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021 |

사순절 새벽기도의 의미(2) The Meaning of the Lenten Prayer

누가복음 22:39-46

지난 주 설교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통은 ‘쌍방의 소통(two way communication)’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듯이 말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니까 친구와 이야기를 하듯이 쉽게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는 하나님과 대화를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모세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회막 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마치 사람이 친구에게 말하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Inside the Tent of Meeting,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one speaks to a friend).” (출애굽기 33:11)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친구에게 말하듯이 말씀하시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명기 저자는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그 뒤로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34:10) 신명기 저자에게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아주 인상 깊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기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로 여러분의 기도생활에 적용을 하려고 하면 당장에는 어색하고 잘 안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쉽게 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서툴고 잘 안 되는 일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욕심을 내지 말고, 조금씩 시도를 하면 점점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들어야 하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그만큼 더 민감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가도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 있으면,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마치 지도 교수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의 응답에 대하여 가장 신뢰하는 말씀이 로마서 8:16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언해 주시는데,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해 주신다고 합니다. “His Spirit joins with our spirit to affirm that we are God's children.” (NLT)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NIV) “God's Spirit joins himself to our spirits to declare that we are God's children.” (Good News Translation) “The Spirit himself bears witness to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NET Bible) 쉽게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영(마음)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 보세요. 이것을 ‘성령의 내적 음성(the inner voice of the Spirit)’이라고 합니다.

저의 기도생활을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조금이라도 여러분의 기도생활에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도 시간이 좋은 기회입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포기하지 말고요. 한걸음 한걸음 걸음을 떼 보세요.

오늘 누가복음 말씀에서도 기도에 대한 많은 유익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눈에 띄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습관을 좇아’라는 말은 ‘늘 하던대로(as usual, NLT, NlV)’ ‘according to to the custom(BLB)’ ‘as He was accustomed(NKJV)’ ‘as was his custom(NASB)’ ‘as was his custom(ESV)’ ‘as was His habit(Amplified Bible)'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신 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시던 때였습니다. 참으로 감동스러운 것은, 그 마지막 밤에도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감람산(올리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누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지요?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밤에도 늘 하시던 대로 식사 후에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새벽에는 성전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밤에는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 계실 때는 새벽에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 기도는 영적인 습관이었다는 것입니다. 밥을 왜 하루에 세 번을 먹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에 세 번 밥을 먹는 것이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습관’이라는 말은 그것이 몸에 배고 익숙해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습관이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이라는 말을 할 때는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습관적’이라는 말이 ‘형식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래 의미나 정신을 잃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되풀이 하는 것을 ‘습관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기도가 습관이었다고 말할 때는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좋은 의미로 습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이 몸에 배서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크리스천의 훈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사역에 대한 열심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속성에서 나오는 열정으로는, 주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냄새 나는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하나님, 세상, 그리고 죄와 사탄을 향한 관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목사님도 크리스천의 훈련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중에 리처드 포스터(Richrard Foster, 1942-) 같은 사람도 훈련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그가 쓴 ‘Celebration of Discipline: The Path to Spiritual Growth(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지금 교회들이 훈련 없는 크리스천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40절).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절)”고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유혹(temptation)’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as wheat.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누가복음 22:31-32) 사탄은 베드로의 믿음을 시험해 보겠다고 허락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탄이 욥을 시험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베드로는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해 보이는 사람도 자기의 힘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은 내 믿음을 떨어뜨리고, 나를 주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나를 유혹합니다. 이 때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사탄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얻고, 힘을 얻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기도의 내용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기도생활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마라(마태복음 6:7).” “길게 기도하려고 하지 마라(마태복음 6:7).”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마태복음 6:5), 은밀하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라(마태복음 6:6).”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누가복음 22:42)”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애써 더욱 간절히(more fervently, NLT, NASB)’ ‘more earnestly(NIV)’ ‘more intently(Amplified Bible)’ 기도하셨다고 썼습니다. 예수님께는 기도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더욱 열심히, 더욱 열렬하게.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나의 주장,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의지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관철(貫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결론을 내 놓고, 하나님께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자기 목적을 위해 기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후에는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다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가 어떤 식으로 해결되면 좋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결되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아름다웠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는 상, 하 두편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왕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5:5) 다윗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기도생활에 능력이 생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에 능력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harmony)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연주하기 전에 음을 잘 맞춰야 합니다. ‘튜닝(tuning)’을 잘 해야 악기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옳게 분별하고, 그 뜻에 맞추어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가 그런 새벽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고, 그 뜻에 맞게 기도하고, 그 뜻을 실천해 나가면, 우리의 삶의 아름다워진다는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오랫동안 우리 마음에 남는, 그래서 점점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는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21/2021 |

