이나 일본, 카자흐스탄 등 해외에서 만들어진 아리랑도 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성경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쓰려고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 즉 말씀의 종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존귀하신 데오빌로 각하, 저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였으므로, 이 일을 각하께 차례대로 기록하여 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미 배우신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any people have set out to write accounts about the event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 They used the eyewitness reports circulating among us from the early disciples. Having carefully investigated everything from the beginning, I also have decided to write a careful account for you, most honorable Theophilus, so you can be certain of the truth of everything you were taught.”

누가가 그의 복음서를 쓴 것은 서기 60년대 초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직업은 의사였고(골로새서 4:14), 바울의 동역자로서(빌레몬 1:24) 바울의 주치의 역할을 합니다. 누가가 예수님을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누가는 시리아 안디옥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1년 동안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했던 바울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만난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자신의 관점에 따라 편집한 것이 ‘누가복음’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 말씀은 ‘같은 날 저녁에(That Sunday evening, 요한복음 20:19)’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부활하신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꼭 잠그고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미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내가 주님을 보았어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nonsense)라고 무시해 버리고(누가복음 24:11),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어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서야 여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누가복음 24:5-8) 여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꼭 그렇거든요?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적인 상황들이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절망감 때문에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What consumes your mind controls your life(당신의 마음을 삼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합니다).” “We have to pray with our eyes on God, not on the problems(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들을 봐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여자들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문을 잠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상관없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샬롬(Peace be with you)!” 

우리 모두에게 평안의 인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불안을 안고 살고 있거든요? 1년 후, 2년 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청년들은 청년들 대로, 나이든 사람들은 또 나이든 사람들 대로,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가 아닌 다른 평화를 준다고 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주는 평화를 소유한 사람들은 충분히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충분히 그런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이 ‘평화의 왕(the Prince of Peace)’이거든요. 이 말씀이 이사야 9:6에 나오는데요.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은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1834-1892, 영국)이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요. 이 목사님의 별명이 ‘설교의 왕자(the prince of preachers)’였습니다. 청교도 신학에 뿌리를 둔 스펄전 목사님은 전통적인 교리를 생동감 있고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설교 시간마다 감동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스펄전 목사님의 별명이 ‘설교의 왕자’였습니다. 설교를 제일 잘하시는 목사님, 설교하면 찰스 스펄전, 이런 뜻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평화의 왕자(the Prince of Peace)’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평화의 권위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Doug Hershey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According to Jesus, what the Lord is freely giving His followers is different than what you can find on our own in the world. This is a true peace that empowers us to be all that we were designed to be – fully and completely. It is a gift from the Creator Himself to those who follow Him(예수님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평화는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창조된 모습대로 우리를 온전하게 세워주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샬롬)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샬롬’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이런 축복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마태복음 5: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평화를 창조하는 ‘peacemakers’가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자 제자들은 무척 기뻐했다고 썼습니다(요한복음 20:20). 그런데, 그 자리에 제자 도마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도마는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요한복음 20:25)”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도마의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사람들은 쉽게 도마를 가리켜 ‘의심장이 도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도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해야 믿습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경험주의 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영국)으로부터 시작해서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와 데이비스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을 통해서 발전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백지(Tabula rasa)’와 같은데, 경험을 통하여 백지에 그림이 그려지듯이 지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주의 철학을 교육이론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유명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미국)입니다.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 1916)’ ‘경험과 교육(Experience and Education, 1938)’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 1934)’ 등 많은 명 저서를 남겼습니다.

꼭 이런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더라도, 부활이라는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일주일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에 오셨습니다. 이 때도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도마,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7절) 

도마는 정말 예수님의 말 대로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을 찔러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나 있는 창자국을 만져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옆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후에 이런 글을 남깁니다.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3)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 제자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는데, 여러분들도 우리와 같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인식하는 데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경험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경험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은 경험이나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깨닫게 되는 진리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29절) 우리 믿음생활에서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도마처럼 보고, 만져보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구름처럼 많은 부활의 증인들(a great cloud of witnesses, 히브리서 12:1)’이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다음 세대를 위해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4/18/2021 |

부활절이 지나고(2) After Jesus’ Resurrection

요한복음 20:11-18

오늘은 ‘부활절이 지나고’ 시리즈 설교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설교 내용은 지난 주일 설교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무덤 안을 살펴본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까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막달라는 무덤 안을 들여 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울고 있느냐?” 막달라가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어디론가 가져갔는데,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3절)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 말씀을 읽다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 같은데,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서로 비슷비슷하게 기록된 것도 있지만, 어떤 말씀은 서로 많이 다르게 기록된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다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었다고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했습니다(누가복음 24:10). 요한이 기록한 말씀과 누가가 기록한 말씀이 서로 다른데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학자들의 주장에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대체로 누가복음이 기록된 것은 서기 60년대 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서기 90년경이고요. 두 복음서의 기록 연대가 30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기록 연대가 30년이나 차이가 나는 두 복음서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더 믿음이 가지 않습니까? 두 복음서의 기록이 서로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이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는 구전(oral tradition)으로 전해졌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저의 어릴 때 기억입니다만, 저희 집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조금 더 들어간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마을에 교회가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 전도사님과 저희 집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큰 도시 전주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전도사님과 저희 아버님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부흥회에 갔다 오실 때 찬송가를 많이 배워 와서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악보가 없을 때니까 순전히 부흥회에서 불렀던 것을 기억해서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음악에 좀 조예(造詣)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부흥회에서 어떻게 불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찬송가를 배운 교인들은 엉터리로 찬송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찬송가 악보를 보았더니 전혀 틀리게 부른 찬송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전으로 전해진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기록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똑 같으면 그것이 더 이상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자들의 이름까지 나와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다른 여자들의 이름은 모두 빠지고 막달라 혼자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기록된 역사를 알고 보면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우리가 복음서 말씀을 읽을 때는 다른 복음서 말씀도 같이 읽어서 예수님 이야기를 총체적(總體的)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막달라가 무덤에서 만난 두 천사는 “막달라, 왜 울고 있느냐?”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Why are you looking among the dead for someone who is alive? He isn't here! He is risen from the dead).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4:5-7)”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마치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정말 감동적인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슬플 때가 있습니다.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의욕이 떨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시거든요?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막달라 뒤에 서 계셨습니다. 하지만 막달라는 뒤를 돌아보면서도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막달라,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막달라는 이 사람이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인 줄 알고 “저, 당신이 그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어디로 옮겨 놓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셔 갈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에게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막달라는 몸을 돌려 “랍오니!” 하면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다만 너는 나의 형제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17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막달라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이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지금 막달라는 죽은 줄로 알았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예수님의 최종적인 존재 양식(the final form of Jesus’ existence)’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고 그 다음에는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영원히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지금 네가 해야 할 시급한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데, 지금 나를 그렇게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 말을 내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17절)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마태복음 28:10)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리아로부터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예수님을 뵈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6:11)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목격자들이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반전(大反轉)입니다. 예수님 이야기에 여자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자들이었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유대사회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고가 지배하던 사회였습니다. 출애굽 때 나온 사람들이 60만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에 아이들과 여자들은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출애굽기 12:37).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빵과 생선을 먹은 사람들이 5,00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이들과 여자들은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요한복음 6:10).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0:42) 이 말씀에 나오는 ‘좋은 편’이라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요즘 말하는 ‘젠더 이슈(Gender issues)’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고, 아무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다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에 보면 예수님을 부름을 받은 막달라는 여자의 몸으로 제자들과 행동을 같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오해합니다. 유월절에 무슨 큰 일을 벌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막달라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상당한 분별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막달라는 제자들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고 그분이 어떻게 하시든지 우리는 그분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를 따로 만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 너는 나의 증인이다(Maria, you are my witness)!” 그 영화에서 제일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막달라에게 먼저 메시지를 주셨다는 말에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막달라를 시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막달라는 제자들과 갈라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자막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매장의 순간을 지켰다. 그녀는 부활한 예수의 첫 번째 증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 591년 그레고리 교황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선포했고, 오늘날까지 잘못 알려져 있다. 2016년 교황청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과 동등한 지위로 인정했고, 부활한 예수의 첫 목격자라고 선언했다.”

설교를 마치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보자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람들 눈에 모두 ‘갈릴리 사람들(Gal¬ileans)’로 보였습니다(마태복음 26:69, 마가복음 14:70, 누가복음 23:6, 사도행전 2:7). 갈릴리는 제자들의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고, 갈릴리는 제자들이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던 곳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 피로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이 당하신 수치를 함께 겪읍시다(So also Jesus suffered and died outside the city gates to make his people holy by means of his own blood. So let us go out to him, outside the camp, and bear the disgrace he bore).” (히브리서 13:12-13)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이 ‘골고다’입니다. 이 ‘골고다’가 원래는 ‘성문 밖’에 있었는데, 후에 예루살렘 성문 경계를 새로 정하면서 성 안에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성문 안에’ 있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곳도 ‘성 문 밖’이라는 것입니다. 의미상으로 볼 때, ‘갈릴리’는 ‘성문 안’이 아니라 ‘성문 밖’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죽으셨듯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현장은 ‘성문 밖’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리켜 ‘갈릴리 사람들(Galileans)’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을 멸시와 천대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광을 받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생활 열심히 하면 고생하지 않고 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삶에 고난이 없고, 십자가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었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곳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세기 때 교회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교황은 엄청난 힘을 소유했고, 교회들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거든요? 근래에 와서 교회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교회는 섬김을 받는 곳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곳이라고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은 영광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고난과 섬김의 자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갈릴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성문 밖 갈릴리’입니다.