사순절 새벽기도의 의미(1) The Meaning of the Lenten Prayer

마가복음 1:34-39

지난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번 주 월요일부터 매일 아침 6시에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사순절’을 지킵니다. ‘사순(四旬)’이라는 말은 40이라는 말입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40일 동안의 절기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렌트(Lent)’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은 기도(prayer)와 회개(penitence) 와 금식(fasting)의 기간으로 지켜왔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간으로 삼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이 기간에 금식(fasting)을 했습니다. 금식이라는 말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마가복음 말씀을 보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길지 않은 말씀인데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복음서에는 병자들에 대한 말씀이 그렇게 많이 나올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2,000년 예수님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 때는 의술(醫術)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의 민간요법에 의존했던 때입니다. 그 때도 나병환자들이 있었고, 소아마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병을 잘 고치는 예수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근처 사방에 퍼졌습니다. 시리아에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퍼졌습니다(마태복음 4:24). 이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시리아,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갈릴리 건너편에서 온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갈릴리 건너편’이라는 말은 ‘요단강 동편(the east of the Jordan River)’ 이방 사람들의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해가 질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손을 얹고 고쳐 주셨습니다.”(누가복음 4:40) 심지어 해가 진 후에도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퇴근 시간 조금만 지나도 가게 문에 “Sorry, we are CLOSED(미안합니다. 문 닫았습니다)” 라는 사인판을 내걸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세요. 온 세상이 저 사람을 따르고 있습니다(Look how the whole world has gone after him).” (요한복음 12:19, NIV) 정말 온 세상이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그 다음 날, 예수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좀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전 날 그렇게 늦게까지 일을 했으면, 다음 날은 보통 늦잠을 자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음 날 일어나신 시간까지 나와 있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before daybreak)’ ‘very early in the morning(NIV)’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짐(부담)이 아니었구나!” “예수님께는 기도가 즐거운 시간이었구나!” “예수님께는 기도하는 시간이 오히려 몸과 마음이 쉼을 얻는 시간이었구나!”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친 조용한 시간이 하나님과 대면하기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떨어진 곳, 심지어 자기 제자들과도 떨어진 곳에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물질적인 가치가 영적인 가치보다 위에 있다고 믿는 때입니다. 이런 경향이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지금 청년들은 기도나, 성경읽기나, 성경공부에 얼마나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별로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넌크리스천 청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청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기도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얘기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하는 시간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기도는 힘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기도가 힘이 드는 이유는 처음부터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communication)’이거든요? 소통도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쌍방 소통(two way communication)’이거든요? ‘쌍방 소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방적으로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잖아요? 친구들과의 대화가 재미있고, 힘이 들지 않는 이유는 서로 얘기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나님과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또 하나 기도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힘들고, 왜 기도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히브리서 5:7-8)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계실 때’라는 말은 우리와 똑 같은 상황 속에 있을 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가 무슨 이유를 대면서 기도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기도하셨는지 모르지만, 난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모든 일이 가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무슨 일인지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그 일들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보통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이라고 말하잖아요? 누가복음 1:37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차 범퍼에 이렇게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Impossible is nothing with God(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를 정확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큰 소리와 눈물로’라는 말씀은 그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늘 이런 식으로 간절하고 절박했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옵션이 없었습니다. 기도 외에도 다른 옵션이 없어야 그 사람의 기도가 간절해집니다. 

또 하나, 이 히브리서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심으로 응답을 받으셨습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일방적인 기도가 아니었고, 쌍방적인 기도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answer)’을 들으신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 말씀을 잘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장면이 생각납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가복음 14:36)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22:44). 이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지만, 기도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심으로 기도하셨을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본(example)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기도는 힘든 일이 아니라 즐겁게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이라는 것,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므로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기도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옵니다.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경우도 있고, 내적인 확신과 평안으로 주어지는 때도 있고, 예배를 통해서 주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지각(understanding)을 초월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온다고 했습니다(빌립보서 4:7). 앞으로 기도의 응답에 대해 더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38절 말씀,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이 말씀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알고 계시나요?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다른 마을로 가지 말고 이 마을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요. 제자들은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해주려고 이른 새벽부터 찾았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마을 사람들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38절 말씀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아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누가복음 4:42-43).

왜 이 말씀이 중요할까요? 또 이 말씀이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여러분, 정해진 곳이 없이 떠도는 것은 참 고달픈 삶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떠돌아다니는 생활에 불만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예수님 일행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할 테니 이 마을을 떠나지 말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부탁을 단번에 거절하시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모든 마을,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I must preach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cities also, for I was sent for this purpose., NASB, 누가복음 4:43)”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마을을 떠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省察)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이 목적이 충실하고 있는가?” “내 사역의 방향은 올바로 설정되어 있는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에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이 나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벌써 20년이 넘게 사순절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올해는 좀 특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순절 새벽기도라니?” 좀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순절 기도는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순절 기도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지켜 온 전통의 한 부분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을 우리 시대에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순절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의미입니다.


2/14/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6)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4) To Live As Influential People For Good

마가복음 10:42-45

얼마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가 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는가?”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네로(54-68년), 도미티아누스(81-96년), 트라야누스(98-117년), 하드리아누스(117-138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데키우스(249-251년), 발레리아누스(253-260년), 이렇게 기독교는 로마에서 200년 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는 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瞑想錄, Meditations)’을 남긴 황제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글을 쓴 지혜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잔인하게 크리스천들을 박해할 수 있을까요? 그는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시체를 치우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306-337년) 황제 때 와서 기독교를 공인(公認)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하게 된 것은 서기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년) 황제 때입니다. 그의 이름에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저의 관심은 이렇게 200년이 넘게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습니다. 로마의 다신론에 대한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자기 통치 기반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모진 박해 상황에서도 세력이 꺾이지 않았던 기독교에 대해 날로 세력이 쇠퇴해 가는 로마가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들 가운데 알란 클라이더(Alan Kreider, 1941-2017)라는 신학자의 주장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게 된 배경에는 크리스천들의 사랑의 실천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 당시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복음 전파가 행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호소력을 가지고 넓은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크리스천들의 삶의 모범과 사랑의 실천이 로마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이미 로마의 지배층 중에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로마 귀족들이 집에 하인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인 중에 크리스천들이 많았습니다. 귀족들은 크리스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정신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로마서에 나오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7-18, 21)” 이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사랑으로,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섬기기 위한 것(to serve others)’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높아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높아지는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높아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정말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진정으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 ‘종’이라는 말은 ‘διάκονος(다이아코노스)’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서번트(servant)’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δοῦλος(둘로스)’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슬레이브(slave)’라고 번역합니다. ‘서번트’ 보다는 ‘슬레이브’가 훨씬 더 의미가 강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모두 ‘종’으로 번역했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는 ‘다이아코노스’라는 말을 사용하셨고, 다른 하나는 ‘둘로스’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한동안 리더십에 대한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리더십에는 대체로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리더십 형태인데, 강력한 힘으로 조직을 끌고 가는 형태입니다. 둘째는, 민주적인 리더십입니다. 리더가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고, 조직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조직원들의 의견들을 청취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리더십 형태입니다. 셋째로, 앞의 두 가지 리더십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섬기는 리더십(servant style leadership)’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리더십 형태입니다. 회사들이 뒤늦게 이런 리더십을 적용해 보려고 하지만 이게 잘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리더십 형태만 배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알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리더십 형태만 배워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 희생을 동반(同伴)합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섬김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책상에 앉아 머리 속으로 섬김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에 대하여 말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 놓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속물(代贖物)’이라는 말은 속죄를 받기 위해 대신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랜섬(ransom)’이라고 합니다. ‘몸값’ 혹은 ‘보석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놓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섬김과 겸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없는 섬김이 있을 수 없고, 섬김이 없는 겸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자기의 권리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목숨, 자기 생명이 소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 생명에 대해서 누구도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놓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무도 나에게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No one can take my life from me. I sacrifice it voluntarily).” (요한복음 10:18) 내 스스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써 겸손과 섬김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모두 닦아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요한복음 13:12-17)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종들은 언제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주인이 볼 때만 열심히 일하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주인을 섬기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열심히 일하십시오.” (골로새서 3:22-23)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저는 그런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에 대한 말씀을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실험실에서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는 탁월한 예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을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위선적으로 실천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이 볼 때만 하는 척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은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요한복음 7:38 말씀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섬김이 나를 통로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 나가는 것이 우리의 겸손과 섬김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는 지금 이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면서 이 질문에 응답하는 설교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답이 어렵고, 대답을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대답을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질문을 하면서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반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함으로써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1세기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실천으로 로마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정말 이 사실이 믿어집니까? 우리 앞에 시작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호모 데우스(Home Deus)’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인간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는 교만한 시대입니다. 앞으로 AI가 어떤 식으로 우리 삶에 관계하고, 어떤 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지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AI가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호모 데우스’의 시대를 파멸과 불행해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이 시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그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1세기의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살아서 로마제국을 정복했고, 그렇게 살아서 사랑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이 시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 때는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쓴 ‘주님은 나의 최고봉(My Utmost For His Highest)’ 이 책을 가지고 새벽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Is it excessive to say that rivers will flow out of one individual believer? Do you look at yourself and say, ‘But I don’t see the rivers?’ Through the history of God’s work you will usually find that He has started with the obscure, the unknown, the ignored, but those who have been steadfastly true to Jesus Christ(한 개인으로부터 강물이 흘러나온다고 말하는 것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나에게는 강물이 보이지도 않아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무명의 사람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무시를 당하는 사람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속 충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너무 작아 보이는 일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2/7/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5)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3) To Live Influential People For Good