4/11/2021 |

부활절이 지나고(1) After Jesus’ Resurrection

요한복음 20:1-10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일제히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것으로 기록했지만, 마태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태복음 28:1)’라고 했고,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마가복음 16:1)’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누가복음 23:55)’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시간은 ‘새벽(dawn)’ 혹은 ‘매우 일찍이 해가 돋을 때(very early in the morning)’였습니다. 마태는 이 때를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의 첫 날 동틀 무렵에’라고 기록했습니다. NLT 성경은 이 말씀을 ‘Early on Sunday morning, as the new day was dawni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부활에 대한 마태의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마치 새날이 동터 오는 것처럼, 그의 인생에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새 날’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와는 단절된, 전혀 다른 삶이 그의 앞에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넌센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도 안 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부활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둥, 여자들이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엉뚱한 무덤을 찾아간 것이라는 둥, 예수님의 환상을 본 것이라는 둥,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라는 설들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들을 일축(一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공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10-12) 전에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공의회(산헤드린)와 같은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합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아무리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조롱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우리가 믿는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이 여자들이 이렇게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것을 보면, 이 여자들이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멀리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은 안식일이 지나 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여자들의 손에는 예수님의 몸에 발라드릴 ‘향품(burial spices)’이 들려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향품을 발라주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여자들이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 혼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요? 그 시간에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막달라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참 불행했던 여자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평소에는 사람들이 막달라라고 불렀습습니다. 성경에 보면 막달라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고 합니다(누가복음 8:2). 그만큼 막달라의 증세가 아주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때 이후 막달라는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8) 이른 새벽에 혼자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가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막달라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무서움을 이기고도 남았습니다. 막달라는 이 사랑의 힘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자들에게 유일한 걱정거리는 “무덤의 문을 막아 놓은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줄까(마가복음 16:3)?”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자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강한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아있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2)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서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4).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진 것을 본 막달라는 뭔가 일이 생긴 것을 알고 곧 바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가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다른 곳으로 빼간 것 같아요.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모르겠어요(2-3절)” 하고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는 급히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유진 버낸드(Eugène Burnand, 1850-1021, 스위스)가 그린 ‘The disciples Peter and John running to the tomb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1898’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두 제자의 얼굴을 보십시오. 얼굴에 고통과 안도, 슬픔과 놀람, 절망과 경이의 상반된 감정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앞을 향해 곧바로 고정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덤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두 제자가 달려가서 본 무덤은 막달라가 말한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무덤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고운 베(the linen wrappings)가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감쌌던 얇은 천입니다. 그리고 한 쪽에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이, 쉬운 성경에는 “잘 개켜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개역성경 개정판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7절) “while the cloth that had covered Jesus' head was folded up and lying apart from the other wrappings.” (NLT) “The [burial] face-cloth which had been on Jesu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Amplified Bible) 번역하면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은 동그랗게 감아 올린 상태로 한 곳에 놓여 있었다” 이런 뜻입니다. 머리를 감쌌던 천은 신기하게도 동그랗게 머리만 빠져나간 상태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 무덤 안의 상태를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사실을 영영 모를 뻔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무덤 안을 살펴본 제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했는데요. 우리는 그 제자가 요한복음을 쓴 요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 두 제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9-10절) 만일 이 때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반드시 부활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믿었다면 예사롭지 않은 무덤 안의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무덤 안에서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때는 두 제자가 무덤 안에서 본 것들을 그리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약 60년이 지난 때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 때 무덤 안에서 보았던 기이한 장면들을 기억하고 비교적 상세하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아, 맞구나! 그래서 그 때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들이 동그랗게 그런 모양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구나!”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관적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쓴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사순절 새벽 기도 때 소개했던 말씀입니다. “부활은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역사에 기록된 어떤 사건보다 더 철저하게 증명된 사실입니다(The resurrec-tion is a fact better attested than any event recorded in any history, whether ancient or modern).” 팀 켈러(Timothy Keller, 1950-) 목사님의 말을 한번 들어 볼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면 당신은 그가 하신 모든 말씀들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가 무슨 말을 했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걸려있는 중요한 이슈는 당신이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부활하셨느냐 부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If Jesus rose from the dead, then you have to accept all that he said; if he didn’t rise from the dead, then why worry about any of what he said? The issue on which everything hangs is not whether or not you like his teaching but whether or not he rose from the dead).” 팀 켈러 목사님은 뉴욕에 있는 ‘리디머 교회(Redeemer Church)’를 설립하신 분입니다. 요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님 중 한 분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말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느냐 부활하지 않았느냐에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목적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기고 목적이 생깁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도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교회에 나와서 성경공부하고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이 말한대로 부활이 없고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이 난다면 “그냥 먹고 마시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자(고린도전서 15:32)” 이런 식의 삶의 태도가 훨씬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질문들이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지금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바울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 가치 있는 일, 옳은 일,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 싸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가요? ‘선한 싸움’이 아니라면 싸울 가치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한 삶을 레이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곁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은 그가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 아닙니까?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바울의 권면을 함께 읽고 마치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