마태복음 5:1-12

마태복음 5-7장의 말씀을 학자들은 ‘산상설교(山上說敎, The Sermon on the mountai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가르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산을 생각하면 떠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산은 거의 모두 높은 언덕(hills) 정도입니다. 갈릴리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물의 근원지인 ‘헐몬산(Mount Hermon, 2,814m)’을 제외하고는 높은 산이 없습니다. 헐몬산에는 평소에도 눈이 쌓여 있어 스키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산으로 알려진 산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 산의 이름이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는 ‘축복산(The Mount of Beatitudes)’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입니다. 갈릴리 호수 면보다 약 200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팔복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이는 자리에 지금 ‘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가 있습니다.

당시에 랍비들은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뭔가 할 말이 있으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랍비 앞에 둘러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유명한 여덟 가지 축복의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The Beatitudes’라고 합니다. 이 여덟 가지 축복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무슨 축복이란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은 크리스천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읽을 때 특히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은 하나 하나가 모두 크리스천의 삶에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곱 번째 축복이 특히 마음에 들어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9절)

우리는 평화에 대한 이 축복의 말씀을 읽으면서 성 프랜시스가 쓴 기도문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 프랜시스(St. Francis, 1181-1226, 이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To follow the teachings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to walk in his footsteps)’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평생 그 목적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이 때 프란시스의 삶을 인도해 준 말씀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마태복음 10:9)”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평화의 기도문을 쓰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프란시스의 방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프란시스에게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시스는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더니, 이 나병에 걸린 사람이 하는 말이 지금 자기가 너무 추우니 당신의 알몸으로 나를 녹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입었던 옷을 벗고 자기의 체온으로 그 나병에 걸린 사람의 몸을 녹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프란시스가 일어나보니, 그 사람은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그가 왔다 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시스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때 그가 올렸던 기도가 바로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where there is injury, let me bring pardon;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Where there is discord, let me bring harmony.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Where there is error, let me bring truth.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Where there is doubt, let me bring faith.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where there is despair, let me bring hope;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where there is darkness, let me bring light;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where there is sadness, let me bring joy.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Lord, grant that I may seek rather to comfort than to be comforted;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to understand, than to be understood;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to love than to be loved.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and it is in dying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성 프란시스는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 때 벌써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이면,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어느 때쯤일까요? 대략 몽골이 우리나라를 침입했을 때쯤 됩니다. 그 때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려고 했던 때입니다. 동방의 한 나라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지구의 한편에서는 프란시스라는 수도사가 하나님께 평화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를 단순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처럼 살아보려고 했던 수도사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프란시스 수도회(Franciscans)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알아보았더니. 특이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PP. III, 1160-1216)가 프란시스를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프란시스의 알현을 받은 교황은 프란시스가 제출한 수도회의 회칙과 생활 양식을 읽어보고는 좋긴 하지만 너무 이상적이라고 하면서 인준을 유보(留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황은 이내 생각을 바꿨습니다. 프란시스가 그 당시 권력 지향적이고 부유해진 교회를 쇄신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교황은 프란시스의 수도회가 앞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그 규모가 더 커지고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축복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만일 프란시스가 교황의 인정을 받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프란시스는 이단으로 몰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특이한 것은 프란시스가 이집트의 다미에타(Damietta)로 가서, 알카밀(al-Kamel)이라는 술탄(Sultan)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그곳이 사라센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그 때가 1219년, 프란시스의 나이 38살 때였습니다. 그 때 십자군과 사라센 군대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4주 동안 휴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때 프란시스가 그의 동료 수사 한 사람을 데리고 사라센 진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곧 사라센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가서 며칠 동안 그의 막사에서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와 술탄과의 만남은 당시 십자군의 기록에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술탄은 프란시스를 시종일관 친절하게 대접하였고,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십자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프란시스는 평화에 대해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실천하기 위한 행동의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곧 ‘평화의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날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자손도 아니며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의 기업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여러분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평안을 누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치 둘 사이에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 놓던 율법을 없애심으로, 이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새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이 둘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찾아오셔서, 평화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에베소서 2:12-17) 마음에 들어오는 두 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미움을 벽을 허물고 이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16절, 15절)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평화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17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평화가 없는 곳에, 다툼과 반목과 미움과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오는 새 시대에 우리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새 시대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이 해야 할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 저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을 고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오는 시대를 위해서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는 결정들이 다음 시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미래를 내다보는 책임 있는 결정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舊) 시대가 퇴진(退陣)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대립과 갈등이 있겠습니까? 지금 평상시 같으면 생각하지도 못할 단기적인 조치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이 끝이 나도 지금의 조치들을 계속 가져가려고 하는 세력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전제주의적 감시냐? 아니면 시민 자율권이냐?”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한 편을 결정해야 합니다. 과학의 발달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한 나라들이 있습니다. 중국, 이스라엘, 북한 같은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한국, 대만, 싱가폴 등은 광범위한 검사와 정보 공유, 그리고 국가와 시민들 사이의 신뢰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한 대표적인 나라들입니다. “국수주의적인 고립이냐? 아니면 국제적인 연대냐?” “독재적 리더십이냐? 아니면 민주적 리더십이냐?”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메시지를 세상을 향해 던져야 하겠습니까?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각자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평화를 창조하는, ‘Peace Makers’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은 국론 분열이 매우 심각합니다. 촛불 세력과 태극기 부대,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K방역’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정부가 방역에 실패했다는 여론을 조성하는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국민의 절반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국론 분열의 현실에 대하여 아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두 입을 닫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마저 양 진영으로 갈라진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이 나서서 국론을 하나로 만드는 화해와 평화의 창조자들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들이 근거 없는 가짜 뉴스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한자에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라고 말이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뜻입니다. 현실이 암울할수록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선한 영향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데, 이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 여론 조사에서는 조사에 참가한 76%의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프란시스는 나를 주님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 달라고, ‘미움’과 ‘다툼’과 ‘분열’과 ‘의심’과 ‘절망’과 ‘어둠’이 있는 곳에 평화를 창조하는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세상을 등지고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창조하는 도구’로 살기를 원했던 진정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1/31/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2) To Live As Influential People For Good

마태복음 5:13-16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엄청난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지금은 밤이 깊고 ‘새 시대’의 새벽이 동터오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때입니다(로마서 13:12). 바울은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말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로마서 13:14).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세상을 ‘새 시대’라고 보았습니다. 이 ‘새 시대’를 살아야 할 사람들은 ‘새 시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빛의 갑옷을 입는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마치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듯이, ‘새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어둠의 생활을 청산하고 빛으로 걸어 나오는 삶이고, 질서 없고 문란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단정하고 규모 있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5장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이 제자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금과 빛을 일종의 ‘수사적(修辭的)인 표현(a figure of speech)’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을 제자들의 삶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알려진 대로 예수님은 언어의 천재라고 할 만큼 뛰어난 수사법을 구사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신 ‘비유(比喩, parables)’는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르로 알려져 있습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영국)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We should not ask ‘What is wrong with the world?’ for that diagnosis has already given. Rather we should ask, ‘What has happened to salt and light(우리는 이미 진단이 내려진 ‘이 세상이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신 우리는 ‘소금과 빛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유체이탈식(幽體離脫式) 화법을 사용해서, 나는 쏙 빼놓고 세상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분석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은 그것이 아니잖습니까? 세상에 대한 분석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진단이 이미 내려진 마당에,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분석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석해야 할 것은 왜 크리스천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하는지, 도대체 크리스천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소금으로서, 빛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일까요? 이 엄청난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두마디로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이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파악하는 노력과 반성이 부족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를 나가는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된 교회와 선교 단체들을 보십시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할 때 그 중심에 신천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중국에서 감염균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역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무너뜨린 중심에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에 대한 경고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광화문 광장에 수십만이 모여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집회를 법원에서 허가를 내준 것입니다. 많은 감염자가 나오고 방역 당국의 지시를 거부했던 사랑제일교회는 교회가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BTJ’라는 선교 센터가 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몰래 대규모 모임을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1,000명이 모여 1박 2일동안 선교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도시락도 나누어 먹고요. 하지만 여기서 감염자가 무더기로 나와 방역 시스템을 무너뜨리더니, 또 다시 ‘TCS 국제학교’ ‘IEM 국제학교’ 등에서 무더기로 감염자들이 나왔습니다. 모두 개신교 선교 단체들이 운영하는 비인가 학교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선교 훈련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왜 이런 시국에 선교 훈련을 받습니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은 것 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주장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종교적인 도그마(religious dogma)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자신들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소금과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감염자들이 속출하는데도 행선지를 감추고, 전화를 받지 않고, 방역 당국과 연락을 끊고, 방역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정부가 교회를 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들의 그런 행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기독교 단체들이 사과 성명을 냈습니다. “이웃 생명의 안전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신앙 양태만 고집하는 교회를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섬처럼 떠도는 교회는 선교적 존재 가치를 상실한 교회로 더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과연 기독교 단체들이 낸 사과 성명서 하나로 일부 잘못된 교회들의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 도표를 한번 보십시오. 왼쪽 파란 원에는 ‘소금’이라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 갈색으로 칠한 원에는 ‘빛’이라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두 원이 겹쳐지는 곳에 “이와 같이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16절)”는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서 소금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선한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Salt and light speak of the influence Christians can exercise for good in society(소금과 빛은 크리스천이 사회에서 선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은 우리의 의도와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의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9:50 말씀을 한번 보세요.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서로가 소금을 지니고 화목하게 지내라.”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for seasoning. But if it loses its flavor, how do you make it salty again? You must have the qualities of salt among yourselves and live in peace with each other(소금은 맛을 내는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그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서로 소금의 질을 유지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또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and useful; but if salt has lost its saltiness (purpose), how will you make it salty? Have salt within yourselves continually, and be at peace with one another(소금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금이 그의 짠맛,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계속해서 소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Amplified Bible)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소금의 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소금의 질을 유지하지 않으면 제자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소금에 대한 구약성경의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배경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8:19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예물로 드리는 것을 나 여호와가 너와 네 아들들과 딸들에게 주리니, 그것은 영원히 너희의 몫이다. 이것은 너와 네 자손을 위해 여호와 앞에서 대대로 지켜야 할 변치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It is a covenant of salt forever before the LORD with you).”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라는 것은 소금이 변질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변하지 않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하신 약속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세상 속에서 나의 제자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에 대한 충성심(allegiance)을 계속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너희들의 정체성이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소금을 제자직과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다시 짠맛을 내겠느냐?” (누가복음 13:34-35)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은 곧 소금으로서 맛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도표 왼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Covenant obedience to the whole law as Jesus preached it(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체 율법에 대한 언약적인 순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약적인 순종. 이것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실패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패한 것은 내가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과 반성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도 ‘BTJ’라는 선교 단체를 통해 선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어둠 속에서는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둠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빛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도표 오른쪽 원에 ‘The personal character of the beatitudes shaped in the light of the cross(십자가의 빛에서 형성된 축복에 대한 개인적인 성격)’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축복된 삶을 크리스천 각자 각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세상에 동화(同化)되어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말았는데 이에 대한 반성 없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매달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해 온 선교사역을 보면 모두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일부 성과를 거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밟고 다닌다(13절)고 하셨는데, 지금의 상황이 꼭 그렇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시대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명사적 대전환을 가져오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큰 교회, 많은 교인수가 중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선교를 하고 있는지, 교회의 예산이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교회들이 정말 정신을 차려서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양육해야 하고,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성급하게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썩지 않도록, 타락하지 않도록,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소금으로서 맛을 내는 사람이 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크리스천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들을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는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세상에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올바로 보여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are not called to shine our own light, we are called to reflect His(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빛을 비추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다).”